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5) : 통일성과 다양성의 모순

동숭동지킴이 2013. 10. 6. 22:10

 

 

베를린 통신 (5) : 통일성과 다양성의 모순

 

 

며칠 전에는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Ausländerbehörde(외국인관청, 한국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해당)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일본이나 미국의 비자 발급방식과 독일은 여러 면에서 달랐습니다. 한 마디로 독일이 더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습니다.

 

 

 

 

 

독일 비자를 발급받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일본이나 미국처럼 주한독일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일본·미국과 달리 보통 3개월짜리 비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 베를린에 체재하는 모 교수의 경우엔 싸우다시피 해서 6개월짜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을 비롯한 EU 국가들은 비자 없이도 3개월은 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3개월을 넘어 체재하려면 국내에서 비록 비자를 받았더라도 독일 가서 다시 비자 받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니 국내에서 비자를 받는 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 일본이나 미국처럼 장기체재 비자를 외국주재 대사관에서 잘 발급해주지 않는 걸까요.

 

 

그리고 독일에서 비자발급 받는 방식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저 같은 신분일 때는 초청대학의 행정처에 업무처리를 맡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엔 보통 2달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독일의 ‘느릿느릿’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이지요. 대학 행정처의 문제인지 외국인관청의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학에 맡기지 않고 당사자가 직접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처리하는 방식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화나 인터넷으로 면담 날짜를 잡는 방식입니다. 다만 이 경우엔 면담 날짜가 보통 2달 후로 잡히니 '빨리 빨리'의 한국인으로선 참기 힘듭니다.

 

 

또 하나의 방식은 약속 없이 직접 외국인관청에 찾아가서 ‘현장 박치기’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엔 외국인 관청 앞에서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입니다.

 

 

저희는 현장박치기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깜깜한 새벽 5시 40분에 외국인관청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랬더니 7시에 문을 여는데도 이미 장사진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100여명 이상이 우리 앞에 서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날은 다행히 7시가 되기 전에 문을 열고 번호표를 나눠 주긴 했습니다. 그리해 일을 마친 것이 12시 반 정도였으니, 장장 7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결국 집에서 2달을 참고 기다리지 않으려면 현장에서 7시간을 몸으로 때우게 만드는 방식입니다.(신학기 개학 때라 학생들이 몰린 탓에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줄서기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추석열차표 살 때나 유명 유치원 입학할 때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열차표 대신에 돈 있으면 비행기표를 사면 되고, 또 빽을 동원해서 표를 구하기도 합니다. 유명 유치원 입학을 위해선 대신 줄서는 사람을 돈 주고 고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일에선 이런 경우에 빽이나 돈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김두관 전 지사도 저희와 같이 깜깜한 새벽부터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람 차별 없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릴 때는 임시직원이라도 동원해서 일을 좀 빨리 처리해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영국에 유학했던 김경훈씨로부터 영국은 독일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영국비자를 받으려면 보통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비자를 받으려면 런던에서 남쪽으로 40분정도나 기차를 타고 가서 일찍부터 기다려야 하고, 또 일 처리에도 하루 종일 걸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영국에선 경우에 따라 비자 발급(또는 연장)이 거부되면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하고 곧장 비행기로 추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자 받는 날 어떤 한국인이 비자연장을 거부 받았지만 한 달의 말미를 받았으니까, 영국이 독일보다 냉혹해 보입니다.(독일도 영국처럼 처리하는 사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7시간이나 기다리는 게 무료했는데, 그나마 김 전 지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김 전 지사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남해 독일마을 사정은 흥미로웠습니다.

 

 

형님이 독일 광부였던 김 전 지사는 남해군수 시절에 남해 독일마을을 조성했습니다.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였던 재독 교포들이 한국에 와서 살 수 있는 마을, 그것도 독일식 마을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아래 사진 참조)

 

 

현재 40채 가까운 주택이 들어서 있고, 재독교포는 영주하거나 아니면 1년에 몇 달 씩 와서 지낸다고 합니다. 며칠 전 10월 3~4일에는 독일 뮌헨의 Oktoberfest(10월 축제)를 모방해 남해 독일마을에서도 맥주축제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남해 독일 마을 모습)                                                   (남해 독일마을 맥주축제)

 

 

이 사업은 한국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했던 광부-간호사들의 노고를 기리는 일이고, 한국-독일의 문화교류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지역차원의 관광단지 개발의 성격도 갖고 있겠지요.

 

 

다만 남해군수가 바뀌면서 이 사업에는 소극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책의 지속성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사안인 셈입니다. 4대강 사업과 같은 잘못된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면 그것도 문제이지만, 새로 바뀐 지도자가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고 과거 사업을 소홀히 하거나 깔아뭉개는 일도 문제이겠지요.

 

 

클린턴 정부말기에 추진되던 북미 화해정책이 부시가 들어서면서 물거품이 된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북한은 “아니 국가 간의 약속을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면 뭘 믿고 외교를 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한 비판이었습니다.

 

 

다만 북한식으로 3대 세습이 이어지면서 과거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는 게 어려워지는 것도 문제이지요. 북한이 중국-베트남 식으로 개혁·개방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데에는 이런 구조적인 한계도 하나의 주요 요인입니다.

 

 

정책의 ‘일관성과 유연성’ 사이의 모순을 어찌 해결할 것인지가 정치의 어려움인 셈입니다. “옳은 일은 일관되어야 하고, 틀린 일은 언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대외적 대내적)약속은 최대한 지켜야 한다.”는 게 정답처럼 보입니다만,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아는 게 쉽지 않지요.

 

 

다시 비자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아예 넉넉잡고 2년짜리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약간 까다로웠는데, FU(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 학생조교인 김영수씨(아래 사진) 덕분에 잘 처리되었습니다.

 

 

사실 영수씨는 한국학과의 보배 같았습니다. 저 같은 초청연구원들의 일상적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일종의 만능해결사입니다. 중고TV 구하는 일부터 관청 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일에서 그랬습니다. (한국학과에는 물론 다른 보배 분들도 많습니다. 차차 소개할테니 먼저 소개 안 해준다고 화내지 마시길. 하하하.)

 

 

 

(제 연구실이 있는 2층 가옥 앞에 서 있는 영수씨)

 

 

영수씨는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의 2세로 한국에서 지낸 적도 있습니다. 기아차 광주공장의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는데, 거기 월급이 너무 작아 전라도를 비롯한 한국 음식의 진수를 제대로 맛볼 여유는 없었다고 합니다.

 

 

비자 받는 날 저녁에 주독 한국대사관이 주최하는 한-독 수교 130주년 파티가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수백 명의 인사들이 참석했고 금난새씨가 지휘하는 연주회도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임을 개최하는 대사관 직원들도 한독 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겠지만, 영수씨 같은 경우도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그렇다고 영수씨는 너무 우쭐해 하지 말기를. 하하하). 특히 저 같은 사람들의 생활세계(Lebenswelt)와 관련해서는 그렇습니다.

 

 

사실 이렇게 외국에 나오면 생활세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슈퍼마켓으로 장도 보러 다니면서 시장도 바로 몸으로 느끼니까요. 과거 고위직이었던 분들이 여기 와서 직접 낑낑거리면서 장 본 물건들을 옮기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습니다.

 

 

한국에선 진보-보수를 넘어서자는 말을 가끔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발언기록을 남겼느냐 어떠냐, 이승만-박정희의 功과 過는 어떤가 따위를 둘러싸고 벌이는 다소 관념적인 대결양상은 그런 말이 나오게끔 합니다.

 

 

하지만 제가 계속 강조했듯이, 진보-보수는 음양(陰陽)의 관계와 같아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둘 사이의 모순은 없을 수 없습니다. 진보-보수는 청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모순 속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지요.

 

 

다만 진보-보수의 대립 차원을 보다 생활세계에 가깝게 가져갈 필요는 있겠습니다. 한국학과의 영수씨가 도움을 준 것 같은 생활세계 속에서 진보-보수를 따져보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이석기 사태로 인해 진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꺼림칙한 게 한국현실입니다. 그래서 아예 진보라는 말을 폐기하고 싶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일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 생각엔 진보파들이 “생활진보”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때까지 제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개혁적 진보’가 보다 적절하지만, ‘관념진보’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는 차원에서 ‘생활진보’라는 용어도 같이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생활진보란 집 문제나 세금 문제나 노인연금 문제 같은 생활 속에서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임을 강조하자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자꾸 딴 곳으로 빠집니다만, 또 다시 비자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독일이든 영국인든 미국이든 오늘날 선진 각국이 비자 발급에 까다로운 것은 외국인의 유입을 규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한국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녀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비자 담당자가 이런 일은 독일인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니 곤란하다고 했답니다. 대신에 간호사 일을 하려고 한다면 비자를 연장해줄 수 있다고 제안했답니다.

 

 

간호사 일은 너무 힘들어서 하려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한국인도 요새는 독일 와서 간호사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초과수요가 존재하는 직종에 한해서 외국인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가급적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게 선진국들의 일반적인 사정인 것 같습니다.(물론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유사 이래 외부 민족 또는 종족을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것은 커다란 이슈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하는 데는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은 나중에 세계 각국에서 박해를 받고 히틀러에 의해 대량학살을 당하기도 합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아예 원주민 인디언을 대량 학살하면서 커져간 경우입니다. 대신에 유럽인들을 대거 받아들였지만, 중국인에 대해선 철도노동자로 부려먹으면서도 대거 유입에는 철저하게 규제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부터는 흑인노예들을 대거 유입함으로써 오늘날 그 업보를 톡톡히 겪고 있습니다. 미국이 유럽과는 달리 사회보장제도가 낙후되어 있고 범죄율이 높은 데는 흑인 문제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이민족이 뒤섞이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보다 높은 이윤을 추구하면서 범세계적으로 움직이고 이에 따라 글로벌화가 급진전했습니다. 그에 따라 상대적 고임금을 찾아서 노동력도 자연히 세계적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자본과 달리 노동력은 살아 있는 인간의 소유물이라 노동력 이동과 더불어 인간이 같이 움직입니다. 그 인간은 노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생활-문화생활도 영위합니다. 그런 사회생활-문화생활이 기존 민족과 차이를 나타내면서 갈등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많은 나라들의 고민거리입니다.

 

 

대체로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진보파는 이민 유입에 찬성하고 보수파는 반대합니다. 독일에서도 NPD라는 극우파가 이민규제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최근 노르웨이 총선에선 이민규제를 내세운 극우파가 20%정도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원래 민족주의는 보수파의 이념이고 그래서 보수파가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만 한국과 같이 식민지 경험을 겪고 민족지상주의적인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경우엔 유럽과 사정이 다릅니다. 보수파 특히 극우적인 뉴라이트 같은 집단이 오히려 민족을 멀리 하고 대신에 국가라는 권력체를 강조하지요. (1945년의 민족해방보다 1948년의 建國을 강조하는 것도 이에 따른 것입니다.)

 

 

어쨌든 구미에선 이민을 규제하면서 불법이민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며칠 전 이탈리아의 Lampedusa 섬 앞에서 소말리아 등의 아프리카인들이 밀항하려고 탄 배가 전복되어 300명 이상이 사망한 것도 바로 이에 따른 비극의 한 예입니다. (사진의 빨간 색으로 표신된 곳이 Lampedusa 섬임.)

 

 

 

 

 

아프리카 등에서 이탈리아로 온 불법 이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독일로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베를린의 Oranienplatz엔 현재 이런 난민들의 천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아래 사진). 한국이 대한문 앞의 천막으로 골치를 앓는다면, 유럽에선 난민천막이 골칫거리이지요.

 

 

 

 

 

베를린에선 아예 이런 난민들을 위해 주거지를 마련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주거지 근처의 독일인들이 반발하고 나섰습니다(NIMBY 현상 또는 자기 일자리 지키기 차원). 반대로 시민운동가들은 난민주거지를 옹호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런 사례가 동베를린 쪽 Hellersdorf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해선 FU 정치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최서우씨의 글을 참고하십시오. 기사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99825&CMPT_CD=P0001

 

 

이민-난민의 문제는 무조건 수용하느냐 무조건 틀어막느냐의 2분법적인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피하기도 하고(노동력확보, 신부감확보 등), 문화적 다양성을 발전시키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다양성은 통일성과 모순관계에 있습니다. 몸이 이물질이 들어오면 거부반응을 일으키듯이 이민-난민은 사회적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이민-난민이 해당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하기보다는 파괴적인 기능을 수행할 때는 그렇습니다.

 

 

사회는 일정한 통일성이 존재해야 유지-발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에 생산적 다양성이 아니라 파괴적 다양성(‘콩가루 집안’)이 지배한다면 그 사회는 로마 전성기가 아니라 로마말기처럼 해체되겠지요. 물론 통일성이 지나치면 획일적인 사회가 되어 그 사회 역시 정체-퇴보합니다.

 

 

따라서 이민-난민의 적절한 조절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이민-난민의 비율이 극히 낮은 나라에 속합니다. 섬나라이기도 하고(한국도 북한이 가로막고 있어서 일종의 섬나라인 셈), 유럽처럼 오래 점령했던 식민지로부터의 유입도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조선족, 아시아인이라는 두 종류의 이민이 있습니다. (한국은 아직 난민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는 서구인은 논외로 함.) 그런데 주로 식당과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조선족은 말도 비슷하고 생활력도 강해서, 아직 한국사회에서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돈 벌러 나오는 바람에 조선족 가정은 많이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의 아시아인들은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인간 자체보다는 노동력이 왔다 가는 셈입니다. 한국인과 결혼한 아시아 여성들에게서는 이런저런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만, 유럽의 이민-난민 문제만큼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민 아닌 이민, 난민 아닌 난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탈북자들입니다. 이들은 조선족이나 아시아인들보다 훨씬 적응력이 낮습니다.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하는 비율도 낮고 불만을 느끼는 비율도 높습니다. 2만 5천 명 정도의 탈북자 중 10% 정도는 영국 등 다른 나라로 떠났고 100명 정도는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조선족이나 아시아인들과는 달리 탈북자에게는 나라로부터 정착금 등이 지원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만에 탈동자를 내보내던 서독과 달리, 탈북자를 국정원에서 6개월 동안이나 심문하고, 또 하나원에서 3달이나 교육시키면서 잡아두어 자활의지를 오히려 꺾어버린다(‘진을 빼버린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2만 5천명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북한정권이 무너지면 어찌될까요. 2만 5천명의 천배나 되는 2천5백만 북한인민이 남한사회에 이민 아닌 이민, 난민 아닌 난민으로 결합될 때 한국사회는 어찌될까요.

 

 

아마도 오늘날 유럽사회가 겪고 있는 이민-난민 문제와 차원이 다른 심각성을 띄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독일의 통일을 보면서 남북관계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곁들여 유럽의 이민-난민 문제도 같이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북한인민들은 동독인민과는 달리 아프리카 이민-난민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3일에는 독일통일 23주년 기념행사도 개최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주로 미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