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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통신 (7) :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를 넘어서

동숭동지킴이 2013. 10. 20. 20:28

 

 

베를린 통신 (7) :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를 넘어서

 

 

지난주부터 신학기(Wintersemester)가 시작되어 학교엔 학생들이 북적거리고 있습니다(독일에서는 겨울학기가 학년의 첫 학기임). 약 400개의 대학(Universität, Fachhochschule 전문대학, Kunsthochschule 예술대학 등)에 다니는 190만 명 정도의 대학생이 바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평소엔 거의 볼 수 없었던 불시(不時) 차표검사를 몇 차례 경험했습니다. 한국, 일본, 프랑스에서는 차표를 집어넣어야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타에 있을 때는 전철에 자유롭게 올라탔지만 거의 매번 검표원이 중간에서 차표를 검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반면에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전철은 자유롭게 승차할 수 있되, 아주 드물게 불시 차표검사를 통해 차표 미소지자에 대해선 벌금을 매깁니다.(한번 승차요금은 2~3유로 정도인데 벌금은 60유로임.) 이런 방식은 부정 승차자가 거의 없는 신뢰사회일 때 가능합니다.

 

 

이런 신뢰사회에서는 개찰구 시설이나 검표원을 많이 고용할 필요가 없으니 장비와 인력을 보다 생산적인 분야에 투입할 수 있습니다. 즉 신뢰사회에서는 승차와 같은 거래행위를 둘러싼 비용 즉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 절감되는 것입니다.

 

 

낙후된 사회일수록 거래비용이 많이 듭니다. 대기업에 납품하기 위해 룸살롱 접대를 한다든가, 정부공사를 따내기 위해 권력을 동원하는 것 같은 게 모두 사라져야 할 거래비용인 것이지요. 개성공단 중단과 재개 과정에서 보듯이 북한에서 사업하기도 여러가지로 힘이 많이 듭니다. 아울러 미국처럼 빈부격차가 심하고 구성원이 이질적이어도 거래비용이 많이 듭니다. ‘바람직한 선진사회’란 이런 거래비용이 적게 드는 사회입니다.

 

 

물론 독일이나 북유럽도 완벽한 신뢰사회는 아닙니다. 그러니 신학기에 차표단속을 강화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빈부격차가 커지고 다른 한편으로 이민이 늘어나고 그 이민들이 독일사회의 윤리에 동화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신뢰가 약화되고 차표단속과 같은 거래비용이 증대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차표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시 학교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독일의 대학수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한 독일어를 현장에서 공짜로 익히기 위해 두 과목 수업을 참관했습니다.

 

 

그런데 두 과목 모두 15분 정도가 지나서야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엄수(Pünktlichkeit)가 지켜지지 않는 걸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게 academic time이었습니다. 댓글 다신 분의 말로는 독일어 표현으로  akademisches Viertel(15분)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시간표에 <16:00 ~ 18:00> 으로 표시된 강좌는 실제 <16:15 ~ 17:45>의 90분 강좌라고 합니다.

 

독일의 수업방식은 한국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Vorlesung(강독), Übung(연습), Seminar가 한국보다는 훨씬 엄격하게 구분되고 있다고 합니다. Vorlesung은 강사가 거의 일방적으로 강의를 펼치는 것이고, Übung에서는 조교 등이 문제풀이를 하며, Seminar에서는 학생들이 발표를 하게 합니다.

 

 

Vorlesung 시간에 학생들이 주제를 분담해서 발표하도록 했더니, 일부 학생이 그건 rule에 어긋난다고 항의를 하기도 하는 일도 있답니다. Vorlesung 시간에는 출석만 하면 성적이 나오게 되어 있는데 왜 부담을 주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Vorlesung, Übung, Seminar의 구분도 잘 납득이 가지 않고, 발표시킨다고 항의하는 학생들의 태도도 이상했습니다. 한국의 대학생은 취업준비 때문에 학문을 도외시해서 문제인데 독일에선 학생들이 너무 헐렁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독일의 박사과정에는 미국과 달리 코스 강의가 없습니다. 그저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논문만 쓰면 됩니다. 말하자면 학생들을 방목(放牧)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다보니 박사학위 취득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특히 유학생의 경우).

 

 

미국대학에 비해 독일대학의 등록금이 무료인 점은 복지 면에서 좋은 일이지만(학생회비는 내야 함), 학부과정이나 석박사 과정이 너무 느슨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이런 게 엘리트교육이 미국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는 하나의 원인인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강의하고 있는 분은 Holmer Brochlos 박사입니다. 강의과목은 “Nordkorea von Innen (안에서 본 북한)”입니다. 북한의 어린이동화, 영화, 포스터 등을 통해 북한사회를 관찰하고자 하는 과목이지요.

 

    

 

 

 

 

그런데 Brochlos 박사는 동독시절 Humboldt 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했으며, 1978~80년 사이에 김일성대학에 유학하기도 했고, 1987~1988년에는 평양외국문출판사(김일성어록 같은 책을 외국어로 번역해서 보급하는 곳)에서 일하기도 했던 분입니다.

 

 

그가 공부할 당시, 김일성대학에서는 외국유학생들을 따로 관리해 북한학생들과의 접촉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밥도 따로 먹게 했고, 수업도 교수로부터 1대1로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다른 나라 외국인들과의 접촉도 못하게 했다고 하네요.

 

 

한편, 신학기가 되면서 신문을 보니 엘리트 대학(Elite-Universitäten)에 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근래 독일에서는 연구역량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11개의 대학을 선정해 매년 3억 유로 정도를 추가로 지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를린에선 FU(베를린 자유대학)와 HU(Humboldt)가 엘리트 대학으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파 일각에선 대학평준화나 서울대학 (학부)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입시경쟁의 폐해나 학벌사회를 타파하기 위한 극약처방으로 제시되고 있는 셈입니다. 일리가 없지는 않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실현가능하며 또 올바른 처방인지는 의문입니다. 과도한 입시경쟁이나 학벌사회가 지속되는 근본이유는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연고주의, 부당한 소득격차입니다. 이걸 바로잡지 않는 대학평준화는 일종의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학평준화 등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는 유럽의 사례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선 파리 1대학, 2대학 등등으로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프랑스에선 그랑제꼴(Grandes écoles)이라는 엘리트 양성기관이 따로 있고, 여기 들어가기 위한 입시경쟁은 치열합니다.

 

 

독일의 경우는 어떨까요. 독일에선 근래 1년 등록금이 수천만 원인 사립대학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건 기업 등에서 학생 등록금을 내주고, 학생 숫자가 몇백 명도 안 되는 특수대학이니 논외로 합시다.

 

 

독일은 법적으로 Gymnasium졸업증(Abitur)만 있으면, 학과 정원을 초과하지 않는 한 어느 대학, 어느 학과나 자유롭게 입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보다는 평준화대학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같은 엄격한 대학서열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엘리트대학이란 제도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건 주로 대학의 연구역량에 관한 것이지 학생의 수준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엘리트대학은 큰 대학이지만 작은 대학 중에도 좋은 대학이 꽤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기학과라는 게 존재합니다. 의학, 생물학, 법학, 경영학이 요즘의 인기학과입니다. 이런 학과에는 지원자의 4~10%만 입학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거기 입학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지요. 경우에 따라선 학과 입학시험이 별도로 치러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학 전체적 서열은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학과는 어디가 좋다든가 하는 서열은 존재합니다. 예컨대 경영학과는 Mannheim 대학이 유명하다든가, 연극학(Theaterwissenschaft)은 FU가 최고라든가 하는 식입니다. 따라서 독일도 완전한 대학평준화라고는 할 수 없는 셈입니다.

 

 

나아가 독일의 교육시스템 전반을 보면 평준화와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주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이 지나면 대학을 목표로 하는 Gymnasium과 기술자·기능인을 목표로 하는 Realschule, Hauptschule로 인생행로가 나눠집니다.

 

 

말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엘리트와 대중을 구분하는 셈입니다. 독일에선 대체로 담임선생이 1학년에서 4학년까지 바뀌지 않고 계속 학생을 관찰하기 때문에 학생의 능력에 대해 담임선생이 신뢰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그걸 존중해 줍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초등학교 4학년 끝나고 대학 갈 아이와 생활전선에 일찍 나갈 아이를 나누게 하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담임선생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고, 또 대졸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기술자·기능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화이트컬러와 블루컬러의 소득격차도 낮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예컨대 대학교수의 권한은 크지만 월급은 절대액수로 따지더라도 한국보다 낮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4학년 말에 장래를 결정하더라도, 큰 사회적 불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만 직업학교에 가더라도 나중에 대학을 갈 수 있는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는 않고, 틈새를 만들어 놓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엘리트-대중의 구분에 대해 좌파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SPD가 집권한 주에선 Gymnasium과 Realschule를 합친 Gesamtschule(종합학교)를 보급하기도 합니다. 또 독일의 한국 학부모는 자식을 Realschule나 Hauptschule로 보내라는 담임선생님들의 권고에 극력 저항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핀란드나 덴마크에선 독일식으로 일찍 엘리트와 대중을 판가름하지는 않고, 한국처럼 중학교를 마친 이후에 인문계와 실업계를 구분합니다. 일본이나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방식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독일식 교육제도는 숙련기술자 양성과 hidden champion 육성에 도움이 되기는 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엘리트가 강한 나라, 독일은 중간층(Mittelstand)이 강한 나라라는 평판도 여기서 기인한 것이지요.

 

 

또 독일에선 한국과 달리 돈이 없어도 예술 교육을 시킬 수 있습니다. 꼭 돈이 있어야 엘리트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아래 사진에 등장한 바이올리니스트 15세 여학생 박동명 양은 한국학과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김은희박사의 따님입니다.(김은희 박사는 오른쪽 사진에서 박양과 닮은 분입니다.)

 

 

10세 때 영재로 선발되어 학생회비만 내고 베를린국립음대(UdK)에 다니고 있고 동시에 Gymnasium 공부도 같이 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재로 산발되지 않아도 월 60유로만 내고 교수의 개인교습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교수로부터 받는 개인교습비가 엄청난 한국과는 다르지요. (다만 최근 한국학생이 몰린 Köln 음대에서는 한국학생들이 경쟁적으로 몰래 교수들의 개인교습비를 올리고 있다는 풍문도 있기는 합니다.)

 

 

어쨌든 어느 사회나 엘리트와 대중의 구분은 존재하고 양자에 대한 교육방식은 다릅니다. 만약에 한국의 평준화론자들이 이런 구분 자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관념적 기계적 평등론입니다.

 

 

인간에게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예술적 능력이나 스포츠 능력에서 그게 가장 두드러지지만, 학문적 능력이나 사회지도적 능력에서도 그런 차이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타고난 신체적 정신적 능력(DNA)에는 차이가 있고, 커온 환경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1명의 천재가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는데, 그 말에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어려운 수학문제의 해답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거꾸로 히틀러처럼 1명의 잘못된 엘리트가 수백만 명 수천만 명을 몰살시키기도 하지요.

 

 

요컨대 어느 사회든 엘리트와 대중의 구분은 불가피합니다. 문제는 ‘엘리트주의’입니다. ‘00주의’는 00를 절대시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북한의 민족주의나 그 정반대로 뉴 라이트의 국가주의가 바로 그런 오류입니다.

 

 

엘리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트를 과거 귀족처럼 고정불변의 존재로 인정하고, 엘리트가 대중을 멋대로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게 엘리트주의입니다. ‘지도’를 ‘지배’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민주주의란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엘리트가 될 수 있고, 엘리트 사이의 자유경쟁을 보장하고, 엘리트를 대중이 일정하게 견제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식으로 엘리트가 엘리트주의로 변질하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해온 게 인류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나 로마시대의 공화정 이래 갖가지 민주주의 장치를 고안해 온 것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리고 독일에서 보듯이 엘리트(정계, 기업계, 학계)와 대중의 소득격차가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엘리트주의를 피하는 길입니다. 엘리트가 타고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일반대중보다 엄청나게 높은 소득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선천적 능력은 우연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후천적 노력에 의해 남보다 뛰어나게 되었다 하더라도, 사실 그렇게 노력하는 체질 자체가 이미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J. Rawls가 <정의론>에서 말했듯이, 엘리트와 대중의 생활격차는, 엘리트가 사회전체를 발전시키는(최하층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동인(motive)으로 그 격차가 작용할 수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어느 만큼의 격차가 존재해야 엘리트가 사회발전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는 똑 떨어지는 정답이 없습니다. 아마도 사회문화가 중요한 작용을 할 것입니다. 미국이 유럽보다 소득격차가 큰 요인에는 바로 이런 사회문화적 요인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엘리트주의 아닌 엘리트육성은 필요합니다. 이를 무시하는 게 ‘대중주의’입니다. 엘리트와 대중의 부당한 차별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엘리트와 대중의 구분 자체를 부정하는 게 대중주의입니다. 엘리트주의의 정반대 편향이 대중주의이지요.

 

 

그 극단적인 사례가 폴 포트 치하의 크메르 루주입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하면서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을 농촌으로 추방하고 살해하고 했던 것이지요. 모택동의 문화혁명도 이런 대중주의 경향이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런 대중주의라는 극단적 경향은 정반대의 엘리트주의로 쉽게 변질합니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지요. 제가 지난번에 말한 대로 김문수 지사가 “민중을 믿는다”는 극단적인 대중주의에 빠졌다가 이승만을 숭배하는 엘리트주의로 빠진 게 그런 예입니다. 인민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결국 인민의 주체성을 말살하고 수령의 주체성만 강조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트와 대중을 구분하되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선 일종의 변증법적 사고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엘리트와 대중을 구분하되 그들 사이의 상호의존, 상호투쟁, 상호침투를 인정해야 합니다.

 

 

교육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핀란드에선 우수 학생과 일반학생을 각각 다른 반으로 편성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에 우수 학생이 협동학습을 통해 일반학생의 수업을 돕도록 하고, 또한 부진학생에 대해선 별도로 보충지도를 합니다. 독일은 아예 초등학교 5학년부터 우수학생과 부진학생을 다른 학교로 나누어버립니다.

 

 

핀란드와 독일이 이렇게 많이 다르지만 둘 다 일종의 수준별 학습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국에선 어떤 수준별 학습이 바람직할까요. 이기정 교사가 이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 놓았습니다.

 

 

저는 독일이나 핀란드의 차이에서 보듯이, 우수학생(엘리트)과 일반학생(대중)을 구분하는 방식이 그 사회의 발전에 그리 결정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사가 얼마나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의 학습이 사회와 인격의 발전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인가 어떤가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엘리트와 대중의 문제에서 대학입시 방식이 그리 결정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엘리트가 noblesse oblige를 갖게 하고, 엘리트의 지도가 지배로 변질되지 않게 하고,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부당한 격차가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GH의 인사에서 보듯이 한국의 엘리트에게는 noblesse oblige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또한 엘리트라는 지위를 통해 대중을 억압하고 수탈합니다. 게다가 공기업이나 거대기업 노조에서 보듯이 일반대중이면서도 노동귀족이라는 엘리트 지위를 향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갈등이 많고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 만연해 있는 것이지요.

 

 

독일의 교육을 보면서 이리저리 느낀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저는 독일유학 경험이 없습니다. 독일유학 경험을 가진 분들이 보기에 틀린 부분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부분이 있으면 지적 바랍니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되면서 저도 조금 바빠질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글의 분량은 좀 짧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