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4) : 묘수풀이와 타협의 정치

동숭동지킴이 2013. 9. 29. 22:34

 

베를린 통신 (4) : 묘수풀이와 타협의 정치

 

 

독일의 연방의회(Bundestag, 아래 사진) 총선이 ‘일단’ 끝났습니다. 제가 ‘일단’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만약 정부 구성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재선거(Neuwahlen)를 실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언론들이 Merkel의 압승이라고 보도했는데, 정부 구성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게 이상하지요.

 

                   

(Bundestag의 바깥모습. 유명한 Brandenburg 문 근처)                             (Bundestag의 회의장 내부모습)

 

 

 

하지만 바로 그 점에 이번 선거 결과의 양면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언론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는 그 점을 중심으로 이번 선거결과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물론 제 독창적인 생각이라기보다 독일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인 CDU/CSU(기민련)는 지난 선거에 비해 8%포인트 가량 득표율이 상승한 41.5%를 획득했습니다.(CSU는 바이에른 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정당입니다. CDU는 바이에른 주에선 후보를 내지 않습니다. 이하 CDU/CSU는 편의상 그냥 CDU로 표시.)

 

 

그 점에서 여당은 압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승리에는 Merkel 총리 개인의 인기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정당별 정확한 득표율은 CDU 41.5%, SPD 25.7%, Linke 8.6%, Grüne(녹색당) 8.4%, AfD 4.7%, Piraten(해적당) 2.2%, NPD 1.3%입니다.)

 

 

CDU 투표자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정책과 관계없이 오직 Merkel 개인에 대한 지지 때문에 CDU를 찍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40% 가량 되는 형편이니까요. Merkel이 이렇게 인기가 높은 이유는 중앙대 김누리 교수가 쓴 어제 한겨레 기사를 참고하십시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04899.html

 

 

김누리 교수의 글에 한 가지만 보태겠습니다. 메르켈과 영국의 대처(Thatcher)를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같은 보수파 여성총리이지만 두 총리는 성격이 판이합니다. 대처는 고집불통이라 자기 보수당 내 인사들의 의견마저 무시해 결국 물러났습니다. 또 당시 영국노조의 문제점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걸 과도하게 추진하는 시장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반면에 메르켈은 녹색당의 원전반대 정책마저 수용할 정도로 포용력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2005~2009년 사이엔 SPD(사민당)와 연립정부를 꾸리기도 했지요. 개인적인 인상을 보면 강단도 있지만 동시에 부드러운 어머니(Mutti라는 애칭도 있음) 모습이 드러납니다. 다만 뚜렷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선거기간 중 Konzeptlosigkeit(개념 없음)라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요.

 

 

우리의 보수파 여성대통령 GH는 어떤가요. 이때까지 국정을 꾸려온 걸로 보면, 대처와 같은 비전을 갖고 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시중에 퍼진 3대 수수께끼 중의 하나가 GH의 창조경제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지요(나머진 안철수의 ‘새 정치’와 김정은의 속마음).

 

 

아울러 메르켈과 같은 포용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야당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편이었던 인물도 냉혹하게 내치는 행태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최대석 교수가 인수위에서 쫓겨날 때를 보십시오. 그러니 GH 앞에서 싫은 소리 할 사람이 없지요. 이건 박정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다만 GH는 권력의 속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정책의 내용은 없지만 정치 테크닉은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다 과거 박정희를 보좌하던 (비전은 없지만 머리는 좋은) 인물들을 옆에 거느리고 있지요. 또 수구적 보수언론도 받쳐주지요. 그러니 나름대로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나라를 끌고 가고는 있는데, 이리해서 나라가 어디로 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다시 독일 선거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CDU는 압승을 했지만 그들의 연정동반자인 FDP는 몰락했습니다. 지난 선거에 비해 10%포인트나 지지율이 하락해 4.8%밖에 득표하지 못했습니다. 독일에선 5%를 획득하지 못한 정당에게는 의석이 배분되지 않고, 따라서 FDP는 국회에서 쫒겨난 것입니다.

 

 

그리해서 총의석 630석 중에서 CDU가 311석밖에 얻지 못해 과반에 미달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야권인 SPD, Linke(좌파당), 녹색당은 합쳐서 319석을 획득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보수파는 이번 선거에서 사실상 패배한 셈입니다. 즉 메르켈은 승리했으나, 보수파는 패배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른 보수파(우파)인 FDP, AfD(Altenative für Deutschland, 유로 탈퇴를 외치는 정당), NPD 득표를 CDU 표에 합치면 진보파(좌파)의 득표와 거의 비슷합니다. 따라서 득표숫자로 볼 때는 꼭 보수파의 패배라고 할 수 없지만(50%를 약간 넘어섬), 의석수에선 분명히 패배입니다. 미국의 고어가 부시에게 득표에서 이기고도 선거에서 진 것과 마찬가지지요.

 

 

독일의 국회의원은 우리와 비슷하게 지역구의원과 비례대표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의석배분방식이 우리와 좀 달라서, 보수파가 득표에 이기고도 의석에서 지는 결과가 된 셈입니다. 그리고 원래 국회의석은 598석이지만 실제의석은 630석이 되었는데, 이 의석배분방식은 이 글 밑 부분에 참고삼아 정리해 두었습니다.

 

 

FDP는 CDU보다 더 보수적인 정당이라, 만약에 FDP가 조금이라도 의석을 확보했더라면 지금처럼 쉽게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FDP나 AfD 모두 의석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에 앞으로 정부구성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종의 묘수풀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CDU 혼자서 소수파 정부를 꾸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선 사안 사안마다 야권(전부 또는 일부)의 동의를 구한다. 이런 방안에 대해선 정부운영의 불안정성 때문에 Merkel이 선거 이후 곧바로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②CDU와 SPD가 대(大)연정을 꾸린다. 대연정은 제1당과 제2당이 연립정부를 꾸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방안에 대해선 조금 후에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③CDU와 녹색당이 소(小)연정을 꾸린다.

 

④SPD-Linke-녹색당이 좌파 연정을 꾸린다. 이에 대해서도 조금 후에.

 

⑤재선거를 실시한다. 총리선출에서 과반을 획득한 후보가 없을 때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재선거가 실시된다.

 

 

복잡하지요. CDU와 Linke의 연정은 아예 고려대상에서 제외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경우의 수’가 많은 것입니다.

 

 

CDU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SPD와의 연정입니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국회인 Bundesrat(아래 사진이 그 건물임)에서는 SPD가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더 복잡해지지요.

 

            

                 (Bundesrat의 외부 모습)                                                 (Bundesrat의 내부 회의장 모습)

 

 

 

이번 선거는 Bundestag(일본의 衆議院, 미국의 하원과 다소 비슷한 조직)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독일에는 일본의 참의원이나 미국의 상원과 비슷한 Bundesrat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내각을 이끄는 총리는 Bundestag에서 선출하지만, 법안통과를 위해선 Bundesrat의 동의가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Bundesrat는 16개의 주(州, Land)에서 보내는 대표로 구성되는 조직입니다. 여기서는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선출에 관여하고, 특히 주의 재정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선 Bundesrat의 동의 없이는 법안이 발효될 수 없습니다. 근자에 다루어진 법안 중 절반가량이 그런 법안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지방분권이 강했던 데다 히틀러 독재의 폐해를 경험하고 나서 독일은 권력 집중에 대해 많은 견제장치를 둔 것입니다. 각 주의 권한도 상당히 커서, 교육과 경찰에 관해선 주가 자치적으로 결정합니다. 대학등록금이 무상이냐 어떠냐 하는 것도 한 때 주마다 달랐습니다. (이제는 거의 모두 무상등록금으로 회귀했습니다.)

 

 

또 나라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유럽의 왕과 비슷하되 그보다는 권한이 약간 강한 대통령도 두고 있습니다. 묘하게도 현재 독일에선 총리와 대통령이 모두 동독 출신입니다. 동독인에 대한 차별 문제가 아직도 독일에서 골칫거리이긴 합니다. 그래도 상당 정도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지요.

 

 

한반도가 통일 되어 이런 식으로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라도) 나라 지도부를 북한출신이 장악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보면 독일은 우리에 비하면 상당히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CDU는 선거에서 압승했다고 하지만, SPD의 동의 없이는 별로 할 게 없어지는 셈입니다. 실제 근래 CDU-FDP 연정의 성과가 그랬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SPD가 하자는 대로 다 해줄 수는 없으니 메르켈도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그러면 SPD는 어떤가요. 어느 신문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Eine große Koalition wäre selbstmörderisch, glauben viele Sozialdemokraten, Neuwahlen aber auch. Die SPD steckt in einem Dilemma: Wenn die Grünen mit der CDU koalieren, kommt ihr der strategische Partner abhanden. ("대연정은 자살행위이고 재선거 역시 그렇다고 많은 사회민주당원들은 생각한다. SPD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만약에 녹색당이 CDU와 연정을 꾸리면 SPD는 전략적 파트너를 잃는 셈이 된다.”)

 

 

SPD는 이미 2005~2009년 사이에 CDU와의 연정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SPD는 2009년 선거에서 대패했습니다. 연정을 하다 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했던 탓이겠지요. FDP가 이번에 대패한 것에도 CDU와의 연정에 따른 독자적 정체성 상실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연정은 소수파에겐 독약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인구가 가장 많은 NRW 주의 당원을 비롯해 많은 사민당원들이 CDU와의 연정에 반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재선거를 실시하게 되면 정부구성 실패의 책임을 옴팍 뒤집어쓸까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FDP가 되살아날 위험성도 있습니다. 다수 국민이 대연정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도 고려해야 합니다.

 

 

녹색당의 입장은 어떨까요. 선거 당시 녹색당 지도부는 CDU와의 연정에 대단히 부정적이었습니다. CDU도 그런 녹색당과의 연정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표출한 바 있습니다. 다만 선거에 패배하고 나서(지난 선거에 비해 지지율이 10.7%에서 8.4%로 하락했고, 제3당의 지위를 Linke에게 내줌), 선거 때 지도부가 총사퇴했기 때문에 연정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커졌습니다. TV를 얼핏 보니 녹색당 지도부는 연정의 핵심은 어떤 정책 내용(Inhalte)에 합의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하는군요.

 

 

이번 선거에서 Linke는 지고도 이겼다고 합니다. 지지율은 지난 선거에 비해 11.9%에서 8.6%로 하락했습니다. 그런 점에선 패배한 선거입니다. 하지만 지난 선거 이후 벌어진 당내 권력투쟁의 악영향을 고려하면 이 정도도 선전한 것이고, 처음으로 제3당의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그 점에선 이긴 선거이지요.

 

 

그런 기세 덕분인지 Linke는 정치권이 모두 연정 논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최저임금제에 관한 선제적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아직 정부가 구성되지 않았지만 국회에서 최저임금제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이번 선거에서 SPD와 녹색당은 시간당 8.5 유로, Linke는 10유로를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따라서 좌파는 모두 최저임금제의 도입을 요구했으니 이참에 그 법안을 통과시키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 수준에 대해선 SPD, 녹색당, Linke 사이에서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약간 놀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독일엔 아직까지 최저임금제가 없었습니다. 그런 제도가 없이도 저임금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고 이렇게 되는 게 가장 좋은 상태이지요.

 

 

그런데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HARTZ IV 개혁 이후 한편으로 경제는 활성화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저임금 노동자층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최저임금제의 법제화가 사회적 이슈가 된 것입니다.

 

 

어느 TV 프로에서 보니 한 독일 기업가가 이렇게 최저임금제 법제화가 논의될 만큼 노동현실이 악화된 게 부끄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기업가는 미국의 Donald Trump 같은 투기꾼이 아닌 성실한 기업가 상을 주창하더군요.)

 

 

어쨌든 이렇게 최저임금제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CDU도 그걸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일률적으로 정하지 말고 지역과 업종에 따라 다르게 하자는 방침입니다. 이게 연정 과정에서도 큰 쟁점의 하나가 되겠지요.

 

 

독일의 유명 경제연구소 중의 하나인 DIW(das Deutsche Institut für Wirtschaftsforschung, 독일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시간 당 8.5 유로 이하를 받는 노동자는 전체의 17%이고 10유로 이하를 받는 노동자는 26%라고 합니다.

 

 

한국의 최저임금(2013년)이 시간당 4,860원인데, 8.5유로면 12,300원이고 10유로면 14,500원 정도입니다. 독일의 명목 1인당 GDP 39,000달러로 계산하더라도 8.5유로면 한국의 최저임금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괜찮은 수준입니다(한국의 명목 1인당 GDP는 25,000 달러임).

 

 

게다가 독일에선 교육이 무상이고, 농산물 등 식품 가격이 한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쌉니다. 어제 장을 보았는데 30유로(4만 5천원) 정도 사니 장바구니가 가득했습니다. 아이가 있을 때는 아이 1명 당 183유로의 보조금이 나온다고 하네요.(아이를 가진 유학생에게 들은 이야기임. 셋째 아이부터는 보조금할증이 붙음. 다만 원칙적으로 유학생 자녀는 대상이 아님.) 이처럼 저소득 계층도 그런 대로 살 만한 나라가 바람직한 선진국인 것이지요.

 

 

다만 야권의 요구대로 최저임금제가 당장 실시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최저임금제의 실시에 따라 압박을 받는 영세기업 문제가 존재하니, 7유로부터 시행하면서 그 영향을 보자는 게 앞의 연구소 주장인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Linke는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이 Linke와 좌파 대연정을 실시하는 것은 현재로선 실현가능성이 가장 낮아 보입니다. 원래 형제간에 사이가 나빠지면 남남보다 못하다고 하듯이, 같은 좌파 내의 갈등이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NATO탈퇴 같은 Linke의 요구를 SPD가 수용하기 힘들지요.

 

 

한국에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을 싸잡아 종북좌파라고 비난하듯이, 여기 독일에서도 Linke와 SPD, 녹색당이 연정을 하면 동독정권이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Linke는 동독의 집권당이었던 SED가 변신한 조직을 중심으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SPD 총리후보이기도 했던 Lafontaine을 비롯한 SPD좌파가 합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실제 선거과정에서 그런 위험성을 우파쪽에선 계속 선거전략으로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좌파 연정의 가능성이 0%는 아닙니다. 현재 베를린을 둘러싼 Brandenburg 주에서는 SPD와 Linke 사이의 연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CDU와의 연정이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Linke가 일정한 유연성을 보이면,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좌파연정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실제 지금 SPD 의원 중에서 좌파 연정을 주장하는 인물들도 있는 형편입니다.

 

 

어쨌든 한국처럼 투표가 끝나면 그걸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 (비록 부정선거 논란은 남더라도), 독일에선 지루한 줄다리기가 이어집니다. 1963년 슈미트 정부의 연정 성립에는 73일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독일은 ‘참을성’을 요구하는 나라이지요.

 

 

다만 일단 이렇게 어렵게 연정이 성립되면 그 연정은 상당히 안정적인 것 같습니다. 이태리에서는 어제 베를루스코니 진영의 중도우파가 연정에서  탈퇴할 뻔 했는데, 독일에선 그런 일은 잘 없습니다. “더디되 확실하게 한다”는 게 독일식일까요.

(추가: 10월 2일. 베를루스코니 측 정당인 PdL쪽에서 연정에 참가했던 장관들이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연정이 깨질 뻔했습니다만, PdL의 대표가 베를루스코니와 의견을 달리 하면서 극적으로 연정은 유지되었습니다. 10월 2일에 실시된 현 총리 Letta에 대한 불신임투표가 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연정성립 과정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역시 SPD인 것 같습니다. 복잡한 정치적 계산과 CDU와의 협상을 거치겠지요. 그러면서 여론의 추이도 보겠지요. 예컨대 엊그제 여론조사에 따르면, 만약 당장 재선거를 실시하더라도 SPD의 타격은 별로 없는 걸로 나오고 FDP는 더 몰락하는 걸로 나옵니다. 독일의 선거결과는 한국과 달리 여론조사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SPD와 CDU 사이의 정책적 차이는 위에서 말씀드린 최저임금제 문제 이외에 의료보험(CDU는 민영보험 확대, SPD는 공공보험으로 통합), 소득세 최고세율(CDU는 인상반대, SPD는 인상요구) 따위가 있습니다. 이런 사안들에서 서로 타협을 하면서 여론의 추이를 보겠지요.

 

 

엊그제 SPD의 대의원대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내린 결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CDU와의 탐색대화(Sondierungsgespräch, 정식협상의 전단계)에는 SPD가 응한다. 그 탐색대화의 결과에 따라 연정협상에 응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연정의 동의여부는 당원들이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딜레마를 타개하려는 SPD의 ‘묘수풀이’의 하나로 보입니다.

 

 

제가 독일정치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그냥 추측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어제 내린 결정을 보건대 CDU와 SPD의 대연정이 성립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연정에 대한 당원들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연정에 대한 국민들의 현재 지지는 70% 정도이지만 당원들의 지지는 그와 다릅니다. 게다가 SPD는 30% 가까운 지지만 계속해서 유지하면 일단은 낭패를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CDU가 정책에서 대폭 양보를 하지 않는 한, 대연정의 성사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그러면 녹색당과의 소연정이나 재선거로 갈 공산이 크지요.

 

 

Linke와의 좌파연정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이게 우선순위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일단은 신기로웠습니다. 권력을 잡는 게 최우선인 정치집단들이 총리자리를 바로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뒤로 미루는 게 특이했던 것입니다.

 

 

뉴라이트가 숭배하는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까지 감행하고, 박정희 후보는 선거에서 지면 윤보선 후보를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하는 주장까지 있고, 국정원 선거 불법개입에도 GH가 아무런 미안함을 표시하지 않는 한국과 독일은 너무 다른 것이지요.

 

 

아무리 좌파 전체가 의석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곧장 총리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건전한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정치’인 것이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건전한 ‘묘수풀이’와 ‘타협’의 정치가 독일에서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독일의 정부 구성에는 한참 시간이 걸릴 테니 참을성 있게 두고 보기로 하지요.

 

 

이상 독일의 연정 문제를 논한 김에 한국의 연정 문제에 대해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일찍이 저는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에서 노무현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대해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는 야권이 ‘거국통합내각’을 적극적으로 들고 나올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아래 링크한 두 글을 참고하십시오.

www.blog.daum.net/kkkwkim/195

www.blog.daum.net/kkkwkim/200

 

 

대연정이나 거국통합내각이나 “강냉이냐 옥수수냐”인데, 무슨 모순된 주장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정세적 판단을 할 줄 모르는 경직적 사고입니다.

 

 

노무현의 대연정은 정치술수의 성격이 농후하고 실현가능성도 희박한 제안이었습니다. 반면에 합리적 보수와 타협하려는 담대한 구상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으려는 거국통합내각은 대연정과 겉은 비슷해도 속이 크게 다른 것이었지요.

 

 

제가 대선캠프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선거핵심과 만난 자리에서 제 생각을 이야기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무현 시대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증법적 사고를 할 줄 모르는 경직적 사고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사실 지난 대선에선 시대정신이 타협과 통합의 정치였는데, 그것을 내세우기에 가장 적절했던 후보는 안철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엉뚱하게 의원숫자 축소와 같은 ‘정치죽이기’에 집착했습니다. 또 문재인 후보는 담대함이 결여되어 그저 조심조심 주눅들린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 가지고 어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한국 대선에서 왜 거국통합내각 공약이 필요했는지는 저의 위의 글들에서 밝혀놓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면 당시 새누리당에선 이 공약의 폭발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재인 진영에서 거국통합내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바로 그 다음날 ‘여야 원로회의(?)’ 비슷한 걸 제시해서 물타기에 나섰습니다.

 

 

GH의 그 공약이 순전한 물타기라는 것은 선거 끝난 이후엔 GH나 새누리당 쪽에서 그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선거공약의 폭발성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문재인 진영은 자신이 내건 공약이 어느 정도 폭발적인지도 몰랐던 것이지요. 그저 과거 노무현 정권 당시 대연정 제안으로 인한 쓰라린 기억으로 인해 주눅든 몸짓만 보인 것입니다. 그런 내공(Force)으로 어찌 보수수구세력의 강고한 저항을 뚫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선거에서 당선되었더라도 통치과정에서 갈팡질팡했을 게 뻔합니다.

 

 

앞으로의 선거에서 거국통합내각이 다시 주요한 전략구호로 등장할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선진국으로 가려면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정치문화에서는 벗어나야 하고, 그와 관련해 독일의 정치문화에서 배울 부분은 있을 것입니다. 물론 73일씩이나 걸리는 정부구성의 비효율성이라는 독일식 정치의 단점을 이리저리 시급한 과제가 많은 한국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따져봐야 하겠지요.

 

 

한국의 장래 지도자 특히 진보개혁진영의 지도자로 성장하려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독일과 같은 타협과 통합의 정치를 배워야 하지만, 동시에 그런 타협과 통합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도 담대한 내공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개혁에 반대하는 수구파와는 적당한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타협이 가능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예컨대 독일의 NPD나 한국의 주체사상파와 정치권력에서의 타협은 불가능하지요. 이게 진보-보수의 X축과 개혁-수구의 Y축이 다른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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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독일의 선거제도에 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런 데 특별히 관심 있는 분만 참고하십시오.

 

독일의 연방의회(Bundestag)는 원래 598명의 의원으로 구성됩니다. 그 중 절반인 299명은 지역구(Wahlkreis)에서 뽑습니다. 다른 299명은 정당투표(비례대표)로 뽑습니다.

 

 

이번 선거를 보면 지역구에서는 베를린의 일부 지역구(녹색당 1명, Linke 여러 명)를 제외하면 모두 CDU나 SPD 의원이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역구 선거를 위해 억지로 선거연합을 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알아서 정리를 해주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정당투표 의석배분 방식이 좀 복잡합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1단계로 598 의석을 16개 주에 인구 비례로 배분합니다. 그리고 정당투표의 5% 미만을 획득한 정당은 의석배분에서 제외하되, 지역구에서 당선된 후보는 의원으로 선출됩니다. 아울러 지역구에서 3석 이상을 획득한 정당은 5% 조항이 적용되지 않고 비례배분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②각 주에서는 각 정당이 정당투표에서 획득한 투표비율에 의거해 의석수를 배분합니다(한국식으로 비례대표 숫자만이 아니라 주별 전체의원 숫자를 배분함). 그리고 한국과 달리 전국 차원의 비례대표 리스트가 있는 게 아니라 주별로 리스트가 마련되는 모양입니다.

 

③각 정당이 확보한 주별 전체의석수에서 지역구 확보 의석수를 차감하고, 그 나머지를 비례대표 의석수로 정합니다. 만약에 어떤 주에서 정당투표에 다른 주별 전체의석수보다 많은 의석을 지역구에서 확보한 경우에는 그 지역구 의석은 보장됩니다. 이걸 Überhangsmandate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정원 598명보다 많은 숫자의 의원(이번엔 630명)이 생겨나게 됩니다.

 

④ Überhangsmandate에 의한 왜곡을 바로잡고 정당별 투표에 따른 의원수 비례를 유지하기 위해 연방 차원에서 다시 비례대표 숫자를 조정해서 각 주에 배분합니다. 그리해서 각 정당별 의원 숫자는 정당투표에 따른 비례를 지키게 됩니다.

 

예컨대 A당이 200석과 Überhangsmandate에 의해 20석을 얻고, B당이 100석을 얻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A당과 B당의 정당투표 비례는 2대1이고, 이를 지키려면 전체의원을 10석 더 늘려 B당에 10석을 더 배분해, A와 B당의 의원 비례가 220대 110 즉 2대1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뭔가 대단히 복잡하지요. 아마도 그 근본정신은 정당투표와 지역구 투표를 적절하게 조합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서 이런 제도를 그대로 모방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례대표 숫자를 50명 정도 늘려서 지역구 민원을 해결하는 일보다 나라 전체 일에 관심을 더 갖는 의원의 비중을 높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오늘 통신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