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1) : 독일 대학식당과 이석기 사태

동숭동지킴이 2013. 9. 8. 22:28

 

베를린 통신 (1) : 독일 대학식당과 이석기 사태

 

 

국정원 선거개입과 이석기 사태로 시끌벅적한 한반도를 뒤로 하고 9월 3일 암스테르담을 거쳐 베를린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내리기 전 하늘에서 내려다본 베를린은 많은 부분이 새까맸습니다.

 

늦은 밤인 탓도 있었겠지만, 녹지가 절반이나 되는 도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참고로 서울은 베를린보다 산이 훨씬 많은데도 녹지비율이 1/3도 안된다고 합니다.)

 

 

베를린공항(Tegel 공항)은 인천공항이나 프랑크푸르트 공항과 달리 조그만 공항이고, 수하물 찾는 곳에서 몇 미터 안 되는 곳이 바로 출구였습니다. 새로운 큰 베를린 국제공항의 open이 계속 연기되어 아직까지는 작은 Tegel 공항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금년 10월부터는 인천에서 곧바로 베를린 새 국제공항으로 날아올 수 있다고 합니다만.)

 

 

새 공항건물은 이미 완공되었는데 안전문제 때문에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국은 압축적 고도성장 사회인 탓에 “빨리 빨리” 문화입니다만, 독일에선 대체로 모든 게 늦습니다. 명함제작에 6주나 걸린다고 하니까요. “인내의 문화”라고나 할까요.

 

 

베를린 자유대학(이하 FU)의 이은정 교수와 그 남편인 Werner Kamppeter 교수가 공항까지 데리러 나와 주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는데도 늦은 밤에 굳이 마중 나오니, 황송하기도 하고 뭘 많이 시키려고 이러시는 것일까 약간 겁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차로 제 숙소에 도착하니 윤건수 박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윤박사는 대학원 시절 제 선임조교로 친한 사이인데, 몇 달 전부터 FU의 한국학 연구소(Institut für Koreastudien : IKS)에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프로젝트의 전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윤선배는 저희가 당장 ‘고난의 행군’을 하는 일이 없도록 쌀과 김치까지 준비해 오시는 수고까지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마음이 불편해 외국 나오는 게 싫었는데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윤선배가 코치를 하시고, 이교수 부부가 많은 배려를 해주고, IKS의 학생조교인 김영수군이 이것저것 챙겨준 덕분에 며칠 지나지 않아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좀 있다가 같은 기숙사에 거주하는 단국대 정창화 교수를 알게 되어 그 친절한 부부로부터도 많은 유익한 생활정보를 제공받았습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많은 정보를 인터넷 등 공유공간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 특수적인 정보, 예컨대 어떤 물건을 어디 가면 싸게 살 수 있는가와 같은 정보는 지역밀착적인 인간관계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셈이지요.

 

 

도착한 다음날부터 학교에서 배정받은 연구실에 나갔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이것저것 익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구실은 4명이 한 방을 사용하는데, 방학인데다 집에서 연구를 하시는지 나와 있는 연구원들은 일부였습니다.

 

서울대 윤영관교수와 성공회대 김창남교수는 얼마 전에 한국으로 돌아갔고, 3개의 연구실에 와 있는 분들 중 김두관 전 지사와만 마주쳤습니다. 손학규 전 대표의 자리는 저와 마주보는 쪽인데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김황식 전 총리는 좀 떨어진 별도의 연구실에 있어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며칠 사이에 몇 가지 보고 들은 게 있습니다만, 오늘은 학교 식당(Mensa)과 관련된 이야기만 전하겠습니다. 식당에선 아래 사진과 같이 그날의 메뉴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음식에 대해 세 종류의 가격이 존재합니다. 사진 맨 오른쪽을 보십시오.

 

 

 

 

그 중 왼쪽의 제일 싼 가격은 학생가격이고, 그 다음은 교직원 가격이며, 제일 비싼 것은 외부인사 대상입니다.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2배 가까이 차이 나기도 하지요. 교통요금에서 학생과 일반인을 구별하는 경우는 있지만, 식당에서까지 그런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한국은 물론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교통요금에서의 학생 배려도 독일이 미국이나 일본보다 더 앞서 있습니다.)

 

 

사실 나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게 먹는 일이므로 독일식이 보다 더 진보적(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이러다보니 교직원이나 외부인들이 학생인 체 하는 경우가 있고 이는 경영수지를 악화시키므로 학생들은 계산할 때 학생증을 제시하게끔 되었다고 합니다.

 

 

사회가 잘 돌아가려면 진보와 보수의 균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데 무게를 두다보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덕적 해이란 실업보험의 보장성이 너무 높으면 실업자가 취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위험성 같은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하지요. 그래서 때로는 진보쪽으로 기울다가 때로는 보수쪽으로 기웁니다. 좌파(진보파)가 집권했다가 보수파(우파)가 집권하기도 하는 것이 이런 조정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학생인 체 하는 것은 일종의 속임수(cheating)입니다. 이런 속임수를 바로잡는 것은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개혁↔수구’의 문제입니다.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이란 시장과 국가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개혁↔수구란 시장과 국가의 質의 문제입니다. 반면에 진보↔보수란 사회적 약자를 더 중시하느냐 사회적 강자를 더 중시하느냐의 문제이고, 결국 이는 시장과 국가 중 어느쪽에 경제활동을 더 맡기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즉 시장과 국가의 量의 문제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듯이 진보↔보수를 X축이라고 한다면 개혁↔수구는 Y축인 셈입니다.

 

 

최근 한국에선 이석기 의원 사태가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논란을 벌였습니다. 특히 진보파들이 이석기 의원을 포함한 통합진보당의 행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견해가 뜨겁게 부딪쳤습니다.

 

 

사실 이석기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예컨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가”

“도대체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무엇이 소악(小惡)이고 무엇이 거악(巨惡)인가”

“거악과 소악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보는 해체되어야 하는가 재구성되어야 하는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하는가”

“이석기 등은 정신병자인가, 그리고 범죄자와 정신병자는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등등입니다.

 

 

나중에 시간 나는 대로 이런 사안들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볼까 합니다만, 여기선 위의 독일 학교식당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통합진보당 대다수가 그런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상당수가 북한체제의 시대착오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일제강점기의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항일투쟁하던 김일성에 대한 숭배가 오늘날의 낡은 북한체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지도자의 빛나는 과거가 반드시 어두운 오늘의 북한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요. 거꾸로 오늘 남한이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요즘 역사교과서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 뉴라이트처럼 과거 이승만-박정희 독재체제를 미화하는 것도 ‘오버’하는 것이지요. 이런 걸 역사의 변증법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오늘날 북한체제는 시장과 국가가 낙후된 체제이고, 이걸 고수하려는 것은 바로 ‘수구적’ 태도입니다. 따라서 다른 면에서는 진보적이지만 북한체제를 지지하는 통합진보당(전체 또는 일부)은 수구적 진보파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수구적 진보’와 “개혁적 진보”를 구분해서 한국현실을 파악하는 걸 모릅니다. 그래서 진보파를 몽땅 도매금으로 종북으로 몰거나, 사이비진보라는 개념을 동원합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복잡하게 뒤엉킨 우리 현실을 파악하려면, ‘수구적 진보’와 ‘개혁적 진보’를 구분해야 하고 ‘수구적 보수’와 ‘개혁적 보수’도 구분해야 합니다. 이리해야 정세에 적합한 전략-전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이석기 의원과 같은 수구적 진보를 벗어나 개혁적 진보로 나아가는 것은 독일 대학식당에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면서 동시에 속임수(cheating)를 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 차원입니다(공정한 시장질서의 확보).

 

 

그리 생각하면 이석기 사태도 그리 어렵지 않지요. 너무 단순화했나요. 기본원리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보다 복잡한 부분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