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10) : Kappeler교수와 함께

동숭동지킴이 2013. 11. 10. 20:40

 

 

베를린 통신 (10) : Kappeler 교수와 함께

 

 

요즘 한국에선 GH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청구로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독일의 정당해산 사례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일에 나와 있는 저로서도 나름대로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김누리교수와 같이 만난 Manfred Kappeler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이야기를 다루기로 했기 때문에, 통합진보당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Kappeler교수는 독일어 wikipedia에 소개될 만큼은 유명한 인물입니다. 다만 영어 wikipedia에 등장할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명성과 실제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유명하냐 아니냐를 크게 염두에 둘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유명한 인물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격적으로 큰 결함이 있기도 하고,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지식과 이론이 부실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걸 다 갖추기 힘들다는 것과 관련해, 한국의 과거 운동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PD 치고 인간성 괜찮은 놈 없고, NL 치고 머리 제대로 돌아가는 놈 없다." ㅎㅎㅎ.

 

 

제가 뉴 라이트의 대표인사나 진보파로 널리 알려진 인물의 실망스런 모습을 비판한 것도 세상의 명성에 속지 말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의인은 없으니”, 완벽한 인간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허망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점과 약점이 있기 마련인 인간에 대해 그 장점을 살리고 그 약점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는 게 정말로 올바른 인간관계이겠지요. 인간은 다른 사람의 장점에 쉽게 혹하거나 약점을 욕하기는 쉽지만,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도급(道級)이 대단히 높은 경지이기는 합니다. 어쨌든 그 정도는 못되더라도 명성에 휘둘려서 어떤 인간이나 이론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엊그제 겪은 일도 그런 생각을 되새기게 했습니다. 엊그제 저녁에는 FU(자유베를린 대학)의 동아시아 대학원 설립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일본, 중국, 한국 공동으로 박사과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사 말미에 축하 강연(keynote address)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 명예교수 Ezra Vogel이 강연을 한 것입니다(아래 사진 참조). 그의 강연을 들으려고 저도 그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허망했습니다. 강연제목이 “Adapting to Slower Economic Growth: Institutional Change in Japan, China, and the Four Little Dragons"였는데, 강연 내용엔 adapting에 관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일본, 중국, 한국의 성장과정을 설명하고 한계점을 정리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세 나라 모두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 있는 내용을 소개할 만한 학자를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Vogel 정도의 학자라야 동아시아 대학원 축하 강연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래 제목이기도 하고 상당수가 관심을 가졌을 현재 동아시아 국가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방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에 대해 뭔가 말했다면 정말로 엉터리였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실제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Vogel은 1979년에 Japan as Number one이란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이 책이 non-fiction으로서는 제일 많이 팔린 책이었다고 합니다. 서구에 대해 콤플렉스가 강한 일본인이 서구 학자로부터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 책을 많이 사준 것이지요.(이른바 자학사관으로부터의 탈출.) ㅎㅎㅎ.

 

 

이 무렵은 서구 국가들이 oil shock로 심한 타격을 받은 반면에 일본은 상대적으로 좋은 경제성과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진국 중에선 일본만이 잘 나가고 있었던 셈이므로 이런 책이 나올 만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쭐해하던 일본은 1990년대 초부터 거품이 꺼지면서 지가와 주가가 폭락하고 경제는 오랜 정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Vogel의 책은 일본이 지나친 자만심으로 올바른 길을 찾는 걸 소홀하게 만든 (조그마한) 책임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인물인지라 사실 강연장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강연제목이 ‘섹시’해서 가보았더니 ‘역시나’였습니다. 저도 명성에 속은 셈입니다.

 

 

서구 학자들 중엔 여러 나라를 비교해서 뭔가 그럴듯한 이론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사람들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면 허점이 많습니다. 각국 사정을 잘 모르고 몇 개의 영어로 된 논문만을 읽고 자기가 원래 갖고 있던 이론틀에 끼워 맞춘 게 하나 둘이 아니지요.

 

 

Vogel도 한국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도 한글을 읽을 수 없는 그가 몇 개의 영어로 된 글을 읽고서 끼워 맞춘 느낌이 강했습니다. 예컨대 그는 한국의 강점으로 family business의 장점을 제시했는데, 아마도 재벌체제의 장점을 소개한 일부 교수들의 글만 읽은 것 같았습니다.

 

 

family business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어서(특히 후계자가 무능하거나 부패할 때), 그리 쉽게 장점만을 치켜세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IMF사태 때는 그 단점이 주로 부각되었음을 상기해 보십시오.

 

 

서구 특히 미국의 학자에겐 독창적인 이론 또는 해석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엄밀한 실증이 취약합니다. 이론과 실증을 둘 다 겸비하는 건 어려우므로, 미국학자의 이런 연구방법도 이해 가능합니다.

 

 

다만 그런 미국학자들이 다른 나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할인해서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니면 일반원리만 참고하는 게 좋지요. 진짜 세계적인 학자는 한국에 왔을 때 한국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잘 모른다”고 정직하게 답합니다. 공자 말씀으로 제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하는 게 올바른 지식의 길이지요.

 

 

Vogel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Kappeler교수는 Vogel만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소박하고 진실한 느낌을 주는 학자였습니다.(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Meinhoff처럼 목숨을 걸어보는 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거쳤기 때문일까요?)

 

 

물론 공식적인 토론의 자리는 아니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기 때문에 더 편안한 느낌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한 내용을 그냥 가볍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Angela Merkel의 인기

 

 

지난 선거에서 CDU/CSU에 투표한 많은 이들이 당 자체보다 Merkel에 대한 개인적 호감 때문에 투표했다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이미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그렇게 Merkel의 인기가 높은 비결에 대해서 Kappeler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일부 내용은 한국 언론에서 소개된 것과 겹칩니다.)

 

 

첫째로, 메르켈은 출신성분이 유리합니다. 동독 출신이고, 여성이고, 개신교 목사의 딸입니다. 이런 점들은 CDU/CSU의 기존 지지기반인 보수층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층으로부터도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둘째로, 그녀의 행동거지는 그녀는 겸손하고(bescheiden), 스캔들이 없고, 과거의 마초적인 지도자들(CDU의 콜이나 SPD의 쉬뢰더)과는 달리 옆에 서 있는 듯한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한국의 GH와 비교해 보십시오.)

 

 

셋째로, 그녀의 정책도 상당 정도 진보적인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동성애자를 용인하고, 가정내 폭력을 엄벌하는 등 미국공화당과는 전혀 다른 중도적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리해 경제정책을 제외하곤 SPD와의 차별성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2) 연정의 전망

 

 

지난 선거에서 한국의 언론들은 메르켈의 압승만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Kappeler교수에 따르면, 이때까지 CDU와 연정을 꾸렸던 FDP의 몰락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FDP는 말하자면 시장만능주의를 주창하는 보수성이 강한 정당입니다.

 

 

근년에 독일 검찰은 스위스은행 직원에게 사례를 주고 정보를 얻어내 스위스은행으로 돈을 빼돌린 독일인들을 찾아내 세금을 추징한 바 있습니다. FDP는 이렇게 정보를 빼내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말하자면 탈세 부자들을 옹호하는 노선을 채택한 것이지요.

 

 

또한 FDP는 동독지역을 지원하는 연대세(Soli)의 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들고 나왔습니다. Kappeler교수는 자기가 매월 연대세로 납부하는 게 150유로라고 했습니다. 20만원 정도이니 그리 작은 돈은 아니지요. FDP는 원자력 발전소폐지 정책을 재고하겠다고도 공약했습니다.

 

 

이런 FDP가 선거에서 참패했습니다. 지지율이 10% 포인트나 하락해 의석을 아예 한 석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지나친 보수파는 국민이 외면한 것이지요. 다만 AfD는 약진했는데, 이걸 어찌 보아야 할지에 대해선 Kappeler교수가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리해 CDU/CSU는 SPD와 연정을 꾸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 되면 SPD의 공약을 상당 정도 수용해야만 하고 결국 여야 사이의 경제정책적 차이가 크지 않게 됩니다.

 

 

이런 정치는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재미있다고 했는데, 싸움이 한국처럼 치열하지 않으니 재미가 있을 게 없습니다. 사실 독일의 신문이나 TV를 보면 한국보다 훨씬 싱거운 것 같습니다.

 

 

예전에 동독인들이 동독TV가 재미없어서 서독TV를 즐겨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TV에 비하면 서독TV 역시 밋밋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단적으로 한국TV에서 즐겨 다루는 고부 갈등 같은 게 서독TV에서 다뤄질 수가 없지요.

 

 

제가 수업에서 한국사회를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예가 있습니다. 뉴질랜드로 한국인들이 꽤 이민을 갔는데, 처음에는 괜찮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심심하더라고 합니다. 그걸 못 참으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여유가 있으면 한국에서 1년의 절반 뉴질랜드에서 나머지를 보낸다고 합니다.

 

 

뉴질랜드는 “심심한 천국”,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표현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독일도 한국에 비하면 뉴질랜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가 나아져서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 해소되면 너무 심심해지지 않을까 괜한(?) 걱정까지 해봅니다.

 

 

3) 동독인의 상대적 박탈감 문제

 

 

Kappeler 교수는 동독 것들은 무조건 나빴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선 저도 몇 가지 사례를 이전에 소개한 바가 있고, 앞으로 나름대로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단적으로 Kappeler교수의 전공인 불량청소년 수용시설(Heim)을 보면, 서독이 동독보다 반드시 나았다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서독정치인들이 이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Kappeler교수는 사돈이 동독인이라서 그들과 만나면 대단히 조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서독인으로서 승리자(Sieger)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반면에, 사돈은 어딘지 주눅들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통일 이후 20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어떨까요. 갑자기 통일되었을 때, 남한사람들이 북한사람들에게 승리자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할까요. 우리의 문화적 수준이 그런 정도가 될까요.

 

 

다만 젊은이들의 경우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제가 독일 와서 자꾸만 느끼게 되는 게 있습니다. 동서독의 갈등 문제는 이민·난민의 문제에 비하면 별 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민·난민의 문제는 세대가 지나더라도 쉽게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또 Kappeler 교수는 동서독의 발전 수준 차이를 비교할 때 고려해야 할 점 한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서독은 2차대전 이후 Marshall Plan으로 부흥의 계기를 잡았지만 동독은 소련의 수탈에 따른 피해가 심각했다고 합니다. 1989년 통일 때까지 소련에 의한 동독의 수탈이 이어졌다고 하네요. 나중에 시간 나는 대로 그 규모를 한번 확인해 볼까 합니다.

 

 

4) 역사인식의 문제

 

 

한국에서도 근래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논란이 뜨거웠던 바 있습니다. 그런데 서독에서도 2차대전 이후 한 동안은 과거에 대해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서독의 경우 히틀러에 협력했던 인물의 청산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독일 국민 다수가 히틀러를 지지했던 만큼 국민 모두가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요. Kappeler교수도 아버지가 군인으로 참전한 바 있는데, 어머니에게 히틀러시대 이야기를 물어보면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Kappeler교수도 참여한 68운동을 겪으면서 과거를 제대로 반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억의 문화“라는 게 생겨났지요. 우리도 1987년 민주화를 겪으면서 과거를 반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북한과의 심각한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있고 한국의 문화적 수준도 그리 높지 않아, 냉정한 역사평가는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이상 Kappeler 교수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본격적인 토론은 아니었고, 저는 제대로 질문할 자격이 없는 객(客)이라서 논의를 더 깊이 전개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앞으로 기회 생기는 대로 그와 다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어쨌든 오늘날 독일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