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12) : 노동의 소외와 일하는 보람

동숭동지킴이 2013. 11. 24. 20:39

 

 

베를린 통신 (12) : 노동의 소외와 일하는 보람

 

 

며칠 전 독일어학원(Goethe-Institut)에서 일하는 Tobias라는 강사(아래 사진)의 음악연주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루 5시간(중간휴식 시간을 빼면 4시간 15분)씩 주5일 수업을 담당하는 강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동은 수업시간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수업준비는 물론이고 학생들의 과제를 점검하고 고쳐주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의 교사처럼 학생지도까지 떠맡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한 업무량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별도로 시간을 내 기타 연습을 하고 이미 CD도 3집까지 발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하기도 해서 연주회를 찾아본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아마추어의 범위를 넘어 일종의 프로로서 two-job을 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다만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연주회장은 거대한 홀이 아니라 이런 연주회를 주4회씩 하는 자그마한 카페였습니다. 청중도 3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홍대 앞에 가도 이런 밴드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모의 청중이라면 기타연주로썬 생활이 유지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기껏해야 CD를 내는 데 필요한 자금 일부를 조달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다른 연주자들도 car-racer 등의 다른 직업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런 연주활동을 위해 독일어강사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이라면 그는 한국의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싫은 일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그가 독일어강사 일을 하는 걸 들어보면, 그는 그저 밥벌이로 하는 게 아니라 뜨거운 열성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소 과장하면, 혼을 불어넣어 연주하듯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에서,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 고기 잡으며, 저녁에 가축을 돌보고, 식사 후에는 토론을 하게 될 것이다”고 썼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분업이 초래하는 소외가 극복된 사회를 공산주의사회로 보고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셈입니다. 물론 다분히 목가적인 이 사회에는 공업생산이라는 2차 산업이 빠져 있다는 중대한 결함이 존재합니다.

 

 

다만 마르크스의 묘사를 하나의 비유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노동의 소외를 너무 어렵게 해석하지 말고,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회가 노동의 소외가 극복된 사회라고 생각합시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에서는 지루함을 느낄 수 있으니, 가급적 여러 일을 통해 보람을 찾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니면 직업(돈벌이)에서도 상당 정도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취미활동을 통해 삶의 또다른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보면 되겠지요.

 

 

어쨌든 사람들이 자기가 보람(행복, 자부심)을 (상당 정도) 느끼는 일을 통해 생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의 필수조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노동의 소외 문제가 상당 정도 해소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컨대 제가 지난번에 소개한 독일의 ‘히든 챔피언’인 고급 오디오메이커의 사장도 음악에 미쳐 고급오디어 제작에까지 이른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그 사장에게 노동의 소외 문제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직접 회사를 설명하는 모습에서도 자신의 일에 대한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옛날 노예나 머슴이 노동의 보람을 느끼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업사회로 들어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장시간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자들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 등이 혁명을 부르짖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회의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일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일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말하자면 ‘노동해방’의 조건이 발전되어 간 셈입니다. 다만 그 노동해방을 꼭 마르크스 식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식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노동해방’, 다시 말해서 ‘노동소외의 극복’, 더 쉽게 말해서 ‘노동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형편이 사람마다 직업마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의 보람’을 많이 느끼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게 문제이지요.

 

 

위에서 예를 든 독일어학원 강사는 보람을 많이 느끼는 축에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독일에선 생산기능인도 자기 나름의 보람(긍지)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Meister(匠人)라는 독일말이 주는 무게감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한국 사정은 어떨까요. 한국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독일어강사나 오디어메이커 사장처럼 자기가 하는 일이나 취미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성악 클럽 활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 판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지인의 딸은 세계의 유명한 축구대회를 휩쓸고 다니면서 취재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발전시키는 면에서 한국사회도 이제 많이 좋아진 것이지요.

 

 

직업집단을 보더라도, 한국의 일부 직업에선 보람을 느끼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자식들이 자신의 직업을 물려받기를 강하게 바라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면, 의사·법조인·교수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교수의 경우를 봅시다. 고교 시절 책에서 읽은 영문학자·수필가·교수인 피천득씨의 글이 생각납니다. 정확한 wording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교수라는 직업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받는 아주 좋은 직업이라고 썼던 것 같습니다. (피천득씨의 인격적 학문적 측면은 전혀 모릅니다.)

 

 

자기가 읽고 싶은 책 읽고, 하고 싶은 말 하고, 쓰고 싶은 글 쓰면서도 돈을 받으니까요. 지금의 교수들은 승진압박에 시달려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다른 직업에 비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 버는 몇 안 되는 직업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교수의 특권적 지위는 다른 나라에 비교해보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경영학 같은 일부 분야의 교수를 제외하면, 대개 교수들의 월급은 대기업 과장 수준에 못 미칩니다. 게다가 그 대기업도 한국처럼 중소기업보다 엄청나게 많은 월급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외국교수들의 월급은 절대액으로 계산해도 한국교수들에 비해 결코 많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한국보다 낮은 사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회에서 발표나 토론했다고 사례비를 받는 경우도 드뭅니다.

 

 

제가 있는 FU의 한국학 연구소에선 매주 Special Lecture(특강)를 개최합니다. 주로 외부인을 불러서 강의를 듣는데, 강의가 끝나고 사례비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같이 밥을 잘 먹지도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발표회가 끝나고 식사자리에 가서 발표자에게서까지 식사비를 거두어 일본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교수가 화를 낸 사건도 들은 바 있습니다.

 

 

학술발표자는 자신의 연구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달리 대가를 청구하지 않는다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에 한국에선 연구비 지출을 위해 행사를 치르고 그 행사비에 발표사례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중도 거의 없는 학술행사를 치르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지요.(연구업적 포함도 한 이유임.)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지만, 바람직한 사회에선 권력-금력-명예를 한 사람(집단)이 독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선진국에선 명예를 갖는 교수는 권력과 금력으로부터는 거리가 먼 것이지요.

 

 

이리 되어야 교수의 지위로까지 상승하지 못한 시간강사들도 그런 대로 생활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지요. 시간강사의 대우를 개선하자는 데는 이제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만, 그걸 국민 돈이 아니고 교수들 봉급을 절약해서 하자는 주장은 아직 극소수이지요.

 

 

사실 진보파 교수라면 이렇게까지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만, 그런 주장을 하는 진보파 교수는 영남대 박홍규 교수 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진보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멈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혹시 한국의 교수문제에 대해 더 관심이 있으면, 아래 링크를 통해 제가 이전에 교수들에 대해 쓴 글을 참고하십시오. 두 번째 글에선 끝부분을 보시면 됩니다.

http://blog.daum.net/kkkwkim/125

http://blog.daum.net/kkkwkim/126

 

 

판검사나 공무원도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이므로 금력까지 가지려 해서는 곤란합니다. 대신에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정년까지 신분을 보장해 기업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하겠지요. 다른 직종과 비교할 때, 일반 공무원의 월급은 낮추고(몇년간 동결하면 됨) 정년은 연장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시작된 평생판사제는 그런 의미에서 판사들이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만든 좋은 제도라는 생각입니다. 변호사 개업해 큰 돈 벌기 위해 기업범죄와 관련된 판결에서 몸사리는 일이 줄어들겠지요. 한국사회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도 많습니다만, 이렇게 좋아지는 면도 있습니다.

 

 

의사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럽처럼 존경은 받되 돈은 너무 밝히지 않는 집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리되어 교육자, 공무원, 의사가 바로 서면 나라가 바로 서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치가는 어떨까요. 정치에 들어선 사람들은 대체로 정말로 자기가 좋아서 그 길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지요. 시민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시민운동가도 여기에 속합니다.

 

 

따라서 어쩌면 자기 일에서 가장 보람을 많이 느끼는 정치가(시민운동가)는 다른 대가의 희생은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공평한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일부 선진국에서 일부 정치적 직책이 무보수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정치가가 최소한의 삶은 영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에게는 예컨대 선거에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나름의 삶의 조건은 갖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정당과 관련단체들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렇지 못한 형편이지요. 또 한국에선 언론들이 정치가들 욕만 하지 그들이 제대로 일할(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최근 포스코나 KT 사례에서 보듯이, 선거에서 승리한 집단이 공기업 사장을 억지로 쫓아내고 자기편 정치인을 밀어 넣으려 하게 되는 것이지요. 정치구조의 왜곡이 기업구조의 왜곡을 초래하는 셈입니다.

 

예술가는 또 어떨까요. 이들은 자신이 정말로 좋아서 예술을 직업으로 삼았습니다. 즉 노동과정에서의 보람은 충분히 느끼는 집단입니다. 따라서 물질적 대우가 반드시 높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고호처럼 살아생전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궁핍한 삶을 영위한 경우가 적지 않지요.

 

 

하지만 예술가들이 최소한의 삶도 누리지 못한다면 그건 사회의 문화수준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오늘날 한국 상황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컨대 영화연극계 일반 스탭들이 받는 월급은 아마도 겨우 최저임금 수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에선 정치가나 예술가나 로토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스타가 되면 팔자를 고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꽝’인 인생입니다. 보통의 정치가나 예술가도 ‘적당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보장제도는 시대와 화합하지 못한 정치가나 예술가들도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편, 보람은 적게 느끼면서 힘은 많이 드는 직업일수록 금전적 대가는 많아야 하겠지요. (물론 노동의 대가에는 이런 측면 이외에 생산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뉴욕의 거리청소부 월급이 상당하다는 기사를 읽을 기억이 납니다.

 

 

과거에 비해 인류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물론 아직 모두가 노동을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할 수 있는(노동의 소외에서 해방될) 가능성은 커졌습니다. 문제는 그 가능성이 선진국과 후진국이 크게 다르며, 한 나라 내에서도 직업(및 직위)에 따라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바로잡으려는 불평등 문제도 결국 이처럼 ‘보람 있게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의 불평등 문제와 연관된 셈입니다. “노동자(또는 민중)가 주인 되는 사회” 어쩌구 하는 통합진보당(및 과거 민주노동당) 강령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경한(촌놈 겁주는) 표현 대신에 가급적 쉽게 말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일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면 ‘노동해방’도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독일 사회는 한국보다는 노동해방이 더 진전된 사회이며, 우리도 그런 식의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한 발씩 한 발씩 움직여 가면 되겠지요.

 

 

저는 여러 번 한국사회의 문제점으로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부정적(negative)인 측면이고, 이런 문제점을 바로잡게 되면 “일과 삶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회”라는 긍정적(positive)인 목표가 될 것입니다. (‘삶’은 바로 돈이 되지 않은 취미활동까지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이상 독일어 강사의 연주회를 보면서 느낀 소감을 정리해보았습니다. 한 가지 사례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끌어낸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만, 평소에 늘 하던 이야기인지라 제 글을 계속 읽어 오신 분들에겐 그리 부담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마침내 플라스틱으로 된 비자를 받았습니다. 보통 비자는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인데, 1년이 넘어가는 비자는 이렇게 하는 걸로 바뀐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걸로 저의 독일 삶은 일단 기본적인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젠 좀 여유를 가지고 지내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블로그 글도 매주 일요일 마다 정기적으로 올리는 대신에, 쓸 거리가 있을 때 올리는 식으로 바꿀까 합니다. 부정기적인 글쓰기가 되겠지요. 사실 제 글을 매주 읽는 분들도 다소 부담을 느꼈을 텐데, 거기서도 해방시켜 드릴까 합니다. 이것도 ‘노동해방’의 한 부분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