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의 거듭남과 대선 후폭풍>
2013년 새해를 맞아 여러분들 모두 새롭게 전진해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작년 대선 결과가 기대에 어긋나 멘붕(정신적mental 붕괴) 상태에 빠지셨던 분들은 속히 기운 차리시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다시금 분발하셨으면 합니다.
역사란 게 항상 일직선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 우여곡절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는 말도 있습니다. 대선패배로 진보개혁세력이 몰락하는 게 아니라 거듭날 수 있다면, 이번 대선패배는 더 큰 도약을 위한 일시적 시련일 뿐입니다.
(1) 야권의 거듭남
진보개혁세력이 거듭나려면 할 일이 많습니다. 우선 정치면에서 야권이 철저하게 반성하고 발전적으로 재편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다만 친노니 비노니 하는 프레임(frame)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선 친노라는 명칭은 조중동이 퍼트린 프레임(덫)이 아닌가요. 그 덫에 야권이 갇혀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우리 진보개혁진영이 종북 프레임에 갇혀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물론 낡은 북한체제라는 현실이 종북 프레임을 만드는 데 기여하듯이, 친노 프레임에도 일정한 진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노는 민주당의 주류이고 그 주류의 문제점을 지칭하는 쉬운 용어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당의 주류나 문제점은 갖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주류에도 문제점은 존재합니다. 그게 노무현 정부 때 요직을 맡았던 친노를 말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19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이른바 386(지금은 나이 들어 40대이니까 486이 되었지요)을 의미하는 것이든지, 혹은 그 양자의 연대체이든지 어쨌든 문제점은 갖고 있을 것입니다.
구미의 정당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습니다. 일종의 당의 분파(fraction)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가 발전된 나라일수록 주류와 비주류는 서로 긴장된 관계 속에서 생산적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에선 주류와 비주류가 생산적 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비생산적 권력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DJ가 떠난 이후 구심력이 취약해진 민주당에서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집니다. 이런 비생산적인 계파싸움 또는 계파 나눠먹기가 4.11 총선과 대선에서 패배한 중요 요인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대선에선 친노가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가 물러났습니다. 뭔가 구체적인 과오를 근거로 비판당하면서 물러난 게 아닙니다. 이해찬 당대표나 박지원 원내내표 총선 이후 임시 전당대회와 국회에서 뽑힌 인물입니다.
좀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그들을 민주적으로 뽑은 과정은 그냥 깡그리 무시된 셈입니다. 저는 두 사람과 아무 인연이 없으며 애당초 그들을 뽑은 게 그리 잘한 걸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해찬씨나 박지원씨나 우선 인상이나 대중적 이미지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민주당에 인물이 없다면 그게 진짜 문제겠지요.)
따라서 그들이 애당초 대표로 뽑히지 않도록 할 일입니다. 일단 뽑아놓고선 자기편이 아니니까 물러나라고 하는 게 정상적인 행태로 보이지 않고, 그게 통용되는 정당이 정상적인 정당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물러나게 하더라도 왜 물러나야 하는지를 따지는 과정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친노나 386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지도 불분명하지만 당의 주류를 비판하는 세력이라면 더 나은 진정성·비전·전략을 가지고 주류를 비판해야 합니다. 그냥 조중동의 프레임을 이용해 기득권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비판해선 안 됩니다.
대선 과정에서 문후보가 승리하면 친노가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고 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법륜 스님도 오늘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승리를 위한 고육지책인데 전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친노인지 모르겠는데, 만약 노무현정권에서 청와대에서 근무했거나 장차관을 지냈던 인물들로 한정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친노의 대표는 누구인가요? 바로 문후보입니다. 친노가 물러난다면 문후보부터 물러나야 하는 게 아닌가요.
실제 대선캠프에선 위에서 정의한 친노가 임명직을 안 맡기로 하는 선언을 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방안이 옳지도 않고 득표효과도 별로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선언은 친노는 모두 범죄자 또는 하자가 있는 인물이라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친노 중에도 문제가 있는 인물이 꽤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친노를 싸잡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예컨대 노무현정권에서 정책실장을 지냈던 이정우 교수를 봅시다. 그는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절대로 차후 정권에서 공직에 나서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그는 진보개혁 인사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인격이 훌륭한 친노입니다.
실제 선거에서 이교수는 여러 언론활동을 통해 득표에서도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거에선 이미지가 중요한데 이교수의 맑은 인상은 다른 캠프의 중요인물들과 대조적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안철수 캠프에서 최후통첩을 던지던 박선숙씨의 인상이나 박근혜캠프 김무성씨의 인상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리고 친노들을 다 짤라 버리고 문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누구를 참모로 쓰나요? 비노 중에서만 고르라고요? 비노는 친노보다 훌륭한 인물인가요? 참으로 어이 없는 발상입니다.
물론 문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폭넓게 인물을 등용해야 합니다. 친노에만 귀를 기울여선 안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친노는 모두 중요 직책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임명직 거부선언과 같은 자학적이고 네거티브적인 전술은 득표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예전에 친노들이 캠프의 공식 직책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었으므로 별로 신선하지도 않습니다. 또 조중동이나 방송이 이런 선언을 크게 다뤄줄 리 만무합니다. 어디 한 구석에 다룬다 하더라도 하루뿐입니다.
이런 자학적인 방식보다 제가 제안한 바 있는 포용적이고 담대한 전략 즉 대통합내각에 새누리당의 합리적 보수세력도 포괄한다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친노니 비노니 하는 국민들이 잘 모르는 과거지향적인 사안을 갖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는 정치구도의 혁신이라는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또 새누리당 빼내기냐 대연정이냐 하면서 시끄러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루가 아니라 여러 날 울궈먹을 수도 있습니다.
((추가 1월 12일: 문재인 후보가 의원직을 사퇴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지적들이 계속되고 있어서, 처음 글을 쓸 때 지면을 줄이려고 다루지 않았던 제 생각을 추가합니다. 법륜 스님 같은 분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선거과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고 선거 후에도 이걸 거듭 거론하고 있습니다.
저는 위에서 언급한 친노 공직사퇴 선언보다도 이건 더 바람직하지 않고 효과도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4월 총선 때 문후보는 대선에 나가더라도 사퇴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언했습니다. 대선 막바지에 몇 표 더 얻자고 이렇게 몇 달 전에 지역구민과 약속한 것을 뒤집는 일을 하는 건 신의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신뢰를 줄 수 없는 지도자를 누가 따를 수 있을까요.
물론 정치가가 모든 약속을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건 꼭 불가피한 일이 발생할 때여야 합니다. 뭔가 내려놓는 듯한 모습(쇼)을 보이기 위해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법륜 스님을 비롯해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분들은 안타깝고 절실한 마음에서 이런 제안을 하셨겠지만, 제가 보기엔 정치의 본질보다는 정치공학에 치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건 득표에 효과도 없을 것입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말을 뒤집는 것은 오히려 신뢰를 떨어트립니다. 충격효과도 없습니다. 이미 박근혜 후보가 의원직을 사퇴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박후보는 비례대표의원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당 경선에 나왔던 김두관 지사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사 임기를 채운다는 자신의 약속을 어겼던 게 민주당 경선에서 내내 커다란 약점으로 작용했음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득표에 도움이 되는 신선함은 모방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과거 노무현이 종로구를 버리고 정치적 죽음의 땅인 부산에서 출마함으로써 감동을 주고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걸 모방해 유시민씨나 김부겸씨가 대구에 출마한 것은 감동을 얻을 수 없었음을 상기하십시오. 유씨 등의 행위나 문후보의 의원직 사퇴는 정치적 쇼로 받아들여질 뿐입니다.
정치에는 쇼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선한 창의적 발상에 의하지 않는 쇼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쇼로 대중의 표를 얻으려는 자세는 대중을 너무 깔보는 태도입니다. 또한 탐욕과 공포에 의거하는 보수수구 후보와 달리 감동과 희망에 의거해야 하는 진보개혁 후보가 쇼에 지나치게 의거하면 역효과를 불러 옵니다.
게다가 의원직 사퇴 역시 언론에서 하루 정도 다루는 일회용 효과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중동 등은 사퇴에 대해 약속을 어겼다는 점을 부각해 보도할 것이므로, 신뢰할 수 없는 후보라는 부정적 효과마저 발생합니다.
민주당 비주류나 안캠프쪽이었던 분 등이 기득권 포기라고 하면서 이런 종류의 자학적 네가티브 전략을 계속 거론하는 까닭은 거국통합내각 같은 포지티브 전략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걸 비장의 무기로서 거론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선 패배에는 당연히 당의 주류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의 비주류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누구에게 더 책임이 있는가보다 어찌해야 당을 거듭나게 할 것인가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안을 놓고 주류와 비주류가 생산적인 경쟁을 벌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추가 1월 3일: 오해를 피하기 위해 추가합니다. 저는 이른바 친노를 옹호할 생각이 결코 없습니다. 선거패배의 가장 큰 책임자가 그들입니다. 또 실제 선거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친노 핵심의 경우를 보더라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노 중에선 그나마 말이 잘 통하는 인물로 알려졌는데도 선거판을 보는 능력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는 것은 친노를 비판하더라도 구체적 대안을 가지고 비판해야지 막연하게 '물러나라', '기득권을 내려 놓으라'는 따위의 비판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당의 거듭남을 위해 검토해야 할 문제는 많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당과 대중의 연계 관계 문제입니다. 도대체 민주당은 누구를 대변하는 정당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 봤으면 합니다. 중산층과 서민이라고 하는데 그 연계관계가 취약합니다.
우선 다른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선 진보개혁을 부르짖는 정당과 노동조합의 연계가 부실합니다. 한국노총은 민주당과 연대했지만 민주노총은 마음 둘 곳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노조조직률이 10% 정도에 지나지 않아 양대 노총이 대변하는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체 취업자의 1/3에 해당하는 자영업자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는 정당도 딱히 없습니다. 이들은 정당 이념보다는 지역색에 더 많이 좌우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정당들은 아직도 전근대적 색깔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회계층과 정당의 유기적 관계를 구축하지 않는 정당재편은 반쪼가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야당이 노동조합을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조직되지 않은 다수 노동자와 야당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를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한 진보정의당은 아예 야권재편에 발맞춰 민주당과 통합하면 어떨까요. 그러면서 민주노총도 한국노총과 통합하든지 아니면 그전에라도 재편된 야당과 연대했으면 합니다.
오늘 경향신문에서 최장집 교수는 안철수씨를 중심으로 하는 제3정당을 만드는 방안을 거론했습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 하에서 제3정당을 만드는 것은 좋은 방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또 국회의원 선거 등 각종 선거에서 짜증나는 단일화 협상을 되풀이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지역구후보 말고 비례대표 의원후보만 내는 참신한(?) 정당을 만든다면 사정은 다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안철수씨는 청년들을 위한 멘토로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인으로서는 그 발전가능성이 왜소해 보입니다. 안철수씨에 관해선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공개적으로 드러난 사건만을 보더라도 그를 중심으로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은 헛짚었다는 느낌입니다.
저도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씨 지지세력들로부터 참여제안을 여러 번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호남에서의 높은 안철수 지지율 따위를 지지 동기로 내걸었지 정작 안씨의 정치적 능력을 거론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씨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로 많은 분들이 그를 지지하거나 선거캠프에 합류한 것입니다. 이건 안씨를 이용해 선거판 나아가 정치판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주 거칠게 말하면 이건 안씨를 꼭두각시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안씨도 나름대로의 인격과 세계관이 있는데 그걸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자기들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이런 자세는 대선 정국에서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모든 인간에겐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라 안씨도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씨의 단점은 교수나 기업인으로선 별 문제가 아니지만 정치인으로 대성하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예컨대 국회의원 총수를 줄이자는 안씨의 제안은 어쩌다 저지른 실수일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가 그런 잘못된 제안을 끝까지 고수하고 심지어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조건으로까지 고집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마음에 좀 안 든다고 협상을 중단한다든가, 단일화에 합의한 이후에도 문후보를 돕는 것인지 안 돕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유지한 것 따위에서 그의 정치적 자질은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밖에 예전에 그와 함께 가깝게 지내거나 활동했던 분들로부터 그의 개인적 행동스타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은 굳이 여기서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역시 그의 정치적 자질의 문제점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물론 안씨가 새로 정당을 만들면 여러 정치낭인들이 몰려들 것이고, 최소한 문국현씨 정당(창조한국당) 정도의 성장은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대성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대선정국에선 나름대로 기여도 했지만, 안씨가 앞으로 정당을 새로 만들면 오히려 정치판을 혼탁하게 만들 위험도 있습니다.
안씨를 지지했던 법륜 스님은 안씨로 단일화되었다면 대선에서 성공했을 것이라고 오늘 언론보도에서 말했습니다. 많은 안철수 지지자들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랬을 가능성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단일화됐을 때 안철수 지지자들의 이탈가능성이 문재인 지지자들의 이탈가능성보다 더 높다는 여론조사결과가 그걸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안씨 지지자들 중에는 중도파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후보에게도 밀리는 정치력으로 과연 박근혜후보를 꺽을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우선 안씨의 토론실력으로 박후보를 제대로 누를 수 있었을까요. 또 안후보는 문후보와 달리 개인적 이력에 대한 검증을 거칠 게 여럿 있을 것입니다.
안후보에 대해 압도적 지지를 보내던 호남이 단일화 과정에서 문후보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안후보로 단일화된 경우, 혹독한 개인적 검증을 거치면 안후보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어이없이 허물어질 가능성이 작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안씨로 단일화되었다면 이겼을 것이란 주장은 그냥 해보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런 주장을 편 법륜 스님도 실제 안후보 개인의 정치적 자질 자체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문국현씨가 존경받는 기업가로 남는 게 더 좋았듯이, 안씨도 그냥 정계를 은퇴하고 교수나 착한 기업인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젊은이들의 멘토 역할을 하면 되겠지요.
안철수씨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어쨌든 야권의 거듭남을 위한 생산적 논의가 활발해지기 바랍니다.
(2) 대선 후폭풍
사실 신년 벽두부터 글을 쓰게 된 것은 위의 “야권 거듭나기‘ 문제 때문이 아니라 대선 후폭풍과 관련된 사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할까 했는데 대선 후폭풍 관련 글을 쓰는 김에 위에 약간 보탠 셈입니다.
대선 결과로 인해 당장 직접적 피해를 받는 분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MB 정권 하에서 자행된 여러 과오들이 바로잡아질 희망이 사라지거나 줄어든 게 당장의 피해입니다. 중장기적 폐해는 물론 두고봐야 하겠지요.
언론에 보도된 것만 하더라도, 여러 노동자들의 자살은 대선패배가 초래한 당장의 폐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언론의 공정성을 짓밟은 사장에 반기를 들었다가 쫓겨난 기자나 피디들도 막막할 것입니다.
곽교육감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대선 결과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곽교육감을 유죄로 만든 사후매수죄가 위헌인가 합헌인가에 대한 12월 27일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합헌으로 결론났습니다.
그런데 저에겐 약간 놀랍게도 3인의 헌법재판관(이정미 재판관 등)은 위헌이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입니다.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9명 중 3명이 위헌판결을 낼 정도라면, 대선결과에 따라 위헌의견이 다수가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헌법재판관들은 대선과 같은 정치적 결과에 흔들리지 않는다고요? 물론 그런 분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렇다면 판결을 왜 대선 이후까지 계속 미뤄왔을까요?
헌재는 법관들 중에선 가장 정치적으로 판결한다는 말을 예전에 헌재 관련자로부터 들은 일도 있습니다. 노무현 탄핵 사건이나 수도이전 판결을 한번 상기해 보십시오. 결국 곽교육감도 대선 후폭풍의 피해자인 셈이지요.
(추가: 1월 3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헌재는 사후매수죄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리면서도, 선거비용 보전을 위한 금픔 제공은 위법이 아니라는 내용을 판결문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곽교육감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셈입니다.
다만 그래도 헌재가 합헌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곽교육감이 석방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뭐가 복잡하네요. 경향신문의 기사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030608495&code=940301 )
그리고 어제 신년 세배 다니는 길에 경기도 교육청 관련 인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이명박 정부로부터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을 비롯한 교육청 인사들이 겪고 있는 수난을 좀 자세히 듣게 되었습니다.
김상곤 교육감은 진보개혁세력의 아이콘입니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진보개혁세력은 한 동안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 교육감은 2009년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희망의 빛을 던져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들고 나온 무상급식은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복지를 논하는 계기가 되었고, 작년 총선과 대선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 증대를 공약으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진보개혁세력의 빛이 되고 한국사회를 격상(upgrade)시킨 김교육감이니 보수수구세력을 대표하는 이명박정권이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김교육감은 1기 취임부터 2기 취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명박 정권에 의해 행정적 법률적으로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법정에 선 것도 여러 번입니다. 물론 그나마 양심을 갖고 있던 법원에 의해 이때까지 모두 무죄판결을 받음으로써 이명박정권의 폭압을 드러내긴 했습니다만, 그 동안 김교육감과 교육청이 겪은 고초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말기에서도 김교육감의 수난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어제 제대로 확인했습니다. 그동안 국민들의 관심이 대선에 집중되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안입니다.
이는 학교 폭력의 학생생활 기록부 기재 문제입니다. 교육부가 학교에서 폭력사건을 일으킨 학생들을 생활기록부에 기재토록 하고 이를 5년 간 보존함으로써 대학진학과 취업에서 불이익을 주도록 한 조치와 관련된 사안입니다.
학교 폭력은 당연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라지게 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모든 죄에도 해당됩니다.
며칠 전 BBC 드라마에서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작품을 보았습니다. 거기 보면 도둑질에 대해 사형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무 끔찍하지만 인권이 경시되던 과거엔 그런 극형이 흔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빵을 훔쳤다고 5년형을 선고받은 것도 비슷합니다. 조선시대 자유(?)부인 어우동이 사형을 당하거나 오늘날 일부 아랍국가에서 간통을 저질러 극형에 처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 과도한 형벌이 내려지는 사례입니다.
우리의 경우 학교폭력 문제는 늘 있어 왔지만 학생인권조례를 비판하는 조중동에 의해 부풀려진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진보교육감이 제정한 인권조례 때문에 학교 현장이 엉망이 되고 그래서 학교폭력이 심각해졌다는 조중동의 선동인 것이지요.
학생인권조례가 정착되어 가는 과도기에는 당연히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학생을 두들겨 패거나 기합 주는 군사문화로 되돌아 가서는 안 됩니다. 다른 선진국에도 이런 일은 없습니다. 교사의 권위는 다른 방식으로 찾아져야 하지요.
그리고 그 인권조례 때문에 학교 폭력이 특별히 심해졌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그런 조중동의 소동을 이용해 폭력을 행사한 학생들을 징계한 조치를 생활기록부에 기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물론 이런 조치는 학교 폭력을 줄이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 그리고 선진국 중에서도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국가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다른 선진국에선 그런 기록을 졸업 후 5년 간 보관하고, 또 진학이나 취업에서 불이익을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다 한 번 주먹을 휘두른 걸 걸 가지고 어린 학생에게 오랫동안 낙인을 찍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비교육적이기 때문입니다. 애들은 싸우면서 자란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정도가 심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김상곤 교육감은 비록 학생생활부에 기재를 하더라도 ‘중간삭제’와 ‘졸업 전 삭제’ 제도를 두자고 교육부에 건의했습니다. 개전의 여지를 두고 사면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즉 어린 학생이 한 번의 실수로 진학과 취업에서 꼭 피해를 보지는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이명박정부의 국가인권위원회도 권고한 방안입니다. 다른 선진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재벌총수는 잘도 사면하면서 어린 학생에게는 사면조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랬더니 이명박정부는 “이거 잘 걸렸다”고 하면서 김교육감과 그에 동조한 전북교육감을 탄압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아래 첨부문건에 나오듯이 작년 8월에 대대적으로 경기도 교육청 감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해 김교육감 이하 70여명을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의 죄로 중징계(정직, 해임 또는 파면)하는 절차를 밟고 있고, 심지어 검찰까지 수사에 나섰습니다. 또 정치검찰이 등장한 것이지요. 대선결과가 달랐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겠지요.
폭력행위의 학생생활 기록부 기재는 김영삼 정부 때를 비롯해 한두 번 시도되었다가 그만둔 일입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는 김상곤 교육감 등 이른바 진보교육감을 탄압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학교 내의 폭력은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막는 방법은 일반사회와 달라야 합니다. 교육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무상급식은 눈칫밥(낙인 효과)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학교폭력 배제 방식에서도 낙인효과를 만들어선 안 됩니다.
자기 자식이 폭력을 당하면 학부모는 당연히 분개할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제재에 찬성합니다. 하지만 미성년자인 애들인 이상 거꾸로 자기 자식이 주먹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폭력학생 낙인을 찍고 진학과 취업에 불이익을 주는 게 분명해지면 학생들이 조심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반면에 일단 낙인이 찍힌 학생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고 더욱 폭력적이 되면서 학교 현장을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폭력사실 기재의 중간삭제와 졸업 전 삭제 제도를 두자는 것입니다. 이게 보다 교육적이지 않을까요. 때문에 대체로 보수적인 교육관료들조차 김교육감에 동조해 대량 징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경기도 교육청 내부의 간부뿐만 아니라 25개 지역 교육장 모두가 김교육감에 동조했습니다. 그리해 그들까지 징계를 당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그들은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낙인을 함부로 찍는 것은 교육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박근혜 당선인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만약에 교육계의 이런 대량 학살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면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교육부가 1월 말까지 징계를 마무리하겠다고 하는데, 박 당선인이 그냥 묵인해서는 안 됩니다.
박 당선인에 대해선 현재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무상보육의 확대 등에선 기대를 엿볼 수 있고, 극우파 윤창중 대변인 임명에선 우려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분명하게 박 당선인의 성격이 드러날 것은 학생생활부 문제와 교육계 대량 징계 사태에 대한 박당선인의 태도일 것입니다. 만약 이른바 ‘이명박근혜’ 정권이라면 박 당선인은 사태를 모른 체 할 것입니다.
반면에 박 당선인이 MB와 뭔가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면 이 사태에서부터 다를 것입니다. 요컨대 학생생활부 사태는 박정권의 성격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태를 박정권의 시금석으로 쓰는 걸로 진보개혁세력이 할 일을 다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박당선인이 어찌 하든 우리는 김교육감을 지켜내고 그와 더불어 옳은 교육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대선에서 패배한 판국에 야당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진보개혁의 교두보를 확실하게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친노니 비노니 하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은 다툼보다 권력의 횡포에서 교육을 지켜내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일을 제대로 처리합시다.
우선 대선 정국에 파묻혀 이 사태를 알고 있는 국민들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주위에 널리 이 사태의 진상을 알리고 MB의 마지막 발악(?)을 저지합시다.
(추가: 1월 4일. 이건범씨가 이 문제에 대해 1월 4일자 경향신문에 좋은 칼럼을 썼습니다. 칼럼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032109105&code=990100&s_code=ao041 )
참고로 아래에 이 사태와 관련된 성명서 일부를 모아 놓았습니다.
◎ 경기도교육청 성명 내용(2012.12.11)
<안타까운 교과부의 2차 특정감사 - '주홍글씨’학생부기재 개선이 먼저입니다.>
또 ‘특정감사’입니다. 학교생활기록부 학교폭력 가해기록 기재 보류와 관련하여, 교육과학기술부의 경기도교육청 특감이 오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여름 교과부가 한 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17일 동안 예정된 기간을 두 차례나 연장하면서, 우리 교육자들의 양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특감을 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교과부는 가히 불법부라 할 것입니다. 학생부 학교폭력 기재지침부터 상식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불균형하고 과잉된 처벌로 가득합니다. 지침을 보류한 교육청에 특감이라는 강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교육청 고위간부 30명을 특별징계위원회에 넘긴 것이 어떤 법적 근거에 의한 것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특히 지난 5일, 교과부 장관이 우리 청의 교육국장과 25개 교육지원청 교육장을 비롯한 30명을 특별징계위원회에 넘긴 것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학생부 관련 사안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이들에게 폭력의 낙인을 찍어 미래를 빼앗는 잘못된 지침을 만들고, 정당한 권한으로 기재를 보류하도록 한 교육청을 특감으로 누르고, 교육감의 합법적 지시를 이행한 간부 직원과 교사들을 징계 고발하고, 신청하지도 않은 장관의 징계요구를 행사하여 기어이 우리 청 간부들을 특별징계위에 세우려 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합니다. 교과부의 칼 끝에 베이는 것은 경기도교육청만이 아닙니다. 법치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권입니다. 경기혁신교육입니다. 나아가 우리 교육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소중히 가꾸는, 이제 막 자리를 잡는 교육자치입니다. 중앙정부 부처가 자치기관 직원을 마구 징계할 수 있다면, 어떤 자치단체도 제대로 된 지방 행정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수 십 년 전, 감히 지방자치를 꿈꾸기 어렵던 중앙행정 독재 시절로 돌아갈 것입니다.
교과부는 깨닫기 바랍니다. 권력으로 모든 것이 통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특감으로 교육자의 양심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지침을 돌아보고 시급히 개선하기 바랍니다. 특감의 칼날을 거두고, 우리 청 간부 직원 교사들을 향한 징계와 고발을 거두기 바랍니다.
우리 청은 그 동안 학생부 기재 개선방안을 수 차례 제시했고, 지금도 교과부가 소통과 대화를 통해 교육행정의 정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과부 특정감사에 당당히 응할 것이며, 교육자치를 지킬 것이고, 교과부의 잘못된 지침을 고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
2012년 12월 11일경기도교육감 김상곤
-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기자회견문 -
학교생활기록부 학교폭력 기재는 개선돼야 합니다
중학교 2학년생이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잠자는 같은 반 짝궁 옆구리를 찌르며 일어나라고 한 행동이 학교폭력으로 신고됐습니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 회부되고 교내 봉사 3일과 서면사과가 결정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학교생활기록부에 올라갔습니다. 7년 동안 지워지지 않습니다. 기록은 아이가 대학에 갈 때도 남습니다. 아이 부모는 학교폭력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에 대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중입니다. 딱한 일입니다.
학교폭력으로 온 국민이 시름에 잠겨 있습니다. 학교사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입니다. 꽃다운 아이들이 학교폭력으로 당하는 피해와 좌절, 눈물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저의 모든 노력을 다하여 해결책을 찾아갈 것입니다.
학교폭력 문제가 아니라, 학교폭력의 학교생활기록부 기록 문제를 놓고 교육과학기술부와 갈등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이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온 국민의 지혜를 모아서 정책을 만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환부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임시방편적 처방을 통해 학교폭력을 막겠다는 것입니다.
학교폭력의 학생부 기재가 얼마나 무리한 대책인지는 이미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분노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채택된 이 대책은, 정의롭지도 않을 뿐 아니라 법 상식에도 어긋나고, 최소한의 교육적 가치도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인 대책입니다. 한마디로 교육과 인권의 이름으로 허용할 수 없습니다.
이 대책은 무엇보다 위헌적, 위법적 요소가 있습니다. 헌법 제37조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 법률로 제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개인정보에 대한 조사․수집․보관․처리․이용 등은 가장 민감한 기본적 권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결정은 원칙적으로 국회가 정하는 법률로써 진행하는 것이 상식이자 헌법 원리입니다. 프라이버시 관련법은 ‘형벌 등의 기록’을 ‘건강과 관련된 기록’과 함께 가장 민감한 정보로 취급합니다.
학생부에 기록되는 학교폭력 관련 사항은 정확히 이런 정보에 해당합니다. 졸업 후 5년간 보존되어 상급학교 진학 때는 물론, 취업 시에도 불리하게 활용될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할 경우에는 더욱 명확한 법률적 수권이 필요합니다. 교과부 지침 정도로 이런 불이익을 주는 것은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도 위배됩니다.
불공평한 것이 또 있습니다. 기록되는 것은 오직 학생에 대한 폭력 징계사안입니다. 학생이 일반사회인이나 교사, 부모 등에 대해 저지른 폭력행위나 범죄행위에 대한 사항은 기재되지 않습니다. 기준도 들쭉날쭉이어서 가벼운 사안이라도 부모간에 다툼이 일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리면 기록됩니다. 형평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워 학교가 너무 힘들어 합니다.
올 들어 학교폭력 행정심판이 청구된 것이 18건이었는데, 이 가운데 10건이 생활기록부 기재를 취소해달라는 내용입니다. 비슷한 행정심판이 봇물 터지듯 늘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정부의 학교폭력근절종합대책은 2월 초에 발표되었고, 학교생활기록부 기록은 3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이 중요한 사안을 학교가 충분히 안내하고 학생들이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게다가 교과부의 지침을 그대로 따른다면,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교 3학년까지 모두가 대상입니다. 초등학교 어린아이까지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경미한 서면사과부터 전학이나 퇴학 등 중한 처분까지 동일한 방식으로 기록됩니다. 성장기 학생들의 발달과정의 특성을 감안하면 모든 부모와 아이들이 이 지침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경기도교육청은 이달 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종합정책권고'를 통해 학교생활기록부 기재와 관련한 사항을 개선하라고 권고한 뒤, 각 학교에 대해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를 보류하도록 한 바 있습니다. 인권에 관한 한 최고 국가기관인 인권위의 권고는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 권고를 교과부는 정면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저는 교과부 지침의 수용여부를 두고 깊이 고뇌하였습니다. 중앙정부인 교과부와 지방교육자치단체와의 계속되는 갈등으로 비춰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교과부는 지침을 따르지 않을 경우 특별감사를 하고 관련자를 처벌하겠다고 합니다.
교과부가 그토록 염려하는 ‘학교 현장의 혼란을 초래’하는 권한남용이고 협박입니다. 국가 교육정책의 최고 결정기관인 교과부가 앞장서서 비교육적, 반인권적 정책을 결정하고 폭력에 가까운 방식으로 강제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생활기록부의 학교폭력 조치사항 기록을 계속 보류하고자 합니다. 이번 대입전형에 제출될 학생부에도 학교폭력과 관련한 기록이 포함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법정신과 국내외 인권규범, 그리고 교육적 영향을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하는 교과부의 지침은,
명백히 어린 아이들의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높습니다. 교육적으로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학교폭력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보류는 교과부가 교육계와 국민들의 의견을 널리 들어 아이들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저의 이러한 조처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헌법 정신, 기본권 제한의 법률유보원칙을 정한 헌법 제37조, 학생의 인권보장을 규정한 초중등교육법 제18조, 교육감의 학교생활기록부 제공에 대한 지도 감독권을 담은 동법 제30조의7,
그리고 상급학교 입학전형을 위해 제출하는 학교생활기록부 내용의 일부를 제외할 수 있도록 한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침 제5조,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정정사항은 제외하고 제공하도록 규정한 동 지침 제19조의 취지에 따른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지난 95년에도 학교폭력이 문제되었을 때 교육당국이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방침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현재와 똑같은 논란이 일었고 발표 1달 반 정도 지나 방침을 철회한 바 있습니다. 언론을 포함한 모든 여론이 이 즉흥적이면서도 비교육적인 처사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육협의회를 비롯한 대학당국에 호소합니다. 입학 심사 때 평가자료로 학교생활기록부의 학교폭력 관련 기록을 활용하는 것을 유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될지는 모르지만, 해당 학생에게는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너무도 억울한 일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자료의 형평성과 신뢰도도 그렇지만, 그 자체가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교육은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어려움을 성숙한 어른들이 돕는 일입니다. 잘못에 명백한 책임을 묻는 일과 함께 관용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성찰과 재기의 기회 또한 인내심을 가지고 제공해야 합니다. 학교폭력에 대해서는 엄중한 조치가 필요하나, 장래의 기회까지 박탈하거나 주홍글씨를 새기려는 또 다른 폭력이어서는 안됩니다.
학생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학교장과 선생님들에게 호소합니다. 저의 결정은 교육적 원칙을 지키고 학생들을 올바르게 이끌고자 하는 충정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학교폭력으로 피해를 당한 많은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님들의 아픔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폭력은 반드시 근절돼야 합니다. 학생부에 학교폭력 조치사항 기록은 보류하지만, 다른 교육적인 방안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취할 것입니다. 학교폭력으로 눈물 흘리는 학생이 없도록 혼신의 힘을 쏟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8월 23일
경기도교육감 김 상 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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