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1995.3) -시민의 신문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4:31

 재벌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우리 사회에는 지금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몰래몰래 받아서 챙겨 놓았던 뇌물이 들통나서 노태우씨가 감옥으로 가는가 하면 5.18 특별법 제정으로 전두환씨마저 같은 처지로 떨어질 판국이 된 것이다. 마침내 군사독재의 악령들이 자취를 감추고 수많은 억울한 영령들이 늦게나마 위로를 받을 것같다. 제 2의 건국 운운하면서 지나치게 폼을 잡는 데에도 크게 비아냥거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새롭게 한국을 창조해 나가려 한다면 악당 몇 명을 단죄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즉 이 참에 타락하고 썩어빠진 정치질서를 근본에서부터 바로잡고, 나아가 그러한 정치질서와 뗄래랴 뗄 수 없게 유착되었던 경제구조를 총체적으로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치개혁은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경제의 수술과 체질개선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짙어보인다. 정부의 본격적인 재벌개혁안이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하고 재벌측의 면피성 자정선언만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낌새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국민대중이 힘차게 나서서 개혁을 이끌고 나간다면 만약 이번 기회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효율적이며 공정하고 민주적인 한국경제의 실현은 성큼성큼 앞당겨질 것이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고질병은 한마디로 재벌의 이중적 독재체제이고 따라서 그 해결방향은 바로 재벌의 민주화이다. 재벌의 이중적 독재란 한편으로 재벌이 국민경제를 독재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의 내부구조가 소유와 경영면에서 총수 1인의 독재체제라는 것이다. 재벌은 우리 경제의 압축적 불균형 성장과정에서 구조적 특혜와 사안별 특혜를 집중적으로 제공받아 이상비대화하였고 그 반면 중소기업등 다른 경제부문은 상대적으로 몹시 취약해졌다. 그 결과 재벌은 국민경제의 성장을 주도해 나감과 동시에 타 부문을 억압하기도 하는 야누스적 존재로 자리잡은 것이다. 주체하기 힘들어서 정계,관계,언론계에 마구 뿌려대는 독점이윤과, 혀를 내두를 정도의 과도한 다각화가 그 단적인 폐해들이다.

 

  그리고 재벌의 내부구조도 21세기를 지향하는 자기 자신의 첨단적 생산설비나 기술과는 전혀 걸맞지 않게, 선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19세기적 소유 및 경영구조를 온존시키고 있다. 소유경영주인 총수 1인이 전횡을 휘두르는 기업체제는 구멍가게나 잘 봐 주더라도 중소기업 정도까지만 그 합리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뿐 오늘의 대기업그룹에게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실제 그러한 체제의 모순은 이곳저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재벌회장이 멀쩡하게 일 잘하는 사원들과 막대한 기업자금을 선거판에 끌어들인 일이라든가 이번 경우처럼 정권과 더러운 불륜관계를 맺은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재벌과 국민경제 사이의 균형회복과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의 소유 및 경영의 민주화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이것은 재벌의 장점은 북돋아주면서 재벌의 단점은 솎아줌으로써 재벌을 거듭나게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선 공정거래법등 재벌의 불공정경쟁에 대한 통제장치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기업활동에 대한 불필요한 규제는 비록 완화하더라도 재벌의 갖가지 독점이윤 획득에 대해선 오히려 규제를 더 철저히 해야 한다. 그리고 재벌과의 상호견제를 위해서도 은행은 금융전업기업군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국민경제적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간주도 어쩌구 하면서 재벌 홀로 만만세의 세상으로 갈지도 모른다. 또 이때까지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깜짝 놀랄 정도의 중소기업 지원책이 필요하지 않을까싶다.

 

  한편 재벌 내부의 총수독재체제를 민주적 체제로 변화시키려면 재벌의 근대적 기업집단화(소위 일본식 재벌해체)라든가 금융기관부채의 주식화, 그리고 근로자 소유의 실질적 확대, 계열사의 독립성 대폭 신장 등 여러 종합적 방안을 통해 총수의 지위 및 역할의 축소가 모색되어야 한다. 그리고 경영민주화를 위해선 결국 서구와 같이 전문경영층의 지휘와 근로자의 경영참가를 중심으로 한 경영체제의 구축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금융기관이 이사로서 참여한다든가 같은 맥락에서 소액주주의 대표권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뇌물 비리와 같은 것을 저질렀을 때 경영자의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권의 강화도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감사제도의 실질화도 당연히 시행되어야 한다.

 

  경제의 선진화는 물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선진화를 위해선 넘어야 할 몇 개의 고비가 있고 그 고비에 우리는 맞부딪쳐 있다. 이제 우리 모두의 지혜를 짜내고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