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한국의 랠프 네이더는 필요없다 (2007/ 10/ 9)

동숭동지킴이 2011. 2. 23. 16:46

 

한국의 랠프 네이더는 필요없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민주노동당도 12월 대선을 향해 진군 중이다. 대선 득표율이 1997년의 1%에서 2002년엔 4%로 상승했고, 최근 조사한 한나라당-범여권-민노당 3자 가상대결에선 7% 전후의 지지가 드러나는 만큼 민노당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민노당의 이런 약진에 진보세력은 흐뭇해하는 한편 고민도 생긴다.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택한다면 마땅히 민노당후보지만 이는 사표가 아닌가. 아니 차라리 그냥 사표라면 괜찮은데 이 바람에 가장 보수적인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는 게 아닌가. 가장 진보적인 선택이 결과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선택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다.  

 

  권영길후보도 이런 딜레마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만사형통이라 하는데, 적어도 이번에 그가 당선될 수 없음은 누구나 안다. 물론 지금처럼 이명박씨가 계속 압도적 우위에 있다면 사정은 다르다. 그러나 선거는 결국 한나라당과 범여권(문국현씨 포함)의 박빙 승부가 될 공산이 크다. 이럴 때 민노당은 어찌 해야 하나.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 등을 조건으로 진보세력 단일화를 내비치기도 하지만, 이는 범여권후보와 단일화하라는 압력을 피하려는 ‘알리바이 만들기’가 아닐까.  

 

  진보세력 일각에선 더 이상 ‘비판적 지지’는 없다고 한다. 노무현정권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서 하는 이야기이리라.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중도우파 정권에 기대가 너무 컸던 측에게도 문제가 있다. 노정권은 보수적인 언론계-재계-관료-미국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런 제약조건을 정권측은 과대평가하고 진보세력은 과소평가한다. 또 노정권에 실망했다고 이회창씨가 당선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따지고 보면 ‘비판적 지지’라는 용어에도 문제가 있다. 신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지지는 맹목적 지지일 수 없고 따라서 모두 비판적 지지다. ‘상대적 지지’가 정확한 용어다. 인물이나 정당에는 이념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거기서 더 진보적인 쪽이 있는가 하면 더 보수적인 쪽이 있다. 진보적 입장이라면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쪽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우리 현실에서는 진보를 원한다면 한나라당보다는 범여권을, 범여권보다는 민노당을 지지하게 된다. 다만 문제는 선거라는 특정한 정치국면에서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야 하는가, 아니면 당선 가능한 후보 중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야 하는가이다. 사실 무조건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야 한다면 사회당 후보가 해당된다.  

 

  원래 비판적 지지는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씨에 대한 지지를 지칭했다. 그가 100%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김영삼씨보다는 민중 편에 더 가까우니 비판하면서도 지지투표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민중을 분열시키고 군부세력의 집권을 연장시키고 말았다. 요즘 비판적 지지론에 대한 비판이 사실은 보수파의 집권을 도와준 과거 비판적 지지론의 오류를 반복할 위험성이 있는 셈이다.  

 

  만약에 김대중씨나 그를 지지한 진보세력이 정말로 민중의 이익을 생각했다면 김영삼씨에게 양보해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군사정권 종식을 이룩했어야 한다. 두 여자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툰 솔로몬의 재판에서 칼로 아이를 잘라서 반씩 가지라는 판결에 진짜엄마가 양보했다. 마찬가지로 더 진보적인 후보라면 바로 그 때문에 자기보다 보수적이지만 군부후보보다는 진보적인 후보에 양보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세력보다 더 중요한 게 민중이기 때문이고, 그게 솔로몬의 재판에서 보듯이 결국 아이를 되찾는 즉 민중의 지지를 얻는 길이다.  

 

  이는 바로 민노당을 둘러싼 오늘의 상황에도 해당된다. 노정권의 실책으로 범여권이나 한나라당이나 “그놈이 그놈이다” “똑같이 시장만능주의세력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오히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권후보는 범여권과 한나라당의 차이는 샛강이고 민노당과 범여권의 차이는 한강이라 했다. 정치세력들 사이에 크든 작든 차이가 존재함을 인정한 셈이다.  

 

  민중에게는 샛강만큼의 차이도 중요하다. 노선차이가 우리보다 작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이 맞붙었던 경우를 생각해보자. 2000년 대선에서 우리의 민노당 격인 진보파 후보 랠프 네이더는 민주당이나 공화당은 그놈이 그놈이라며 선거를 끌고나가 부시의 당선에 한몫했다. 그 결과 대량학살의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고 부자의 세금은 줄고 서민의 복지는 악화됐다. 이런 게 과연 별거 아닌 차이일까.  

 

  미국의 대표적 진보파 영화감독인 마이클 무어는 이를 막고자 네이더의 양보를 받아내려고 애썼다. 또 민주당에 대해 평소에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표적 진보파 지성인 노암 촘스키도 민주당과 공화당이 박빙인 주에선 진보세력이 네이더가 아니라 고어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왜 그랬는지 우리 진보세력도 새겨봐야 한다.  

 

  어정쩡한 시장만능주의 세력보다는 확실한 시장만능주의 세력이 집권해야 민중이 시장만능주의를 제대로 느끼게 될 테니까 한나라당의 집권이 의미 있다는 주장도 있다. 혁명을 위해선 민중에게 참말로 뜨거운 맛을 보여야 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군사독재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건 어떤가. 민중의 삶과 유리된 지식인이나 정치세력의 불장난에 맞장구칠 수는 없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에 대해 그놈이 그놈이라고 격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나치스의 집권에 한몫했음을 기억하자.  

 

  올바른 길은 범여권이 단일화한 다음 민노당이 범여권과 후보단일화하는 것이다. 여론조사로 단일화하는 것은 민노당이 주장하는 결선투표 절차에 상응한다. 여론조사로 민심 즉 당의 지지율을 확인해놓고서 굳이 투표로 다시 확인해야 하는가. 단일화하지 않고 투표까지 가서 가장 보수적인 후보를 당선시킨다면 이는 자식이 떡을 훔쳐 먹었다는 비난을 들은 사무라이가 그렇지 않음을 확인시키려고 무고한 자식의 배를 가른 어리석은 행위와 매일반이다.  

 

  그리고 민노당의 후보단일화 추구는 자신에게 결코 손해되는 일이 아니다. 네이더는 2000년에 부시의 집권에 한몫함으로써 자기 지지기반을 크게 위축시켰다. 2004년의 득표가 2000년의 290만표에서 50만표로 급감한 것이다. 만약에 민노당의 득표가 한나라당 집권에 한몫한다면 마찬가지 운명에 처할 공산이 크다. 이를 피해야 한다. 나아가 범여권과의 단일화협상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 정원을 늘리는 선거법개정에 합의하고 일부 장관자리도 얻어낸다면 민노당의 입지가 확대되는 게 아닌가.  

 

  물론 협상엔 상대가 있고 범여권세력이 후보단일화에 소극적일 수 있다. 그러나 민노당이 나름의 비전과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최대한 늘린 다음 주도적으로 단일화에 나서면 노무현이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주도해 지지를 얻었듯이 민중의 지지를 대폭 확대할 수 있다. 양념정당에서 집권정당을 지향하려면 이런 유연한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반대로 민노당이 경직된 자세로 단일화를 거부할 가능성도 크다. 그러면 진보를 원하는 사람들은, 당선 가능한 후보 중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후보에 표를 몰아주어야 한다. 그게 민중의 삶을 한걸음이라도 전진시키는 길이다. 중요한 것은 당파가 아니라 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