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IMF사태 10년, 6월 항쟁 20주년, 경제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 (2007/ 9)

동숭동지킴이 2011. 2. 23. 16:44

 

IMF사태 10년, 6월 항쟁 20주년, 경제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19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우리는 개발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왔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로서 우리 정도의 수준에 이른 경우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답답한 부분도 없지 않다. 한반도 남쪽은 민주화를 수행했지만 한반도 북쪽은 여전히 독재체제 하에서 신음하고 있고 헐벗고 굶주린 상태다. 또 한반도 남쪽도 1987년 이후 심각한 갈등 속에 아직 성숙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대중의 경제적 삶은 한동안 개선되다가 1997년 IMF사태를 맞아 각박해졌다.  

 

  이런 걸 가지고 흔히 사람들은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화는 달성되었는데,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오히려 후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퇴했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다. 6월 항쟁 이전과 비교하면 노동자의 실질임금도 2배 이상 상승했으며,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엔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는 명찰도 달랐고 밥 먹는 식당도 다른 경우가 많았다. 6월 항쟁 덕으로 큰 흐름에서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인격적 차별이 크게 완화되었음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일자리에서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의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사실이다. 사무직과 생산직의 차별 대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었다. 게다가 비정규직 문제는 중소기업 노동자 문제와 뒤엉켜 있다. 그리고 실업률은 낮은 반면에 낮은 소득의 영세자영업자가 취업자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생활면에선 부동산과 교육 문제가 서민대중을 압박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뒤쳐진 데는 보편적 요인과 특수적 요인이 작용하였다. 보편적으로는 오늘날 세상이 정보화와 세계화가 급진전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이는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OECD 국가 대부분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리고 한국 특수적으로는 10년 전 IMF사태를 겪으면서 사회경제적 삶이 더욱 각박해졌다. 여기다 10년 동안의 민주정부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시행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성장률만 올라가면 자동적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성장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은 우리 경제가 1960-1970년대엔 8% 정도의 고성장을 달성하다가 지금은 5% 정도이니 큰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요즘의 중국처럼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시기로서 오늘날처럼 경제가 성숙된 시기와 막바로 비교할 수 없다. 보수언론들이 흔히 우리와 성장률을 비교하는 나라들은 대개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성장률이 상당 기간 동안 계속해서 5%를 초과한 것은 아일랜드나 싱가포르와 같은 소국이면서 특수한 조건에 놓였던 경우뿐이다. 자본의 성숙으로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 힘들며, 노동의 성숙으로 고령인구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고성장을 운운하는 것은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초등학생 때처럼 키가 크기를 바라는 일이다. 게다가 1980년대 이후 미국은 유럽의 상당수 국가보다는 성장률이 높지만 분배 상태는 선진국 중에선 최악이다. 성장률이 높아진다고 분배가 좋아지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우리 사회는 6월 항쟁을 통해 과거의 개발독재로부터 ‘독재’가 허물어지고 IMF사태를 거치면서 개발독재로부터 ‘개발’ 체제가 허물어지는 상황이다. 이는 우리의 현재 상황이 개발독재로부터 선진국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임을 의미한다. 그런 과도기에 IMF사태라는 공황이 덮쳐서 사태를 어렵게 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과제가 선진화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진과 퇴보도 하면서 우리 나름의 선진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인 셈이다.  

  다만 선진사회는 단 하나의 유형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장-효율성-경쟁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는 영미형과 민주주의-공정성-연대를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는 북유럽형으로 양 극단이 갈리고 그 사이에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 각 세력 사이의 갈등도 따지고 보면 어떤 유형의 선진화로 나아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선진국 중에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는 덴마크다. 성장률은 미국보다 높고 실업률은 미국보다 낮은 것이다. 이 나라에선 고용조정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신에 실업자에 대한 복지가 충실하고 또 재교육 훈련이 철저하다. 이렇게 되면 한편으로 자본과 노동이 유연하게 움직여 시장의 효율성이 보장되고 다른 한편으론 삶의 안정성도 보장된다. 청년실업문제도 크게 완화된다.  

 

  이런 선진국을 지향하면서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첫째로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따져봐야 한다. 우리에게서 시장소득의 분배와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이다. 이를 해결하는 열쇠는 임금체계를 햇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연공급에서 직무직능급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정규직을 남용하거나 부당하게 차별하는 일이 줄어들 수 있다. 동시에 이런 임금체계가 되면 회사의 퇴직연령이 높아지고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말도 사라진다. 아울러 회사 조기퇴직자가 영세자영업에 몰려드는 현상을 시정할 수 있다.  

 

  둘째로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비록 불평등하더라도 세금이나 복지지출이라는 재분배를 통해 이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실질적 임금격차를 축소하는 길이다. 아울러 복지지출을 통해 주거와 교육, 의료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서민대중이 생활상에서 느끼는 압박을 완화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당면한 문제를 하나하나 극복해감으로써 높은 수준의 경제민주화를 이룩한 우리 나름의 선진사회에 이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