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덫’에서 벗어나자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도청게이트에선 고구마줄기처럼 자꾸만 뭔가 파헤쳐지고 있다. 그런데 관련된 삼성게이트 조사는 이제야 겨우 삼성비서실장을 소환할 모양이다. 게다가 그 조사도 적당히 시늉만 내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한물간 권력과 살아 펄펄뛰는 권력을 검찰이 차별하는 것일까. 그러나 범죄를 다스리는 검찰에까지 뇌물을 마구 뿌리고, 언론사사장을 현금박스 나르는 조폭똘마니 신세로 전락시키고, 사회지도층을 총체적으로 오염시키는 삼성의 행태를 언제까지 참아줘야 하겠는가.
이번 녹취록에선 정치권압력 탓에 어쩔 수 없이 뇌물을 바쳤다는 변명이 거짓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삼성은 경제부총리 선임에 힘깨나 쓰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입맛에 맞는 인물이 뽑히도록 발 벗고 나서지 않았던가. 사실 예전엔 정부정책에 재벌이 편승해 특혜와 뇌물을 주고받는 ‘정부우위의 정경유착’이 행해졌다면, 근년엔 재벌이 정부의 정책과 인사에 적극 개입하는 ‘재벌우위의 정경유착’이 구축되고 있다. 최근엔 재벌 중에서도 삼성이 독주하는 형국이므로 권력이 삼성에 넘어갔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수구권력의 한 축인 조선일보에겐 일전불사를 외친 대통령조차 또 다른 수구권력인 삼성의 횡포에 대해선 맥을 못 춘다. 여기선 도대체 ‘노무현다움’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삼성의 대변인이 아닌가싶은 금융감독위원장 같은 인물들을 중용하고 삼성을 바로잡으려는 인사들은 배척하는 게 아닌가. 삼성이 조선일보보다 더 세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삼성이 국가경제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주눅 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삼성의 공헌은 수많은 일반직원 덕분이고, 삼성의 횡포는 총수와 가신이 저지르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일례로 회사재산을 빼돌리는 등 불법과 탈법으로 30대의 삼성 3세 총수가 세금을 고작 16억원만 내고 수조원의 재산을 불린 현실을 보라. 또 총수의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려고 납치나 유령노조 같은 어이없는 수법들을 동원하고 있지 않은가. 금융 관련법을 위반하고 공정거래법에 대해 위헌소송을 낸 것도 총수의 황제적 경영권을 굳히기 위해서다. 각계각층에 대한 지배력 확장도 총수와 가신의 이런 무리수를 관철시키려는 뜻이 강하다. 열심히 일하는 삼성직원은 괜히 덤터기쓰는 셈이다.
삼성 문제를 시정하자는 것이 ‘삼성 죽이기’는 결코 아니다. 삼성은 나라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도 삼성의 횡포는 사라져야 한다. 1990년 중반에 삼성이 잘 나가서 오만해져서, 총수와 가신 멋대로 사업을 벌이면서 위기를 맞아 나중에 그룹직원을 3분의 1이나 쫓아냈던 과거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우선 삼성 스스로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총수가 책임지고 이때까지의 과오를 참회함과 동시에 빼돌린 회사재산을 반납하고 황제경영을 탈피해야 한다. 삼성생명의 계열분리를 통해 재벌개혁에 동참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나아가 더 중요한 것은 ‘삼성의 덫’에 걸렸던 정계, 관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가 대오각성하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 삼성에 대한 민주적 견제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특히 검찰은 삼성게이트를 엄정하게 처리해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야 한다.
군사독재에 비해 삼성독재는 덜 폭력적이다. 하지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긴 마찬가지다. 현재 삼성의 위치는 소인국의 걸리버와 같다. 다른 소인국과의 싸움에선 큰 도움이 되지만 걸리버가 술에 취하거나 나쁜 마음먹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삼성이 술 취하지 않게 하는 게 재벌개혁을 통한 시장경제의 정상화고, 삼성이 나쁜 마음먹지 않게 하는 게 부패청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견제력 회복이다. 재벌개혁과 민주화에 다시금 박차를 가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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