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재벌기업과 재벌총수 (『역사비평』2005년 겨울호 게재)

동숭동지킴이 2011. 2. 17. 15:53

 

(『역사비평』2005년 겨울호 게재)

 

<재벌기업과 재벌총수>

 

김기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우리나라에서 재벌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흔히 “나도 재벌이 되고 싶다”라고 할 때에는 그냥 ‘큰 부자’를 뜻한다. 그리고 삼성과 같은 복합거대기업도 재벌이라 부르며, 이건희씨와 같은 그런 기업그룹의 총수도 재벌이라 칭한다. 재벌이란 용어의 이러한 다의성(多義性)은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재벌개혁 정책의 수립까지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재벌개혁에서는 총수의 문제와 기업의 문제 중 어느 쪽에 역점을 두어야 할지를 잘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맡기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공자가 ‘必也正名’이라고 한 것이(논어 子路편) 바로 이 경우에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사전은 재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국어대사전(금성판)에서는 첫째로, 「재계에서 세력 있는 자본가․기업가의 무리. 또는, 정부의 지원 아래 성장한 가족․혈족 지배의 대규모 기업집단.」이라는 정의와 둘째로, 경제학적으로는 ‘콘체른’이라는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일본의 사전(廣辭苑)에서는「거대한 독점적 자본가․기업가의 一團으로 一族․一門으로 이루어진 것. 2차대전 이전의 三井(미쓰이)․三菱(미쓰비시)․住友(스미토모)․安田(야스다) 등.」이라는 정의와 ‘콘체른의 동의어’라는 두 개의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콘체른(Konzern)이란 독일에서 발전한 독점자본의 한 형태로 영어의 conglomerate와 같이 여러 업종을 영위하는 복합그룹을 의미한다.

 

  한국사전이든 일본사전이든 총수와 기업그룹의 의미 둘 다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재벌이란 용어의 발상지인 일본에선 실제로 이 용어가 어떻게 쓰여 왔는가. 재벌(財閥: 영어로는 Zaibatsu로 표기함)이란 용어의 첫 출현은 20세기 초 山路愛山이라는 사람이『日本金權史』라는 책에서 정상(政商)이나 재벌을 들먹인 것이라고 한다. 원래 재벌의 벌(閥)은 군벌(軍閥), 학벌(學閥)에서처럼 패거리(일당)를 뜻했고, 재벌은 출신지가 같은 자본가 패거리를 지칭했다. 그러다 이 용어가 1920년대에 저널리즘에 자리 잡아 가고, 나아가 高橋龜吉과 같은 이가 일본경제를 논하려면 재벌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점차 일본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게끔 되었다.

 

  이리하여 저널리즘이나 일반인이 ‘대부호(大富豪)’를 총칭하여 사용하던 것을 경제사나 경영사와 같은 학문 분야에서도 받아들이게 된 셈인데, 학계의 용어사용법은 일반과 다소 달랐다. 일본학계에서 재벌에 대한 정의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로, 森川英正은 「부호인 가족․ 동족의 봉쇄적인 소유․지배 하에 성립하는 다각적 사업경영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둘째로, 安岡重明은「재벌이란 가족 또는 동족이 출자한 모(母)회사(지주회사)가 중핵을 이루고, 모회사가 지배하는 기업들(자회사)이 여러 산업을 경영하는 기업집단으로서, 대규모 자회사는 각각의 산업부문에서 과점적인 지위를 점한다.」고 하였다. 石井寬治는 같은 취지에서「동족 지배 하에 있는 독점적 지위를 갖는 다각적 사업경영」이라고 간명하게 표현하였다. 셋째로, 中川敬一郞은「가족이라는 본능적 군거(群居)집단의 양태가 사회조직의 기본원리가 되어 있는 전통사회가 선진공업국과의 국제경쟁 속에 강력한 공업화를 급속히 추진하려는 경우에, 그 후진국적 공업화의 경제주체로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다각적인 기업집단이 재벌」이라고 하였다.

 

  森川英正의 정의는 국민경제에서 독점력을 갖지 않는 지방재벌까지 포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安岡重明과 石井寬治의 정의는 재벌이 일본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데 주목하여 독과점적인 지위를 구성요소로 포함하였다. 그리고 中川敬一郞은 선진국과는 달리 왜 일본에서 재벌이 이슈가 되었는가 하는 비교사적 관점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렇게 셋은 각기 강조하는 바가 다르지만, 어쨌든 재벌을 단순한 대부호나 그룹총수가 아니라 기업그룹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점에선 동일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우리는 재벌(영어로는 Chaebol 또는 Jaebeol로 표기함)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먼저 이 용어를 꼭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따져보자. 군벌이나 학벌과 마찬가지로 재벌도 다소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재계는 이 용어의 사용을 기피한다. 정부도 그 영향을 받아 공정거래법 등에선 재벌 대신에 ‘기업집단’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넓게 보면 재벌도 기업집단의 한 형태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를 보면 재벌과 기업집단은 그 지칭대상이 엄연히 다르다. 2차대전 이후 맥아더 사령부에 의한 재벌해체를 통해 재벌은 가족․동족의 지배체제가 사라진 기업그룹인 기업집단으로 바뀌었다. 한때 일각에서 이 기업집단에 대해 재벌의 부활이라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들 2차대전 이전의 재벌과 2차대전 이후의 기업집단을 엄격히 구분한다. 이런 일본학계의 논의과정을 존중하고 또 가족지배의 유무를 중요시한다면, 우리도 현재 한국의 기업그룹에 대해 재벌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재벌의 정의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물론 우리가 맹목적으로 일본을 추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재벌이라는 용어의 발상지는 일본이다. 그리고 일본의 재벌과 한국의 재벌이 100% 똑같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동일하다. 따라서 우리의 재벌도 일본 학계의 정의에 근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 재벌은 일단 ‘큰 부자’라든가 ‘재벌총수’보다는 ‘재벌기업’을 지칭하는 쪽으로 통일해야 마땅하다. 재벌총수는 그냥 재벌이라 하지 말고 재벌‘총수’라 불러서 혼란을 피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만약 이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업을 의미할 때는 재벌기업, 총수를 의미할 때는 재벌총수라고 분명히 써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편 일본의 세 정의 중 ‘가족․동족의 봉쇄적 소유’는 우리 재벌의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일본도 재벌이 발전하면서 점차 그런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우리 재벌도 오래 전부터 가족․동족 이외의 주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재벌은 安岡重明 등의 정의에 따라「가족의 지배․경영 +다각화된 독점」체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재벌 내부적으로는 가족의 지배․경영이라는 요소, 재벌 외부적으로는 다각화된 독점 즉 나라경제에 커다란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요소 둘을 모두 갖추어야 재벌이라 칭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또 가족의 지배․경영이 극단적으로 진행된 형태를 속칭 ‘황제경영’, 다각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된 형태를 속칭 ‘선단문어발경영’이라고 한다. 나아가 中川敬一郞의 관점도 존중하여 재벌은 압축적 공업화를 추진한 후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점을 부가할 수도 있겠다. 4대재벌이니 30대 재벌이니 하는 것들이 다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 재벌은 현재 가족이 지배권을 보유함(지배주주임)과 동시에 경영일선에도 나서고 있다. 장차 총수가족이 지배권만 보유하고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게 된다면 그 때에도 이들을 계속 재벌이라고 칭해야 할까. 이렇게 되면 사실상 선진적인 대기업으로 탈바꿈한 셈인데, 후진적인 기업이라는 냄새가 풍기는 재벌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할 것인가 애매하다. 이에 대해 선진국 학자들 사이에도 가족‘지배’의 존속에 초점을 맞추어 ‘family business’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고, 가족‘경영’의 탈피에 초점을 맞추어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음으로 재벌의 정의와 관련된 몇 가지 오해나 혼란에 대해 살펴보자. 가끔 재벌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재벌은 2차대전 일본에도 존재했고, 오늘날의 다른 후진국 예컨대 인도나 태국 등에도 존재한다. 재벌이란 게 후진국의 압축적 공업화, 특히 정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공업화 노력과 관련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구미 선진국에서도 로스차일드(Rothschild)와 같은 식으로 재벌기업이 한 때 존재하였다. 다만 이들은 후진국에서처럼 국민경제를 지배할 정도는 아니었고, 또 오랜 자본주의발전 과정에서 가족적 지배․경영의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에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미국의 GE도 한국의 재벌처럼 다각화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GE는 가족적 지배․경영이 존재하지 않는 전문경영인기업이다. 오늘날 선진국에도 스웨덴의 발레베리(Wallenberg) 그룹처럼 아직 가족의 영향력이 대를 이어 관철되는 복합그룹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는 예외적 존재다. 게다가 이 역시 가족‘경영’은 상당 정도 탈피했기 때문에 재벌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요컨대 재벌은 괴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구불변하는 조직도 아니라 기업발전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기업시스템인 셈이다.

 

  그리고 재벌을 일반인들이 재벌기업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재벌총수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 결과 우리 사회에서는 ‘재벌총수 = 재벌기업’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이건희씨가 곧 삼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짐이 곧 국가다.」라는 왕조적 발상이다. 사실 재벌이란 게 최고경영자의 세습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일종의 왕조체제이기 때문에 이런 발상이 나오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다. 또 재벌총수와 재벌기업은 서로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나 재벌총수는 기업조직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아가 재벌기업은 그 소유가 일반인에게 확산되어 총수의 지분은 10%에도 못 미치게 되었고,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빚도 많이 지고 있으며, 수많은 직원이 그 속에 일하고 있는 사실상의 국민기업이다. 이를 재벌총수의 개인 사유물로 취급하고 있는 데서 삼성총수 3세의 재산증식 과정에서 회사재산을 멋대로 빼돌리는 일과 같은 재벌의 갖가지 비리가 싹트는 것이다.

 

  우리나라 재벌 발전의 초기에는 ‘재벌총수의 이익 ≒ 재벌기업의 이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기업재산이 대체로 총수재산이었고, 총수가 곧 전문경영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를 지나면서 재벌총수의 상대적 지분이 줄어들고, 총수가 2세나 3세로 바뀌면서 이러한 등식관계가 변화하였다. 총수가 기업재산을 빼돌리는 ‘부패’의 문제와 검증받지 않은 2세와 3세 재벌총수의 ‘무능’이라는 재벌체제의 근본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즉 {재벌총수의 이익 ≠ 재벌기업의 이익}이 된 셈이다. 그런데 수구세력들은 재벌총수를 재벌기업과 동일시함으로써 재벌총수의 부패와 무능의 문제를 은폐하려고 한다. 또 이런 부패와 무능에 대한 분노, 말하자면 ‘반기업인(반총수) 정서’를 마치 ‘반기업 정서’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문제는 ‘일반국민의 반기업인 정서’가 아니라 ‘재벌총수의 반기업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재벌개혁이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재벌 죽이기’나 ‘재벌 혼내주기’인 게 아니라 ‘재벌 거듭나기’다. 재벌총수의 부패와 무능의 문제를 바로잡아 재벌기업을 선진적 대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선진적 대기업이란 경영의 투명성․책임성․전문성을 갖춘 대기업이다. 이는 경영을 불투명하게 하여 회사재산을 개인재산처럼 멋대로 빼돌리고, 총수는 부패와 무능을 저질러도 별다른 책임도 지지 않고, 단지 총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영능력의 검증도 받지 않고 최고경영자의 지위를 물려받는 재벌체제를 탈피한 기업이다. 물론 엔론 사태 등에서 보듯이 선진국의 기업도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재벌처럼 부패와 무능의 문제가 구조화되어 있고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 재벌이 선진대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출발점은 재벌총수와 재벌기업을 분별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재벌에 대한 정의부터 올바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