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지 2005년 6월호>
외국자본이냐 재벌이냐의 잘못된 2분법에서 벗어나라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근년에 들어와 외국자본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학계는 물론이고 재계와 언론계도 목청을 드높인다. 그에 따라 정부와 국회는 외국자본에 관한 각종 법령을 재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의 논의들은 차분한 분석을 펼치기보다는 감정에 치우치거나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논의의 이런 혼란은 당분간 불가피하기는 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불과 몇 년 사이에 외국자본이 대거 몰려온 미증유의 상황을 맞아 어찌 정신이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주식시장을 보라. 외국인보유 비중이 1996년의 13%에서 42%로 급증하였다. 특히 삼성전자, 포항제철 등 우량기업에 대한 외국인보유 비중은 50%를 넘어섰다.
그리고 은행 등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인의 영향력도 증대되어 은행의 22%, 증권사의 24%, 생명보험사의 17% 정도를 외국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금융업을 비롯해 제조업, 유통업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 총액은 신고 기준으로 1000억 달러를 돌파했는데, 그 80% 이상이 1998년 이후 들어왔다. 나아가 외국자본은 부동산에까지 손을 뻗쳐 국내 대형오피스빌딩의 17%를 소유하고 있다.
외자유입이 이처럼 급증한 것은 글로벌화라는 시대적 흐름의 소산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IMF사태 후 우리 정부가 외자에 대한 빗장을 확 풀고, 구조조정으로 인한 매물이 쏟아져 나오고, 주식이나 기업 자체의 가격이 폭락하고, 외자유치에 다들 혈안이 되었다는 우리의 특수상황도 작용하였다.
이러한 외자유입을 바라보는 시각은 단순화하자면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가 “외국자본이나 한국자본이나 모두「자본」이므로 악이다”는 급진혁명주의자의 자본성악설이다. 둘째가 “외국자본이나 한국자본이나 모두「자본」이므로 선이다”는 시장만능주의자의 자본성선설이다. 셋째론 “외국자본은「외국」자본이므로 한국자본에 비해 좋다”는 외국자본 우상숭배론이 있고, 넷째론 “외국자본은「외국」자본이므로 한국자본에 비해 나쁘다”는 외국자본 마녀사냥론이 있다. 그리고 다섯째로 “외국자본에게나 한국자본에게나 긍정적 효과를 최대화하고 부정적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일정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외국자본에 대한 시각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하였다. IMF사태 후 한동안은 달러부족의 타개와 개혁원군의 확보라는 의도에서 외국자본 우상숭배론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달러가 넘치고, 외국자본의 수익취득이 대서특필되고, 재벌체제에 대한 외국자본의 견제가 나타나자 외국자본 마녀사냥론이 급부상하였다. 그리하여 우상숭배론이 아직 남아 있으면서 마녀사냥론이 각광을 받는 ‘외국자본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열증’이 각계각층에 광범하게 전염된 상태다.
물론 외국자본에 대한 시각의 혼란은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인간이란 원래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외국인혐오증(xenophobia)도 발생한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도 일본자본에 대한 공포가 휩쓴 적이 있고,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다만 대세는 외국자본에 대해 우호적이다. 목숨 걸고 반제투쟁을 벌였던 중국이나 베트남조차 적극적 외자유치를 통해 고도성장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외국자본에 대해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외자가 성장을 위한 투자자금을 공급해주고, 선진적 기술과 경영기법을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자와 관련해 아무 문제도 없지는 않다. 첫째로,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선 간이고 쓸개도 다 내줘야 한다면서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 즉 노동권을 억압하고 환경을 훼손할 수 있는 것이다. IMF사태 후 파업이 외자유치를 저해한다면서 한때 노동운동에 초강경 대응한 게 그런 사례다. 그리고 인도 보팔의 독가스 누출사고는 부적절한 외자유치가 환경파괴, 생명파괴를 초래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경우다.
둘째로, 외자유치와 관련해 정책의 자율성이 침해받을 수 있다. 예컨대 과거 중남미에 진출한 미국회사는 군사쿠데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미국은 한미투자협정 체결조건으로 스크린쿼터 폐지를 요구해왔다. 그리고 주요 금융기관을 함부로 외국에 넘기면 정부의 운신의 폭이 제약당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전화사업을 외자가 인수한 결과 전화요금이 세계최고로 비싸진 사례는 공기업 해외매각의 위험성을 드러낸다.
셋째로, 우리경제에 기여한 몫보다 더 많은 수익을 챙기는 외국자본이 있다. 국부유출 논란이 일어나는 곳은 바로 여기다. 우선 IMF사태 직후 주가폭락 시에 대거 유입된 외국자본은 주가회복과 더불어 수십조 원의 평가차익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진로에서처럼 부도난 기업채권을 헐값에 인수했다가 커다란 이익을 거두기도 했다. 제일은행이나 스타타워빌딩에서처럼 부실기업 자체나 부동산의 헐값 논란도 있었다. 게다가 엄청난 이익을 거두고도 이중과세 방지협정을 빌미로 국내에선 세금 한 푼 안낸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분통을 터트린다.
다만 주식의 시세차익은 외국인뿐만 한국인도 챙겼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진로의 경우에 골드만삭스가 진로에 대한 컨설팅을 통해 획득한 내부정보를 이용해 채권을 대량 매집했다는 점 이외엔 오히려 우리 측에 문제점이 있지 않나 싶다. 채권을 판 우리 금융기관이 제 값을 받으려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의문인 것이다. 제일은행 매각에서도 우리 정부의 매각독촉이 협상을 불리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자본이 경제에 얼마나 기여했나를 따지는 일은 본시 대단히 힘들다. 그리고 외자는 주식시장을 되살리고, 인수한 기업의 경영을 개선하고, 관치금융의 해독작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자가 과도하게 챙겨가는 폐해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개방과 구조조정의 수업료를 너무 비싸게 치렀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상의 폐해가 실재하는 것인데 반해, 외국자본의 폐해에 관한 부당한 오해도 적지 않다. 첫째로, 외자의 고배당 요구로 인해 기업투자가 줄어들고, 이것이 경기침체를 초래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나 대한상의와 같은 재계뿐만 아니라 장하준 교수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퍼트렸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여러 연구에 의해 외국인 소유지분과 배당성향(배당금/당기순이익)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에선 외국인지분이 고배당을 유발하는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있지만, 이는 통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실제 IMF사태가 수습된 후에는 경영이 안정되고 기업의 경영투명성이 향상되면서 배당에 대한 압력이 오히려 감소되었다.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배당성향 추이를 보면 1970년대가 41.3%, 1980년대가 28.7%였다. 그리고 1993년 이후의 수치는 <표 1>과 같다. 여기서 어떻게 IMF사태 이후의 외국인지분 증대가 고배당을 초래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표 1> 상장기업 배당성향 추이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2002 |
2003 |
42.5% |
26.9% |
22.0% |
61.0% |
- |
- |
19.2% |
25.7% |
63.0% |
20.5% |
35.2% |
참고: 1997년과 1998년엔 전체 당기순이익이 마이너스였음.
또 고배당을 실시한 기업들 대개가 외국인지분이 아주 낮은 기업이며 외국인 비중이 50%를 넘는 삼성전자나 현대차의 배당성향은 평균치에도 미달한다. 물론 외국인에 대한 배당금 총액은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이는 외국인지분이 늘어나고 기업수익성이 개선된 당연한 결과다. 2003년 외국인의 지분비중은 40.1%인데 배당금 비중은 37.4%다. 따라서 “외국인이 배당금으로 수조 원이나 가져간다”고 대서특필해 사람을 현혹시키는 따위의 유치한 작태는 중단해야 한다.
둘째로 제기되는 외자의 폐해가 경영권 위협론이다. 소버린이 (주)SK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외국인이 알토란 같은 우리 기업을 탈취하려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특히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는 삼성전자를 외국인이 뺏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삼성의 사주를 받은 언론이 광범하게 유포하였다. 또 경영권방어를 위해 기업들이 자사주를 잔뜩 보유한 탓에 투자가 위축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요즘 와서 외국자본이 재벌의 황제경영을 다소 견제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경영진을 직접 만나 의견을 제시하거나, 소버린의 경우처럼 불법을 저지른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고 표 대결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외자의 이러한 행동은 투자자로서 당연한 것이고, 문제는 그 동안 아무 발언도 못했던 우리 투자자 측에 있다. 이런 견제행동이 바로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재계는 마치 황제의 수염이라도 건드린 것처럼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전자의 경우에 외국자본에 의한 경영권 탈취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것은 외국인 대주주들이 경영권을 노리는 뉴브리지와 같은 구조조정펀드가 아니고, 시차임기제를 적용하고 있어서 한번의 주주총회에서는 일부 이사밖에 교체할 수 없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물론 극단적으로 경영진이 회사 돈을 엄청나게 빼돌리는 등 경영을 엉망진창으로 하는 경우엔 외국인뿐만 아니라 국내투자자까지 총 단결하여 경영진 축출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배척할 사안이 아니라 장려해야 하지 않는가.
다만 경영권 시장이 극도로 불안해 경영진이 거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면 기업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이는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경영의 안정성은 경영의 책임성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 독립적 사외이사가 적절한 견제를 하고, 무능 부패한 경영진을 기업이 망하기 전에 교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영의 책임성 구축이다. 그런데도 재계는 경영의 책임성은 무시한 채 경영의 안정성만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사주보유 때문에 투자가 위축된다는 이야기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일부 대기업에서 경영권을 공고히 하려고 자사주를 보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투자가 위축된다는 것은 논리비약이다. 왜냐하면 대기업들의 재무구조가 크게 개선되어 부채비율이 100% 수준이고 이자율도 낮으므로, 투자할 마음이 있으면 자사주보유와 무관하게 얼마든지 돈을 빌려 투자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외국인주주의 증가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이는 영미에서와 같이 투자를 위축시키고 노동자를 희생시킨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런 주장에선 그 대안으로 재벌체제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낸다. 그런데 IMF사태 후 기업들이 전보다 수익성에 신경을 더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도나 구조조정이라는 호된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비정규직 증대의 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재의 한국을 주주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과거에 무시하던 일반주주의 이익을 조금 배려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주주자본주의라고 한다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의 이익을 고려하게 된 사실을 가지고 우리 자본주의를 노동자 자본주의라 일컬어야 마땅하다. 수익성에 신경 쓰는 일은 지배주주인 총수의 수익성을 중시하는 것이고, 총수가 정처 없이 해외를 방황하는 따위의 불상사를 피하고자 함이다. 의사결정이나 이익배분을 보면 총수가 여전히 결정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기본적으로 총수자본주의다. 과거보다는 노동자, 일반주주, 지역주민의 발언권이 다소 강화되었으나 특별히 일반주주 쪽만 강해진 게 아니다.
넷째로, 재계나 장하준 교수 등은 외국자본 때문에 우리 투자가 위축되었다고도 한다. 실제 그런가. 설비투자의 ‘증가율’은 최근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1992년과 1993년에도 마찬가지로 낮았다. 따라서 최근의 낮은 증가율이 경기 탓인지 외국자본 탓인지 좀더 깊이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표 2>에서 보듯이 최근의 설비투자 부진은 중소기업의 투자부진에 기인한 것이다. 즉 외국인의 주식보유가 집중된 대기업에서 외국인 때문에 설비투자가 감소한 게 아닌 것이다. 설비투자의 경우도 전체 수준보다는 양극화가 문제인 셈이다.
<표 2> 최근 기업규모별 설비증감률 추이
|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대기업 중소기업 |
39.2 13.7 |
△13.3 △0.2 |
△3.4 44.0 |
27.4 △3.4 |
45.9 3.8 |
한편, 외국인지분증대가 설비투자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가 주장하고 있지만, 그 연구 스스로 통계적 유의성이 부족하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게다가 그 영향력도 외국인지분이 1% 포인트 증가하면 고정자산 ‘증가율’이 0.1% 포인트 감소한다는 미미한 정도다. 외국인지분이 설비투자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LG경제연구원의 조사도 있다.
그리고 IMF사태 이후의 국내투자율이 1990년대 중반에 비해 5% 포인트 이상 저하한 사실을 가지고 IMF사태 이후 외국자본이 들어오면서 투자율이 위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1999년 이후 2004년까지의 투자율은 30% 정도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1970년대 전반이나 1980년대 전반과 비교하면 요즘의 이런 투자율은 그때에 비해 결코 낮지 않다. 과잉중복투자가 판치던 1990년대 중반과 비교해 투자율이 떨어졌다고 아우성치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다.
그렇다고 우리 투자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투자가 IT관련 대기업에 집중되면서 중소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작다. 투자의 한계효율이나 고용흡수율도 저하했다. 다만 이는 외자의 증대나 주주자본주의와는 무관하며, 우리경제의 성숙화나 대기업의 중소기업 억압과 관련된 현상이다.
다섯째로, 재계는 토종자본이 외자에 비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일정금액 이상이거나 첨단업종인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해선 세금 등에서 혜택이 주어진다. 이런 조항은 외국인 직접투자를 적극유치하기 위해 설정한 것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폐지하면 된다. 그런데 재계가 주로 문제 삼는 역차별은 이게 아니다.
외환은행의 매각에서 보듯이,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차단’ 원칙을 외국자본에 느슨하게 적용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경우 역차별을 해소한답시고 한국의 산업자본에게 은행소유를 허용하자는 것은, 왜구가 조선부녀자를 강간했으니 조선수군에게도 강간을 허용하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경영권방어와 관련해 한국자본이 차별당하고 있다고도 한다. 즉 외국에서와 같은 경영권방어제도가 한국에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5% 룰, 자사주 취득, 이사 시차임기제 따위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차등의결권도 보통주와 우선주의 형태로 존재한다. 공공적 법인에 대한 외국인소유도 제한한다. 요컨대 경영권 방어와 관련된 역차별의 문제도 부분적으로 손볼 곳은 있지만 과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외국자본에 대한 올바른 대응방식은 어때야 하는가. 우선 외국자본엔 긍정적 기능도 있고 부정적 기능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짚고 가자. 그리고 부정적 기능으로 알려진 것 중엔 고배당, 경영권위협, 주주자본주의화, 투자위축처럼 과장되거나 왜곡된 주장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외국자본의 긍정성을 최대화하고 부정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원칙은 다음 셋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가 ‘주체성’의 원칙이다. 외자유치는 우리의 주체적 판단에 입각해야 하며, 외국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할 필요는 없다. 외자에 의해 산업, 노동, 환경, 문화와 관련된 정책적 자율성을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 예컨대 스크린쿼터 문제에서 미국의 강압에 굴복해 민족문화의 발전을 훼손당해선 안 되는 것이다. 외국자본의 시세차익에 대한 조세부과의 경우, 억지로 빼앗아선 곤란하지만 조세협정의 개정 등 가능한 방안을 열심히 모색해야 한다.
한편, 재벌개혁과 관련하여 외자를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지만, 개혁의 중심주체는 어디까지나 우리 정부, 한국인주주, 시민사회, 노동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기업금융의 비중을 줄이고 가계대출을 늘렸다고 한탄만 하는 것은 비주체적 자세다. 기업금융 시장이 우리 금융기관에게 그만큼 열려 있다는 이야기도 되지 않는가. 우리 스스로 기업금융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둘째는 ‘선별성’의 원칙이다. 외자 중 긍정성이 크고 부정성이 작은 자본의 유치에 애써야 한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금융기관의 경우 적격성 심사를 제대로 수행하고 규정을 정비해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해야 한다. 부실기업 매각에서도 볼보처럼 가급적 우리 경영풍토를 개선할 수 있는 외자를 선택하면 좋을 것이다.
투기적 외국자본을 규제하기 위해, 단기적 외환거래에 부과하자고 하는 토빈세의 도입운동을 여러 나라 공동으로 벌일 필요도 있다. 아울러 외국인소유 제한업종의 내용을 보완할 수도 있겠다. 다만 OECD 규정을 위배할 수는 없을 것이며, 경영권을 과도하게 보호해 오히려 기업을 망쳐선 안 된다.
셋째론 ‘개혁성’의 원칙이다. 현재의 개방은 다소 과도한 부분도 있지만, 장기판에서처럼 무를 수는 없다. 따라서 개혁을 통해 개방을 감당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과 개방의 균형’이다. 주식시장에선 재벌개혁에 의해 기업가치를 제고하고, 국내기관투자가를 육성하고, 민주적 우리사주조합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국민이 기업성장의 과실을 보다 많이 누리게 하고, 부당한 경영권공격도 막아야 한다. 이게 정도(正道)다. 다만 국내투자자들은 총수를 무조건 보호하는 게 아니라, 경영에 견제도 하고, 총수가 부패 무능할 때는 교체하는 데 힘을 실어야 한다.
과도한 경영권 방어장치를 강구하는 것은 사술(邪術)이 되기 쉽다. 민족주의를 부추기며 출자총액제한 폐지 등을 통해 재벌체제를 고수하려는 움직임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반(反)개혁으로 개방에 대처하는 방식은, IMF사태에서 보듯이 도산확률을 높여 기업과 나라경제를 망치는 사이비민족주의다. 외국자본이냐 재벌이냐의 잘못된 이분법에서 벗어나, 외국자본은 주체적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재벌은 선진적 대기업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금융기관과 금융감독기관을 개혁하는 것도 외자의 폐해를 줄이는 길이다. 아울러 국내기관투자가를 육성하고 금융을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의 하나로 삼성생명을 삼성 계열에서 분리시키는 방안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리 되면 삼성생명이 일본생명처럼 은행인수에 참가할 수 있고,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기업의 주식을 보유해 부당한 경영권공격을 막아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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