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법 개정과 재벌개혁 (한겨레 2004년 11월 19일자)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가 막바지에 왔다. 그 동안 이 법안을 둘러싸고 정부와 재계, 여당과 야당은 치열한 언론전을 전개했고 심지어 의석 점거라는 물리력까지 행사했다. 2001년의 개혁수준에도 못 미치는 어정쩡한 법안을 놓고 열기가 지나치게 뜨거웠지 않았나 싶다.
법안의 첫째 쟁점은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용어가 너무 전문적인 탓인지 이 제도에 대해선 부당한 오해가 많았다. 전두환정부가 도입하고 김영삼정부가 강화한 이 제도를 좌파정책이라고 시비건 게 그 한 예다. 두 전직대통령이 대경실색할 판이다. 한편 이 제도가 투자를 저해하며, 그게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재계자신의 조사도 포함된 각종 조사에서 이 제도와 투자부진이 무관하다는 점은 충분히 밝혀졌다.
물론 한국에 특유한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영구적 제도가 아니다. 선진국과는 달리 재벌체제가 엄존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이 제도를 완화하거나 폐지해선 안 될 뿐이다. 가공자본에 의한 총수 지배력증폭의 폐해 즉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을 심화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해결방향은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대체할 선진적 제도의 도입이다.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 차단, 단독주주권과 이중대표소송의 시행, 감사위원선임 시 동일인의 의결권 제한, 순환적 상호출자의 금지가 바로 그것이다.
법안의 둘째 쟁점은 금융사의 의결권제한문제였다. 재벌개혁이 후퇴하기 전인 2001년까지는 예컨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에 대해선 의결권행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에 맡긴 고객의 돈으로 그룹총수가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일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를 차단한다는 ?선진경제의 기본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원칙이 2001년에 훼손되었고, 이번 법안은 그것을 다시 약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계에선 법안이 통과되면 외국인주주 지분이 60% 가까운 삼성전자의 경영권이 위협받는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외국인 대주주들은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구조조정펀드가 아니며, 삼성전자는 에스케이와는 달리 처리 곤란한 계열사주식을 많이 갖고 있지 않으며, 이사의 시차임기제가 시행되고 있으며, 유사시에는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주식을 우호적 기관투자가에게 넘길 수 있는 등 여러 이유로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경영이 엉망진창이 되어 국내기관투자가들마저 등을 돌릴 때에만 경영진이 쫓겨날 수 있는데, 이건 막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삼성에서 금융사 의결권제한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혹시나 시민단체가 독립적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게 될까해서인데, 기업을 이롭게 하는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 역시 막을 일이 아니다.
근년에 들어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근거로 낡은 재벌체제를 존속시키려는 움직임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재벌기업을 망치고 나라경제를 망치는 사이비 민족주의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완화 폐지하거나 금융사의결권제한을 유지하면 소유구조에 약한 고리가 생겨 오히려 에스케이처럼 경영권공격을 당하기 쉽다. 아울러 이런 재벌은 낙후된 경영 탓에 도산확률 즉 외국인 손에 넘어갈 확률이 더 높아진다. 오히려 재벌개혁에 의해 기업가치를 제고하며, 국내기관투자가를 육성하고, 돈 안 되는 계열사주식을 처분케 해야 외국투기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방지할 수 있다.
선진적 대체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완화해선 안 되며, 금융사의결권은 2001년 상태로 원위치시켜야 마땅하다. 전경련의 물타기식 양보안에 흔들려선 죽도 밥도 아니다. 마약중독자가 마약에 의한 괴력과 황홀감을 놓치기 싫어하는 것처럼, 재벌총수는 가공자본에 의한 지배력과 황제경영의 즐거움에 집착하고 있다. 여기에 끌려들 것인가 아니면 재벌개혁의 고삐를 다시 다잡을 것인가. 우리 기업과 나라의 미래는 여기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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