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의 가공자본이 기업을 망친다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필자는 재계와 일부 진보진영의 재벌체제 옹호론이 내포한 갖가지 오류를 지적한 바 있다(Economy21 6월 1일자). 이에 대해 시민단체의 재벌개혁론에 반대해온 정승일 박사가 지난 호에서 반론을 제기하였다. 가공자본 문제에 한정하여 전개된 그 반론엔 새겨볼 만한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러나 정 박사의 기본 논지엔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은 바 이를 하나하나 따져 보기로 하자.
정 박사는 첫째로 스웨덴 등엔 1주1표 원리에 배치되는 차등의결권제도가 존재하고, 이는 가공자본이 문제될 게 없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1대 1,000’까지 이르렀던 차등의결권제도가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우선주와 보통주도 ‘0대 1’ 즉 ‘1대 무한대’라는 의결권차이가 있다. 이런 식의 차등의결권에 대해선 일반주주가 사전적으로 인지․양해하고 있고, 그것을 전제로 주식을 구입하므로 시빗거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개혁하려는 순환출자에 의한 가공자본은 아무런 사전양해 없이 일반주주의 지분을 희석시켜 총수의 지배력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이는 사후적으로 일반주주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다. 독일에서 상호출자의 의결권이 제한되는 것은 이런 연유다. 일본이나 미국의 계열사 출자도 총수의 지배력증폭을 위한 가공자본 형성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로 독일 등에서도 은행과 보험사가 고객의 예치금을 기업지배력 확장에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공정위가 시행하는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제한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독일 등의 은행과 보험사는 특정 총수 휘하에 들어 있지 않으며, 산업자본의 금융지배가 차단되어 있다. 이런 차이를 간과하는 것은 색깔이 같다고 소금과 설탕을 구분하지 못하는 처사다.
셋째로 자본주의 발전에서 가공자본은 여러 형태로 존재해 왔고, 중요한 것은 그 가공자본의 구체적 기능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한다. 재벌의 계열사 출자가 경제성장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측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의 재벌체제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그 부정적 기능이 긍정적 기능을 압도하게 되고, 그리하여 아이엠에프사태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망각해선 곤란하다. 재벌개혁이란 합리적 사업다각화를 위한 계열사출자를 저지하려는 게 아니라, 부패무능 경영을 야기하는 총수의 지배력증폭을 위한 가공자본형성을 제한하려는 것이다.
넷째로 재벌이 사회공헌기금 따위를 내고 분배구조 개선에 협력하는 대가로 총수의 지배권을 용인하자고 한다. 일각에선 같은 맥락에서 삼성그룹의 경우에 이런 식으로 총수의 지배권 불법승계 문제를 눈감아주자고 한다. 학급반장이 부정투표로 선출되었는데, 반원들에게 (그것도 학급회비로) 피자 돌리는 걸로 넘어가자는 식이다. 어이가 없다. 그리고 총수의 세습적 지배권을 과거처럼 끄덕 없게 만들면, 지배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는 한 기업의 도산확률이 높아지고, 이는 기업은 물론 나라경제도 해치지 않는가.
재벌개혁이 윈윈 게임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개혁을 그만두고 사회공헌기금 따위를 구걸하려는 것은 결국 기업을 망치자고 외치는 셈이다. 스웨덴의 살쵸바덴 협약이 정 박사 등의 제안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 협약은 노사대타협으로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일반적 권리를 인정했을 뿐, 일반주주에 대한 총수의 지배권을 특별히 보장하지는 않았다. 지난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이 걱정스럽다 하더라도 이를 가공자본으로 해결해선 안 된다. 국내기관투자가를 육성하고 민주적 우리사주조합을 활성화해서 경영의 책임성, 안정성, 민족성을 조화시키는 게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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