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분배, 개혁의 3중주 (한겨레신문 2004. 5.24)
노무현 대통령 집권 2기가 시작되었고 의회 판갈이도 이뤄졌다. 이를 계기로 성장이냐 분배냐 개혁이냐 하는 논란이 뜨겁다. 정부와 정치권이 이런저런 목소리를 내고 있고 언론도 핏대를 세운다. 사실 이런 현상은 박정희 시대 이래의 해묵은 것이며 어쩌면 자본주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다만 경기가 침체하고 분배가 악화되었고 새 정치세력 등장에 따른 기대와 우려가 커지면서 다툼의 열기가 높아진 셈이다.
그런데 국정방향을 둘러싼 이런 논란 속에 성장, 분배, 개혁의 개념이나 상호연관성을 차분히 따지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그저 성장을 통한 분배나 분배를 통한 성장을 외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성장과 분배는 경제의 양대 수레바퀴다. 그리고 개혁은 성장구조와 분배구조를 더 나은 쪽으로 뜯어고치는 일이다. 도인이나 악귀가 아니라면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성장’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분배’ 둘 다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양자의 결합방식이다.
성장과 분배는 반드시 양자택일적이지는 않으며 시너지효과를 가질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서구에선 성장과 분배가 ‘행복한 동거’ 관계였다. 하지만 성장이 자동적으로 분배를 보장하지는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선 성장의 그늘 아래 분배는 악화일로였다. 또 분배악화가 빚은 범죄로 인한 비용 등을 감안하면 미국의 진정한 1인당 소득은 1만 달러쯤이라는 지적마저 있다. 반면에 과거 소련에서의 기계적 평등주의 분배정책은 성장력을 훼손하여 체제를 파탄시켰다. 게다가 고급당원과 일반인의 격차는 실제론 크게 벌어졌다.
개혁이란 이와 같은 성장과 분배의 악순환구조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장과 분배의 올바른 개혁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 성장정책 면에선 성장론 또는 위기론으로 포장한 재벌개혁 반대론 따위에 휘둘려선 안 된다. 이들은 재벌총수의 부당이익을 위해 기업과 나라경제의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시장질서가 바로 서야 경제가 제대로 성장한다는 것은 아이엠에프사태에서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성장정책은 일시적 경기부양과 구조적 성장력 향상을 현명하게 배합해야 한다. 환자의 기력회복을 위해 일시적으로 링거주사를 놔야 할 때도 있지만 모르핀을 함부로 써선 안 된다. 소비를 진작시킨다고 카드남발을 용인해 신용불량자 390만 명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은가. 미진했거나 후퇴했던 기업 금융 노동 공공부문 개혁에 다시 박차를 가하는 것이 바로 구조적으로 성장력을 제고하는 길이다.
다음으로 분배문제는 노동과 자본, 노동자 내부, 대자본과 중소자본, 생산적 계층과 비생산적 계층 사이에서 다원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는 분배개혁에서도 일시적 대응과 구조적 대응을 현명하게 배합해야 한다. 그때그때의 임금인상 노력은 노조의 의무다. 하지만 이것이 만약 노동자간 격차를 심화시켜 하층노동자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리거나 미래를 위한 투자재원까지 결딴내선 곤란하다. 성장저해적 분배가 되는 셈이다. 성장촉진적 분배란 노사정의 타협체제 형성, 인적 자본(숙련과 기술) 육성, 공정거래 정착, 투기와 부패의 척결, 사회적 안전망 확충과 같은 구조적 개혁을 뜻한다.
성장, 분배, 개혁은 현악 3중주와 같다. 화음의 조화가 중요하다. 셋 중 하나에만 집착하는 관념적 논의에서 탈피해, 셋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해야 한다. 우린 지금 바람직한 선진경제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을 통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구조’ 구축이 3자의 기본관계일 수밖에 없다. 구조개혁과 무관한 경기부양이나 분배개선을 도모할 수도 있으나 구조적 퇴행을 초래하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새 정치세력이 멋진 연주를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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