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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8일자 추억의 글--여주 교도소를 다녀와서 : 억울함을 줄여줄 대통령을 뽑자

동숭동지킴이 2020. 12. 18. 01:31

<여주 교도소를 다녀와서 : 억울함을 줄여줄 대통령을 뽑자>

오늘 아침에 곽교육감이 수감되어 있는 여주 교도소를 찾았습니다.

한달에 여섯 번밖에 면회가 안 되는 탓에 그 동안 면회갈 날을 잡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면회가 이뤄졌습니다.

5명이 같이 갔는데, 면회시간은 15분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앉자마자 곽교육감이 10분 정도 혼자서 열변을 토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감옥살이 하는 게 너무도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법률전공자가 아닌 탓에 그가 주장한 내용을 다 기억하지도 못하고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으론, 유서대필 혐의로 감옥살이했던 강기훈 사건과 자신의 사건이 같은 성격이라는 말과, 후보자 사후매수죄로 자신이 구속되었는데 사퇴자 사후매수인지는 모르지만 후보자 사후매수는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제가 법전공자가 아닌 탓에 유죄니 무죄니 자신 있게 말할 형편은 아니고, 제 블로그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여러번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요즘 생각이 정리된 생각을 간단하게 덧붙이겠습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이 사건은 박명기교수의 공갈협박(?)에 의해 할 수 없이 돈을 뜯긴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교수가 사건을 폭로한다 하더라도 작년 12월 3일 이후엔 곽교육감은 형사처벌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감직을 내놓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12월3일 이전에 폭로했으면 형사처벌은 받지 않지만 교육감직은 상실합니다. 곽교육감이 돈을 준 것은 금년 2월입니다.)

 

다만 곽교육감 자신도 인정했듯이 박교수의 폭로는 교육감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합니다. 한동안 시끄럽겠지요. 그게 귀찮고 겁이 나서 돈을 준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돈 걱정 때문에 자살한다는 말까지 하고 있는 박교수에 대한 애처러운 마음 때문에 선의로 돈을 준 부분도 있습니다.

공갈협박과 선의 둘 중 어느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는 신만이 알 것입니다. 그런데 공갈협박 때문이든 선의든 어느 것에 의해 돈을 주었건 곽교육감은 피해자 또는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말할 것도 없고 피해자를 처벌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합니다. 예컨대 아들(곽교육감 사건에서는 선거본부장)이 여학생을 건드렸다고(선거 후 보상 약속) 여학생 부모(박교수)가 아들 아버지(곽교육감)에게 와서 협박을 해서 돈을 내놓았다고 그 아버지를 처벌해야 하는가요.

사실 박명기교수가 돈을 요구했을 때 그냥 그를 협박범으로 고소하자는 의견도 있었던 걸로 들었습니다.

사건이 이처럼 특수했기 때문에 박교수에게 돈을 주자고 강력히 주장했던 강경선 교수는 며칠 전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돈 주는 것과 관련해선 강교수가 주범이고 곽교육감은 종범인 셈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강교수의 말이라면 거의 무조건 따르는 곽교육감인지라 이 사건에서의 주-종 관계는 확실한데, 주범은 무죄고 종범은 유죄라는 게 어불성설이지 않은가요.

어쨌든 이런 형편이니 곽교육감이 억울해 미칠 지경인 것 같았습니다. 곽교육감은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쳤다는 말도 오늘 했습니다.

 

사실 저는 곽교육감이 15분 중 10분이나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왕 감옥살이하는 형편이면, 영화 "밀양"에서의 유괴살인범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좀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랬습니다.

사실 미결수로서 곽교육감이 서울구치소에 있었을 때는 오늘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이렇게 억울해 하고 답답해 하면 본인 건강에도 아주 해롭습니다. 원래 감옥살이하면 '감옥 독'이라는 게 생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억울해 하면 그 후유증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억울하면 그렇게까지 할까요. 우리 사법부가, 아니 우리 사회가 이런 억울한 마음들을 풀어주는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한국 사회의 문제로서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을 지적해 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 책을 참고하십시오.) 그런데 이 세 문제 사이의 관계와 서열을 여기서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고단함(학생과 학부모, 근로자 등의 고단함)은 억울함과 불안함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억울한 처지에 놓이지 않으려고, 또 불안하기 때문에 고단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 중에서는 대체로 억울함이 가장 심각하고, 불안함 그리고 그 다음에 고단함의 순서로 심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곽교육감처럼 억울하면 미칠 것 같으니까요.

내일 새 대통령이 탄생합니다. 새 대통령은 처리해야 할 일의 순서(sequencing)를 잘 잡아야 합니다. 대중적 호응이 큰 일부터 시작해야 하고, 또 억울함을 푸는 일(해원)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어느 후보가 되어야 억울한 사람이 적어질지는 이제 확실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적은 사회를 위해서도 내일 열심히 투표해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