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글은 1월 3일자 중앙일보의 중앙시평에 실린 "월간 이머징" 강위석 편집인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서 1월 5일에 중앙일보에 투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앙일보에서는 게재를 거부하였습니다. > (www.issuetoday.com 2002년 1월 10-15일 게재)
사법부는 소방관이다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지난 연말 수원법원은 참으로 획기적인 판결을 내렸다.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전자 임원들이 977억 원을 삼성전자 회사에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이들이 뇌물공여, 부실기업 인수, 주식 저가매각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판결의 취지를 왜곡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월 3일자 중앙시평에 실린 강위석 편집인의 글이다.
첫째로 강 편집인은 재판부를 테러집단에 비유하고 있다. 사법부가 하는 일이라고 모두 옳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세계무역센터 폭파범과 한데 묶을 수 있을까. 사법부는 자유시장경제를 말살하려 한 게 아니다. 오히려 황제식 선단경영으로 인해 중상을 입은 시장경제를 되살리려 했던 것이고, 비유하자면 뉴욕 테러 때 인명구조에 몸바친 소방대원인 셈이다. 삼성전자에서와 같은 주주대표소송은 일본, 미국에서 매년 수백 건씩 제기되어 선진시장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이런 선진시스템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문명에 대한 테러행위가 아닐까.
둘째로 이사회에 앞서 전문 실무부서에서 철저히 검토했을 것이므로 이사들은 거수기 역할만 했어도 충분하다고 강 편집인은 주장한다. 그런데 판결문을 보면 실무부서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인수대상인 이천전기의 경영실태를 평가한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딘가 이상한 딴 데에서 주요결정이 내려진 탓이 아닐까. 일반주주들은 안중에 없는 이사들의 이런 행태를 어찌 묵과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사들이 알거지가 되라는 건 아니다. 깃털이 아닌 몸통이 부담을 나눠지면 되지 않겠는가.
셋째로 사법부가 시장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지적 교활과 오만이라는 비난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주주대표소송에서 책임을 묻는 경우는, 이사진이 통상의 노력으로 입수가능한 중요정보를 면밀히 조사검토하지 않았을 때로 선진국에서는 이미 정착이 되어 있다. 이번 판결도 위험을 수반하는 경영적 판단에 결과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원칙은 인정하였다. 다만 정상적 경영판단에 해당하지 않는 직무유기에 대해 배상을 요구한 것이다. 사후의 경영실패가 아니라 과정상의 의무태만을 징계한 셈이다. 경영은 전문적이지만 성역은 아니다. 기업경영보다 어쩌면 더 전문적인 의료행위에 대해서도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자.
넷째로 삼성전자는 잘 나가고 있는데 무슨 불만이냐는 지적이 있었다. 부잣집 도둑질은 도둑질이 아니라는 논법이다. 혹시 활빈당이 부활했는가. 그런데 삼성전자에서 빼돌린 돈은 빈민구제에 쓰여지지도 않았다. 뇌물제공 등 황제식 선단경영의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삼성전자가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음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경영행태가 지속되면 장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또 삼성전자에서와 같은 잘못된 지배구조로 우리 기업들의 주가는 30% 이상 낮게 평가된다고 한다. 이런 손실을 어찌 그냥 두고 볼 것인가.
해괴한 일을 지당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겐 이번 판결과 같은 지당한 일이 오히려 해괴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고 있다. 이사는 총수의 머슴이 아니라 주주를 위한 대리인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실천에 옮겨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재벌의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이 투명성, 책임성, 전문성을 갖춘 선진대기업경영으로 환골탈태하려면 갈 길이 아직 멀고도 멀다. 뜨거운 갈채를 받아야 할 판결을 둘러싸고 쓸데없이 ‘사법부 딴지걸기’나 ‘사법부 죽이기’에 나설 때가 아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기업도 잘되고 나라도 잘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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