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야누스적 얼굴을 갖고 있다. 한 사람에게 기업은 가족을 부양하고 자아실현을 위한 소중한 일터가 된다. 기업은 혁신을 통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시에 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기도 하며, 권력과 결탁해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하고,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지탄받기도 한다.
J노믹스(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세 축인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가운데 지난 1년간 혁신성장이 유달리 홀대받았다는 비판 때문인지 정부는 요즘 혁신성장 묘수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기업 투자를 늘려 일자리를 만들고, 창업을 독려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혁신성장에도 넘지 말아야 할 레드라인(금지선)이 있다.
정부는 혁신성장을 위한 주요 수단으로 규제혁신을 설정하고 있다. 진보·보수 정부 가릴 것 없이 역대 정부 모두 규제혁신을 강조했으나 한국은 여전히 규제 공화국의 오명에 갇혀 있다. 진정 규제를 풀어 혁신이 들불처럼 확산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문제는 규제혁신을 두고 정부, 대기업, 중소기업, 시민사회의 눈높이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재벌 대기업은 ‘규제혁신으로 제발 우리를 놔달라’고 하소연하나 경제정의를 위해 설정된 규제를 모조리 풀어주는 것이 규제혁신이 될 수는 없다. 기업을 미워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쥐꼬리만 한 재벌 총수일가의 지배력 강화에 동원돼 온 공익법인에 대한 규제 등은 오히려 강화되어야 할 규제다. 재벌 대기업의 독과점과 특정 이익집단의 특권을 보장하는 규제야말로 혁파의 대상이다.
정부 내에서는 재벌 대기업의 투자에 기대 일자리를 늘리고 어려운 경제상황을 돌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재벌 대기업은 한국경제의 중요한 자산임에 분명하다. 정부는 규제 당사자인 기업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어야 하며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다만, 분명히 청산해야 할 과오가 있음에도 정부가 서둘러 덮고 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을 읍소하는 모양새로 흐른다면 납득하기 어렵다. 납품 중소기업을 동반자로 대우하기는커녕 기술탈취를 일삼는 행태를 눈감아 주면서 오로지 일자리만 늘린다면 다 좋다는 식의 접근은 곤란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보수단체 어버이연합에 관제시위 자금을 지원했던 전경련이 정부의 의미 있는 대화상대가 되려면 환골탈태에 상공했는지 검증받는 게 우선이다. 혁신성장을 빌미로 무분별한 재벌 대기업 규제 해제에 나선다면 이는 사회에서 합의된 레드라인을 넘는 게 될 것이다.
혁신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상유지 중시 성향이 강한 관료조직이 부쩍 중대시되는 현상도 우려스럽다. 관료들은 태생적으로 개혁과 거리가 있으며 자신들의 기득권 포기를 거부하기 마련이다. 문 정부 초기 개혁성향 학자들이 청와대와 정부에 포진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료들이 요직을 장악해갈 태세다. 대통령직속 재정개혁특위만 해도 내부에서 “기획재정부의 독주가 우려된다”는 말들이 흘러나온다. 재정개혁특위는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평하고 정의로운 조세·재정정책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설치된 대통령 자문기구다. 그럼에도 별 힘을 못 쓰는 기재부 자문기구로 전락하고 있다. 청와대 용인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문 정부가 재벌과 관료에 포획된다면 과거 정부와 다를 바 없게 된다. 경제는 큰 반전이나 추락 없이 그럭저럭 굴러갈 가능성이 높지만 몇 년 뒤 자신 있게 내놓을 개혁 성과가 얼마나 될지 불확실해진다. 집권층은 최근 담대한 사회경제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320여명의 공동선언문이 나온 배경을 가벼이 봐선 안된다. 고통스러운 개혁의 부작용을 넘어서면서 경제구조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는 게 문 정부가 가야 할 길이다.
진보경제학자였던 고(故) 김기원 교수는 재벌·노동개혁 같은 중대 과제가 달성되려면 진보개혁세력이 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을 때, 북유럽처럼 진보·보수정당 간의 거리가 좁혀질 때 가능하다고 했다. 문 정부에 아직 시간은 많다. 개혁성향의 인사들이 곳곳에 배치돼 탄탄한 팀워크를 이루면서 개혁을 지속해가길 바란다.
혁신하면 떠오르는 경제학자 슘페터는 “마차를 단순히 연결한다고 기차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혁신은 위험과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이윤과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가가 주도한다고 설파했다. 재벌 대기업들도 이 같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혁신의 푸른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자신들을 키워준 시민들에 보답하고 사랑받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