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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장희창교수의 김기원 선배를 그리며....

동숭동지킴이 2018. 10. 9. 08:41

내게는 지식인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아쉽게도 돌아가신 분이다. 좋은 사람 만나기 어렵고 만나더라도 알아보기 어렵다.

백남기 농부 사건을 둘러싼 정국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자니 아, 그 사람이야말로 잿빛 기회주의자들 가운데서 푸르게 빛나던 참된 지식인이었다는 생각이 또렷해진다. 2년 전쯤 영면한 방송통신대의 고 김기원 교수 이야기다. 그때 올렸던 글을 거의 그대로 다시 올려 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기원 형을 처음 만난 것은 신림동 산비탈의 하숙집에서였다. 형은 경제학과 조교 신분이었고, 나는 군 전역 후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순하고 커다란 눈에 덩치가 작은 편인 형은 치질 때문에 밤새 이불 위에 엎드린 채 공부하곤 했다. 방 안 여기저기엔 관련 자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산보하자며 같이 뒷산에 오르기도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산보 후엔 체력이 달려 종일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형은 몸이 좋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패악질이 극에 달했던 그 시절에도 하숙집 풍경은 정겨웠다. 밥 때가 되면 하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하숙생 중 하나가 나를 비롯한 선배들의 귀염을 독차지했는데 나중에 가짜 학생이라는 게 식사 중에 들통 났던 적이 있다. ㅠ 이걸 어떻게 하나, 내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형이 대뜸 호통을 쳤다. 자기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 녀석을 향해 가차 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지행합일이 아니라 행행합일의 경지다. 뻔뻔하게 버텨보려던 기색이 역력하던 녀석은 두 말 없이 보따리를 싸 하숙집을 떠났다.

월급날이면 영양보충 하자며 보신탕집에 같이 가곤했다. 소주 한 잔에 흥이 난 우리는 2차, 3차를 감행했다. 파죽지세의 과감한 투척에 두둑하던 형의 지갑은 인정사정없이 헐렁해졌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돈을 저렇게 마구 날려버린단 말인가. 다음 날은 둘 다 설사에 시달렸다.

형을 다시 만난 것은 십 년 후였다. 나는 80년대 말 군사정권 때 어찌어찌 하다가 해직되었다. 교권침해는 분명하지만, 계약만료는 그보다 더 엄중한 현실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판결에 뚜렷한 대책도 없이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나의 속사정을 짐작한 형은 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형수님에게 배우는 학생들 중 집안 형편이 나은 학생에게 과외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했다. 짭짤한 수입이었다. 형은 세심한 배려의 인간이었지만, 또한 거대한 골리앗을 향해 돌을 날리는 다윗이었다. 거대 재벌 삼성이라고 해서 그의 호통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해방 후 재벌의 편법적인 축재과정을 낱낱이 까발렸다.

지지난 해 베를린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형은 본격적으로 북한 문제, 통일 문제에 전념하는 것 같았다. 어찌 그리 덩치가 큰 상대만을 고른단 말인가.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 대화를 나누었던 게 내가 들은 마지막 육성이었고, 이후로는 페이스북을 통해 안부를 나누었다.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라는 타이틀을 건 블로그를 통해 그는 혼돈의 시대를 건너갈 실사구시의 진심어린 심경을 토로했다. 가까운 벗이라고 해도 공인일 경우에는 가차 없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졸저를 보내드린 적이 있었는데, 꼼꼼하게 다 읽고 여기는 용어 번역이 이상하고, 저기는 자기하고 생각이 다르다며 일일이 지적해 메일로 보내주었다. 그 배려 그 꼼꼼함. 그런 식으로 북한과 통일 문제에 집중했을 테니 강철의 몸인들 어찌 배겨났겠는가. 하숙 시절 때처럼 산더미 같이 자료를 쌓아놓고 의욕에 불타올랐을 것임이 분명하다. 나약하고 비겁한 지식인들 한가운데서 그는 돈도 자신의 몸도 내던지며 공허한 관념과 거짓의 아수라장을 과감하게 돌파한 실천의 지식인이었다.

12월 9일 강남성모병원의 빈소에 들렀더니, 많은 동료와 지인들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슬프지 않았다. 평생을 따뜻한 마음으로 당당하게 사셨는데 왜 슬프단 말인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한용운의 이 시가 이토록 실감날 줄은 미처 몰랐다. 님의 침묵이라고 하지만, 내겐 그 침묵이 형의 당찬 웅변으로 들려온다. 먼저, 인간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