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비서는 남한의 비서인가>
오늘은 하루종일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독일의 자유민주당 FDP와 관련이 깊은 정당)이 공동주최한 북한 관련 학술회의였습니다.
북한에서 여러 해 머물면서 경사지 개간방식을 지도한 스위스인, business와 시장경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 미국인, 평양과학기술대학의 교무처장, 한국의 북한전문가들 등 여러 분들이 발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저에겐 많이 공부가 되는 자리였습니다. 거기서 들은 내용 중 최근의 남북한 관계와 관련되는 사안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1) 북한대표단의 조평통 서기국장의 '격' 문제
어제 삼성경제연구소의 임수호 박사가 지적한 사실이 오늘 학술회의에서도 재차 확인되었습니다. 즉 북한은 오늘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회담에서 박통의 입장을 고려해 과거보다 한 급 높은 인물을 장관급으로 보내려 했습니다.
예전에는 장관급 회담의 북측 수석대표로 나온 인물이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한 급 높은 서기국 국장을 내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정도로 박통의 체면을 세워줬으면 그냥 받아들여도 충분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남북회담이 열리지 않다보니, 통일부나 청와대에서 북한측 대표의 성격에 대해 잘 모르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고, 북한 사정을 아는 인물이 청와대나 박통에게 사정을 감히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게 오늘 발표장에서 나온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청와대나 박통은 서기국 '국장'이라고 하니까 한국의 국장급으로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북한 전문가인 임수호박사조차 처음에는 그런 느낌을 가졌다고 하니, 박통 등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상황에서 괜찮고 용기 있는 인물이 박통 주위에 있었다면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을텐데, 남북관계 개선에 별 관심이 없는 인물들이 포진해 있으니 진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지요.
사실 북한과 남한은 같이 한글을 사용하지만 다른 뜻인 경우가 있고 (예컨대 "일없다" "동무"), 특히 직책과 관련해선 그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제가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의 직책이 당비서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선 비서라고 하면 커피 타고 일정 챙기는 일을 하는 비서를 생각하니까요.
사회주의 국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미국의 국무장관은 "Secretary of State"입니다.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역시, 약간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Secretary에는 일반적인 용법으로서의 '비서'란 뜻 말고도 이렇게 다른 뜻이 있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조평국 서기국 국장이 한국의 국장이 아니고, 남한이 참석을 요구한 김양건 통전부장이 한국의 부장이 아닌 것이지요. 북한 전공자들은 김양건 통전부장의 '격'은 대체로 부총리급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똑같은 언어라도 의미하는 바가 다르니 참으로 골치아픕니다. 제가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공자가 말한 必也正名(이름을 바로잡는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참석하든 미리 최고지도자로부터 세세한 지시까지 받고 나오는 판에 굳이 '격'을 따질 이유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남북한 정권 모두 진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관료주의나 서열주의 유교문화(?)가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영화 "독재자"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히틀러 같은 인물과 무솔리니 같은 인물이 만나는데, 서로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높은 의자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지요. 남북한 정권 모두 이런 우스꽝스런 독재자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굳이 책임의 경중을 따지자면, 과거보다 한 등급 올려서 대표를 파견한 북한측보다 남한측이 더 책임이 커 보입니다. 특히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힘이 센 나라인데 통큰 아량을 보이지 못하고 옹졸함을 드러낸 면에서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책임을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사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가 중요합니다. 정권지도자들이 역지사지하면서 자기들의 알량한 자존심보다 국민들의 이해를 앞세웠으면 좋겠습니다.
2) 평양과학기술대로의 한국인 교수 파견을 누가 막고 있는가
평양과학기술대는 소망교회가 중요한 후원자의 하나가 되어 2010년에 개원한 대학입니다. 현재 400명의 학부생과 100명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있으며, Electrical and Computer Engineering, International Finance and Management, Agriculture and Life Sciences의 세개 학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수진은 10개국으로부터의 60명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한국인 국적을 가진 교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토론자가 지적하자 평양과기대 교수는 의외의 답변을 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폐쇄적이고 한국에 적대적인 북한측이 한국인 교수를 거부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교수가 평양 과기대에서 북한학생을 가르지는 것에 대해 남한정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과목도 아니고 체제와 무관한 공학이거나 북한체제를 개혁과 개방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되는 과목을 가르치는 데도 말입니다. 혹시라도 북한에 가서 주사파가 될까봐 걱정이 되어서일까요. 어이가 없습니다.
아마도 남한 정부는 말로는 북한의 개혁과 개방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그에 대해 관심이 없고 무너지기만 기다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만약 북한정권이 동독처럼 붕괴된다면 몰려들 수십만 수백만 난민 (아니 북한 인구 2400만 전체가 난민이 될거라는 예측도 있습니다만)을 감당할 준비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으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노무현 정부 때는 한양대의 공학부 교수 2명이 여러 달 김책공대에 가서 북한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건 막을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될 일이 아닐까요.
3) 서울대의 북한엘리트 교육 방해 사건
여러 해 전에 서울대에서는 기재부의 지원으로 북한 엘리트들을 중국 대련으로 불러 시장경제를 교육시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외무성, 경공업성의 엘리트들을 12명씩 불러 4차례에 걸쳐 교육을 했답니다. 시장경제에 대한 지식수준이 낮아 보세가공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키는 데도 여러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업이 4차례 진행되고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중단된 이유는 이 사업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관료가 'ㅈ일보'(발표 교수가 ㅈ 일보라고 했습니다만, 어느 ㅈ일보인지는 다 잘 아시겠지요)에다 그 교육에 대한 정보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ㅈ일보는 북한인들을 불러 시장경제를 교육시킨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카지노 교육도 시킨다고 왜곡보도를 했습니다. 이 신문은 북한문제나 진보파와 관련해선 왜곡보도를 별 거리낌없이 하는 신문이지요.
이렇게 되자 북한에서 난리가 났고, 결국 그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인에게 시장경제를 교육시켜 개혁과 개방으로 이끄는 것은 당장 북한인민의 삶을 개선시킬 뿐만 아니라 장차 통일비용을 줄이는 길입니다.
보수파가 비판하는 낙후되고 경직된 북한체제를 바로잡는 길이고 합리적 보수파라면 적극 지원해야 할 사업입니다. 그에 대해 수구적 보수파인 일부 관료와 ㅈ일보가 깽판을 친 것이지요.
이상 간단하게 오늘 학술대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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