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40) : <성공할 정치인의 자질>, <황제경영의 허와 실>, <장하성과 안철수>

동숭동지킴이 2014. 10. 3. 16:54

베를린 통신 (40) : <성공할 정치인의 자질>, <황제경영의 허와 실>, <장하성과 안철수>

 

그동안 페이스북에 썼던 글 몇 개를 소개합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들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도 동시에 실린 바 있습니다.

 

1) 성공할 정치인의 자질 : 박영선의 사퇴를 보며 (10월 2일)

 

박영선의원이 원내대표직을 사퇴했습니다. 얼마 전 비상대책위원장 직을 물러 난 데 이어 원내대표직까지 그만두었으니, 영광 아니 자신의 말대로 짐을 다 내려놓은 셈입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국회의원 자리는 지키고 있으니, 그녀의 정치활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다만 야당지도자로서의 모양새는 구겨버리고 말았지요.

 

박영선은 MBC기자 시절부터 눈에 띄었고, 여장부같은 당찬 자세와 똑똑한 발음은 정치가로서 커나갈 자질을 일부 보여주었습니다. 또 의원이 되자 삼성 관련법 문제에서 적당히 삼성의 비위를 맞추고 타협한다든가 하지 않았습니다. 감히(?) 삼성과 맞장을 뜬 셈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어디까지 커나갈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세월호 사태 이전에도 이미 지난 몇 년 사이에 그녀의 한계를 목격하게 된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걸 소개하고 한국의 정치인이 성공하는 데 필요한 자질, 그리고 야당에게 필요한 개혁을 한번 짚어볼까 합니다.

 

여러 해 전 민주당 주최의 재벌관련 토론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종일박사 등이 발표를 하고 저는 토론자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거슬린 일이 토론회 시작 전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주최 측은 민주당 의원 중에서도 정동영과 가까운 인물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 인물들을 토론회 시작 전에 박영선이 일일이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원들이 거의 모두 다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씩 하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10여분은 그걸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청중은 몇 명 되지도 않았고 기자도 없었으니, 의원들 발언에 주목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실제로 의미 있는 발언 내용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지요.

 

반면에 10명 가까운 의원들은 의원들 소개가 끝나자마자 대부분이 자리를 떴습니다. 사실상 주최자인 정동영을 비롯해 겨우 한둘 정도가 자리를 지키지 않았던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원들은 그 자리에 무엇 하러 왔을까요.

 

재벌문제와 관련해 한 수 배울 것도 아니고, 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기의 소신을 피력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동영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온 셈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의원들에게 일일이 마이크를 잡도록 한 게 박영선이었습니다. 정작 박영선 자신도 소개 행사가 끝나자 금방 자리를 떴습니다.

 

제가 국회의원 주최 토론회에 많이 참석한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쩌다 참석했던 야당행사에서는 대부분 의원들이 얼굴만 내비치고는 곧장 자리를 뜹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한다고 그리 바쁜 것일까요. 그리고 정말로 바쁜 다른 일이 있다면 얼굴만 잠깐 내비칠 행사엔 아예 들르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결혼식에 부조금 내러 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로 한나라당(새누리당) 행사는 달랐습니다. 2000년대 초 대우자동차 문제와 관련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인천근처 지역 한나라당 의원들은 모두 참석했습니다.

 

사안이 민감해서 대우자동차 노동자를 비롯해 청중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행사에서는 참석한 국회의원들을 이름을 부르고 청중에게 인사하게 했을 뿐 마이크를 잡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의원들은 민주당과는 정반대로 거의 모두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2012년의 새누리당 행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 실천모임에서 제가 발표를 한 조찬모임이었습니다. 그 행사엔 새누리당 전현직 의원 20명 가까이가 참가했는데, 아예 의원들 소개도 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발제에 들어갔습니다. 이 행사에는 주요 신문사 기자들이 다 참석했는데도, 형식적인 소개 따위는 아예 생략한 것입니다.

 

이처럼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문화가 다른 것이지요. 물론 제가 두어 개의 행사경험만 가지고 과도한 일반화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민주당에 비해 새누리당이 훨씬 실질적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 민주당에선 계파 챙기기가 의원들 장래와 관련되어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위에서 말씀드린 민주당 국회토론회를 보면서 저는 박영선의 장래성에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2012년 국회의원 공천과 관련해서 벌어졌습니다.

 

그녀는 국회의원 공천과 관련해서 최종결정권을 행사하는 최고위원회 멤버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공천작업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갑자기 폭탄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민주당의 공천이 엉망이어서 자기는 최고위원에서 탈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의 공천이 엉망진창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원래는 유리했던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박영선은 그 공천작업에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책임을 공유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공천작업의 문제점을 깨닫고 그것의 시정을 요구하려 했다면 적어도 공천작업의 막바지가 아니라 초반이나 중간단계에서 탈퇴를 하든 뭐를 하든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막바지까지 자기 사람을 심으려고 노력하다 그게 잘 안되니까 탈퇴함으로써 엉망진창 공천의 책임을 피해보려 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당 공천의 문제점을 바로잡지는 못하면서 민주당 공천의 문제점을 증폭해서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게 바로 해당(害黨) 행위입니다.

 

당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걸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에 대한 비판은 당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어야지 자기 개인이 잘난 체 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새민련의 여러 인사들은 당의 혁신을 위한 비판이 아니고 해당행위에 속하는 비판을 함부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당의 규율이 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새누리당에서 당을 비판한 예컨대 소장파 인사들은 당의 노선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런 비판을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주가를 올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지만, 무조건적인 비난을 일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박영선을 비롯한 새민련 일부 인사들은 당의 노선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행위를 버젓이 저질러 왔습니다. 이는 김대중 시절의 강한 독재적 리더십이 사라지고 당이 민주적 리더십을 찾아가는 과도기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계파 문제도 그런 과도기에서 발생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 과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상태가 계속되면 새민련도 어려워지고 국민도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정치학자나 정치평론가들이 새민련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실현가능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경우를 잘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계파문제를 극복하고 민주적이면서 효율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게 할 수 있을지를 둘러싼 대안들이 많이 제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새민련의 문제는 리더십만이 아니라 비전과 진정성의 취약성, 당과 대중의 괴리 문제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새민련 아닌 쪽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겠지만, 그런 시도는 안철수의 사례에서 보듯이 성공하기 힘듭니다. 의원내각제의 도입 또는 비례대표의원의 대폭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선 좀처럼 돌파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게다가 사실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새민련 인사들보다 정치적 자질이 더 떨어지는 3류, 4류가 다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새민련의 리더십이 거듭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정치엘리트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을 정립하는 문제를 저는 제기하고 싶습니다. 정치세계에서의 ‘경쟁 메커니즘’ 문제입니다.

 

박영선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의 상당수는 이런 경쟁 메커니즘을 제대로 거친 경우가 아닙니다. 그러니 정당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대중과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리더십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저 국민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선발되고 높은 지위에까지 올라가서는 박영선이나 안철수의 사례에서 보듯이 위기의 순간을 돌파할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상돈 교수나 강준만 교수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려 한 일도 유명인사가 정치력을 갖고 있는 걸로 착각하는 행태의 하나이지요.

 

사실 정동영도 방송 앵커로서 남이 써준 원고를 읽는 일만 주로 하다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자리에 오르니, 내공부족을 드러냈던 셈입니다. 한국의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고민해보는 꾸준한 훈련 없이는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현재 대통령의 자질은 박영선보다도 훨씬 더 떨어지겠지요. 그러나 현재의 대통령에게는 막강한 지원세력(재벌, 수구보수언론, 관료)이 존재합니다. 제가 여기서 제기한 대성할 정치인의 자질이란 것은 그런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할 수 있는 야당정치인의 자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박영선이 고지에서 추락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을 계기로 본인이 내공을 비약시켜 거듭나고 당도 내공을 길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한국정치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막연한 비난은 이제 그만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둘러싼 논쟁을 벌여갔으면 좋겠습니다.

 

 

2) 황제경영의 허(虛)와 실(實) : 현대차의 10조원 입찰 (9월 19일)

 

현대차가 한전부지를 10조 5500억원에 낙찰 받은 것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삼성전자가 5조원 안팎을 써냈다고 하니, 현대차로선 불필요하게 5조 원 이상을 써낸 셈입니다. 5조원이라는 숫자는 일반인이 체감할 수 없는 천문학적 숫자이므로, 그게 현대차에 얼마나 부담이 될지는 현재 아무도 체감할 수 없습니다.

 

입찰이란 제도는 건설업계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입찰 한번 잘못하면 회사가 휘청거리기도 합니다. 시쳇말로 "한 방에 훅" 가는 것이지요. 다만 건설업계 입찰에선, 이번 부지 입찰과는 정반대로 너무 낮게 입찰했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현대건설이 IMF사태 이후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 것도,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이던 시절인 1970년대 말 1980년대에 일감을 따내기 위해 중동에서 무리하게 낮은 가격으로 입찰했던 후유증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기업이란 게 원래 위험을 감수해야(risk-taking)하는 법이고, 따라서 위험한 일을 했다고 무조건 비난받을 수는 없습니다. risk-taking 속에서 혁신이 나오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런 위험한 일을 선택하는 과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대차의 이번 입찰은 정몽구 회장이 실무진의 보고를 무시하고 강행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실무진에서는 4조~5조 원 정도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꼭 부지를 확보해야 겠다는 정회장의 강한 의지가 작용했고, 또한 그 돈을 민간이 아니라 한전이 가져가는 것이니 많은 돈을 내더라도 좋은 일 하는 셈이라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애국심까지 발동했던 셈입니다. 아니 애국심을 내세워 실무진의 반발을 제압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한전부지가 10조 원의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특히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를 서울에 세우려는 현대차에게는 어쩌면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의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혹시 그 막대한 부담으로 인해 현대차가 흔들리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현대차는 그냥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일종의 국민기업(national champion)입니다. 독일 사람을 만나도 삼성전자의 휴대폰과 현대차가 가끔씩 화제에 오를 정도입니다.

 

그런 현대차가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지요. 애국심을 그런 식으로 발휘할 게 아니라, 그 돈을 공장을 더 짓고 사람을 더 고용하는 쪽으로 쓰는 게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에 재벌연구를 위해 현대그룹을 인터뷰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현대종합목재 간부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정주영 회장이 내린 판단들이 거의 다 옳았는데, 현대종합목재와 관련해 내린 사업 무렵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현대종합목재에서 실무진이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정주영회장에게 제출했다고 합니다. 그때 정회장은 1순위에서 5순위까지 안을 낸 것 중 그냥 형식상 붙여놓은 5번째 사업을 택했습니다.

 

그리해 업계에서 다른 업체가 추진해 성공을 거둔 1~2순위 사업은 정회장이 내팽개치고, 시베리아 벌목사업인가 하는 5순위 사업을 추진하는 바람에 결국 현대종합목재는 내리막길을 걷고 회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정주영 회장이 성공을 거둔 사업들은 정회장 자신이 전문적 판단능력을 갖춘 사업들이었습니다. 건설업이나 자동차사업이 그런 것들이지요. 그러나 그런 전문분야가 아닌 사업에서, 특히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릿해지는 상황에서 독단적 황제경영이 계속되면, 회사가 타격을 받고 결국 국민경제에 부담이 됩니다.

 

정주영 회장이 정치사업(대통령 출마)에 뛰어든 게 바로 그 극단적 사례입니다.이게 제가 20년 전부터 말해 온 재벌체제의 폐해 중 하나입니다.(총수의 무능이라는 이런 폐해와 더불어, 총수의 부패, 재벌의 중소기업 억압, 재벌의 한국엘리트 오염이 또 다른 폐해들입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재벌총수들이 나이가 들거나 2~3 세로 가면서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지요. IMF사태 때의 재벌들 '줄초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애당초 경영능력의 유전자라는 건 없는 법입니다.

 

좀 작은 재벌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삼성도 이건희 회장이 독자적으로 새로 추진한 사업들, 즉 자동차사업, 영상사업, 유통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삼성은 삼성전자가 워낙 튼튼하고, 조직이 그룹을 이끌어가는 회사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재벌의 황제경영에서 황제가 천재적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엔(예컨대 세종대왕처럼) 의사결정의 신속성이라는 장점이 발휘되어 성장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경제가 catch-up(추격모방) 성장을 해오던 시기에는 꼭 천재적인 황제가 아니더라도 밀어붙이는 힘이 성공을 거두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추격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선진국들이 왕정이나 독재정권에서 민주공화정으로 옮겨갔듯이, 1인의 천재가 크고 복잡한 기업을 혼자서 리드하던 시대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현대차의 이번 의사결정이 부디 시대변화에 역행해서 범한 결정적 패착이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3) 장하성과 안철수 : 정치세계의 어려움 (9월 14일)

 

장하성교수가 <한국 자본주의>라는 책을 펴내면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아래 링크 참조.) 저도 비슷한 내용의 글들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7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인지라 아마도 제 글보다 내용이 훨씬 풍부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분량이 너무 많다고 겁먹지 말고, 사서 관심 있는 부분 부분부터 먼저 읽어가면 되겠지요. 저는 여기서 책의 내용보다는 인터뷰 말미에서 언급한 안철수와의 관계에 대해서 첨언해볼까 합니다.

 

장교수는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재벌개혁운동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입니다. 소액주주운동이라는 방식과 소송이라는 방식을 새롭게 도입했던 것이지요. 저도 그를 통해 재벌개혁운동에 뛰어들었고, 한 동안 언론활동 등을 통해 재벌개혁의 필요성과 방법론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면서 장교수를 보니, 제가 알고 있던 진보개혁교수들과는 달리 주의주장만 부르짖는 게 아니라 "일이 되게 할 줄" 아는 교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옆에서 이것저것 보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저의 주된 관심이 북한문제쪽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근래엔 그와 자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물론 지금도 재벌문제에 완전히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가 2012년 대선을 즈음해 그와 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장교수는 문재인캠프와 안철수캠프 양쪽으로부터 모두 부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해야 좋을지 재벌개혁 운동 등에 같이 했던 사람들로부터 의견을 듣고자 하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당시 안철수란 인물에 대해 자신 있는 판단을 내릴 만큼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교수에게 어느쪽이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으면, 어느쪽에도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모인 사람들 중에 저처럼 이야기한 사람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장교수는 안철수에 대해 확신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쪽 캠프로 갔습니다.

 

그 이후 선거가 끝나고 안철수가 다시 정치조직을 만들려고 할 때, 장교수는 또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저는 그때쯤엔 안철수에 관해 나름대로 충분한 정보를 확보했고, 아울러 대선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행태를 통해서도 그의 정치적 그릇에 대해 자신있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안철수에 대해 "이제 안철수에게는 내리막길만 남아있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장교수와의 그 자리에서 저는 "안철수와 같이 일하려 하지 말라"고 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장교수를 위해서, 다소 기분 나쁘게 들리는 톤으로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역시, 모인 여러 사람 중 그렇게 강하게 말한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제가 정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강하게 말했냐고요. 물론 예전엔 제가 장교수 등보다 정치에 대해 훨씬 몰랐습니다. 하지만 김상곤 교육감의 선거와 정치투쟁에 관여하면서 정치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노무현정권이 기대에 못미친 것을 나름대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한국정치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해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라는 제 책의 제1부는 한국의 정치-정책 분석이 그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또 어쩌다 한국의 정치고수들에게서 정치를 배울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어도 장교수나 그의 주변보다는 정치판단력에 자신이 있었고, 그래서 말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장교수는 제 조언을 듣지 않았고, 결국 이번 한겨레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안철수에게서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가 이번에 책을 낸 것 같이, 한국 경제와 기업의 장래를 위해 많은 일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사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다른 진보개혁 인사들과는 달리, 일이 되게 할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정치와는 이제 분명한 거리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교수팀과 장교수가 같이 할 일들만 해도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냥 한 명의 정치가가 되는 게 아니라 정치에서 성공하려면 '천재적 직관'이 필요합니다. 정치란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닙니다. 특히 한국처럼 정치질서가 자리잡히지 않은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독창적 맑스경제학자인 우노코죠도 정치판과 거리를 두었던 것이지요.

 

한국의 진보개혁인사들도 아직 자기 자리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경우엔, 정치판과 거리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정치판 자체에서 인물이 커나갈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이상돈교수 같은 인물을 외부에서 영입하는 방식이 계속되면 한국의 정치판이 거듭날 수 없습니다. 교수나 지식인만이 아니라 현대그룹에서 일했던 이계안씨 같은 인물들도 정치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기 할 일을 찾는 게 인력의 최적배분에 기여할 것입니다.

 

정치판의 제의를 받았지만, 계속해서 거리를 두고 있는 분들을 우리 모두가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백낙청 선생님을 비롯해 김상조 교수 같은 인사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그대로 할 일이 있고 이때까지 모범을 보여왔습니다. 굳이 제가 여기서 이름을 거명하지 않겠습니다만, 얼마 안 되는 여러 다른 분들도 신중한 자세를 취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6550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