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베를린 통신 (37) : 가난하지만 섹시한 베를린 - 베를린 시장의 사퇴

동숭동지킴이 2014. 8. 28. 02:13

 

 

<베를린 통신 (37) : 가난하지만 섹시한 베를린 - 베를린 시장의 사퇴>

 

어제(8월 26일)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 베를린 시장이 전격적으로 사퇴를 발표했습니다. 다만 당장 그만두는 것은 아니고 12월 11일에 사퇴하는데, 아마도 그 사이에 그의 소속정당인 사민당(SPD)에서 새로운 시장이 선출될 것입니다.

 

현재 베를린은 사민당과 기민련(CDU/CSU)의 연정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 연정은 2016년까지 계속된다는 협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여전히 사민당에서 베를린 시장을 맡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다만 녹색당과 좌파당에서는 의회 해산과 재선거 실시에 의한 새 시장 선출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3년이나 베를린 시장을 역임했던 보베라이트가 사퇴하기에 이른 결정적인 요인은 베를린 국제공항의 open 지연입니다. 원래 2012년 5월에 개항예정이었던 공항이 화재에 대비한 안전이 소홀하다는 문제로 지금까지도 개항을 못하고 있고, 아직도 언제 개항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빨리 빨리"하지만 "안전 제이주의"인 한국과 달리 "느릿 느릿"하지만 "안전 제일주의"를 지키는 독일의 장점이자 단점을 베를린 국제공항 문제에서도 잘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장점을 다 살리거나, 아니면 잘 절충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보베라이트는 물러날 시기를 잘 안 것 같습니다. 더 버티다가 추한 꼴을 보이기 전에 타이밍을 잘 잡은 것이지요. 정치는 타이밍의 예술이라는 말이 새삼스럽습니다.  한국의 정치인 중에 물러날 시기를 잘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또 이렇게 물러나더라도 베를린 시정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점도 독일의 장점입니다.(연방 차원만이 아니라 주 차원에서도 의원내각제입니다.) 의원내각제일 뿐더러, 이탈리아나 일본과 달리 안정적 성격을 가진 의원내각제라는 점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지금 같은 대통령제에서 벗어나, 비례대표가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안정적인 독일이나 북유럽식의 의원내각제를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편 그의 사퇴와 관련해 그의 행적을 돌이켜보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2007년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정치적 위상은 별로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보다 진보적(좌파적)인 독일사회인 만큼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약자인 호모에 대해서도 이렇게 관대한 셈입니다. 제가 계속 강조하는 대로, 좌파(진보파)란 우파(보수파)에 비해 이렇게 사회적 약자를 더 배려하는 것이지요.

 

또한  보베라이트는 베를린을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arm, aber sexy)"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베를린은 독일의 16개 주 중에서 소득수준 면에선 밑바닥에 있습니다. 분단의 영향으로 산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지만 섹시하다"는 멋진 규정으로 베를린 시민들의 마음을 샀습니다. 베를린 시민들에게 은근히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말인 셈입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베를린에 산 지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베를린이 어떤 점에서 섹시한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문화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베를린에서 자란 제 독일어 여선생에게 베를린의 어떤 점이 sexy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섹시하다는 말은 매력적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베를린 사람들은 다소 무뚝뚝하지만, 솔직하고 성실하다. 집세와 음식이 싸다. 다양한 문화 특히 하위문화(subculture)가 존재하며, 약동적이다. 일본 동경의 하라주쿠(原宿)와 비교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알듯말듯 합니다.)

 

어쨌든 국제공항도 중요하지만, 이런 멋진 말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다른 지자체 단체장들도 무슨 물질적 사업 벌이는 데만 치중하지 말고, 이렇게 말 한 마디로 문화수준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멋진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독일의 정치인이 대중과의 공감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정치인에게서 가장 결여된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정치인들의 공감능력은 너무나 수준 이하였습니다. 너무 바빠서 유족을 만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어찌 그리 태연스레 할 수 있을까요. 유시민의 말대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할 수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상조사위나 특검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 하는 법률적 문제보다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한 게 유족이나 국민들과 슬픔을 같이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저는 세월호 특별법을 어떻게 처리해야 마땅한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도자란 사람들 특히 박근혜의 마음 씀씀이는 너무나 한심하고, 사태를 어렵게 만드는 데 누구보다도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버스 사고가 나면 유족과의 사고수습을 담당하던 버스회사 해결사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장례식장(또는 시신이 안치된 곳)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부터 통곡을 하기 시작해 식장 등에 가서는 대성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슬프게 통곡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유족이 그를 달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일종의 술수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 정도로 대성통곡을 하려면, 그 해결사의 수준이 자기 마음을 유족마음과 일체화시키는 경지에 이르러야 했을 것입니다. 도(道)를 갖춘 술(術)인 셈입니다. 박근혜를 비롯한 우리 정치인이 그 정도로 높은 경지는 아니더라도 보통의 이웃과 같은 마음만 가져도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모든 걸 정치인 탓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정치인을 뽑은 게 국민입니다. 또 국민의 문화수준이, 승객을 내팽개친 세월호 직원들의 문화수준(직업윤리)에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국민의 "문화혁명"이 요구되는 셈입니다.

 

물론 문화'혁명'이라고 하니까 단번에 모든 걸 뒤집어 엎는 걸로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혁신의 연속이고, 그걸 통해 "질적인 변화" 즉 혁명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도 바로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베를린 시장의 사퇴에 즈음해서 드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