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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 관계의 변증법 (3) : 관계 단절의 자유

동숭동지킴이 2013. 8. 3. 15:28

 

 

 

<갑-을 관계의 변증법 (3) : 관계단절의 자유>

 

그동안 이런저런 바쁜 일로 인해 갑-을 관계 이야기를 마무리짓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갑-을 관계의 본질적인 문제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불평등한 갑-을 관계가 발생하는 근본원인을 “관계단절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따져보려는 것입니다.

 

노예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노예소유주(귀족, 미국남부의 농장주 등)는 노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채찍질하거나 노예를 팔아버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멋대로 죽여 버리기도 합니다. 주인은 노예와의 관계를 쉽게 단절할 수 있었지요.

 

반면에 노예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제약되어 있습니다. 미국남부 흑인노예의 경우 미국북부나 캐나다로 도망을 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나 사노(私奴)만적(“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느냐 王侯將相 寧有種乎” 하고 외친 인물)처럼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극히 예외적이었고,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은 대개 실패했고 처형되었습니다. 이러니 목숨을 걸지 않으면 “talking instruments”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인-노예의 “관계를 단절할 자유”가 노예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관계를 자유롭게 청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평등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게 역사상 존재하는 다른 불평등 관계의 밑바탕에도 깔려 있는 문제점입니다.

 

남편-아내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죄명을 씌워 쫓아낼 수 있는 반면에, 일단 출가한 아내는 시댁귀신이 되어야 하는 조선시대에서는 남편-아내가 부당한 갑-을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이슬람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니(Sunni)파 이슬람에선 남편이 아내에게 “(인티) 딸리끄”(나는 너와 헤어진다)라고 세 번 말하면 이혼이 성립합니다. 반면에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려면 많은 제약이 부과됩니다. 이런 관계에선 남편-아내의 관계가 불평등한 갑-을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오늘날에는 과거 조선시대와 같은 여성억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의 일자리도 늘어나 이혼하더라도 살아갈 길이 넓어졌습니다. 따라서 한국부인들에겐 부당한 갑-을 관계를 단절할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한국부인들의 지위가 높아져 거꾸로 남성들의 지위를 보장하려는 ‘남성연대’ 같은 조직마저 생긴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동독과 서독을 비교해 봅시다. 많은 점에서 동독인들의 삶이 서독인보다 열악했지만, 남녀 관계는 사정이 달랐다고 합니다. 동독여성은 직업을 갖는 비율이 서독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따라서 이혼하더라도 여성들은 살 길이 있고, 또 북한처럼 국가가 이혼을 억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해 성(性)적 관계에서도 동독여성과 동독남성의 관계는 갑-을 관계가 아니라 훨씬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특집물 “Do communists have better sex?"에 따르면 동독 여성의 성적 만족도가 서독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youtube에서 확인 가능. 별 야한 내용은 없지만 19禁)

 

예전에 동독에서 서독보다 FKK(Freikörperkultur, 번역하자면 자유로운 몸의 문화, 누드해변)가 훨씬 더 발달되어 있었음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남녀 성관계도 동독이 더 여성에게 유리했습니다. 그건 바로 계약단절의 자유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노사관계를 봅시다.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는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관계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등가교환(等價交換)이 이루어집니다. 마르크스도 이걸『자본론』앞부분에서 지적한 바 있지요.

 

노사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노동자와 자본가는 언제든지 서로의 계약관계를 단절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사정이 그러했습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마음대로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함부로 직장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군산의 성매매 여성을 포주가 창살 속에 가두어 두었듯이.)

 

그러나 오늘날 현실을 보면 대체로 노동자는 쉽게 자본가로부터 떠날 수 있는 반면에, 자본가가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그리 자유롭지 않습니다. 큰 회사에선 이사가 되기 전엔 함부로 직원을 자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자본가-노동자의 관계는 자본가가 을이고 노동자가 갑인 관계일까요. 실제 자본가 중에 그리 느끼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뭔가 이상하지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건 원래 자본가와 노동자의 힘이 서로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는 재산을 갖고 있고 노동자는 무산(無産)계급입니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자가 떠나가더라도 버틸 수 있는 반면에, 노동자는 계약관계에서 벗어나면 살 길이 막연합니다.

 

게다가 자본가는 기존의 노동자가 떠나가더라도 쉽게 다른 노동자를 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상대적 과잉인구라고 부른 실업자들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해외로 공장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노동자들도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버티는 힘이 자본가에 비해 취약합니다. 자본이 해외로 움직이는 것에 비해 노동자가 해외로 움직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따라서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지는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당한 해고사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부당해고로 재판에 회부됩니다. 노동자들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인권을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은 노조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본가와 계약조건을 협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노조의 파업은 일시적으로 계약을 단절하는 행위입니다.(직장폐쇄는 여기에 대한 자본 측의 대항수단이지요.) 노조의 파업권을 통해 노동자에게 관계 단절의 자유가 확대된 셈입니다.

 

이리해서 노사의 갑-을 관계 문제가 상당 정도 해소되면서, 기존의 갑-을 관계가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대기업에서 노조의 보호 하에 있는 생산직 노조는 이제 거의 자본과 맞먹는 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화이트컬러의 힘은 몹시도 취약해서, 일부 화이트컬러가 블루컬러로 자리바꿈하는 일까지 생겨났습니다. 최근 현대자동차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는 화이트컬러-블루컬러가 갑-을 관계였는데, 이제 노조가 있는 거대기업에선 그 관계가 많이 대등해졌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거대기업 노조간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회사 부장이 노조에 와서 "자기를 자르지 말라고 경영진 고위층에 압력을 행사해 달라“는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화이트컬러가 블루컬러로 변신하거나 회사부장이 노조에게 부탁을 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노사관계가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력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회사의 규율이 작동하고 있지 않는 셈이지요.

 

어쨌든 이제 한국의 거대기업에선 자본가가 계약관계를 단절할 자유가 크게 제한받게 되었습니다.(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그 제한의 정도가 더 심하지요.)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차 사태를 보십시오. 따라서 적어도 거대기업 정규직 노조에 대해선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갑-을 관계가 희미해져버렸습니다. 특히 정권이 바뀌면 경영책임자도 같이 바뀌는 공기업에선 자본이 취약해 노조의 힘이 강력합니다.

 

반면에 정규직 노조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갑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연봉을 2배 가까이 받을 뿐만 아니라, 힘든 일은 사내하청에게 떠맡기니까요. 게다가 그 사내하청의 월급도 공장 밖의 협력업체에 비해선 낮은 편이 아니므로,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단절의 자유 상실).

 

이리해서 한국의 거대기업에선 자본가-노동자 사이의 갑-을 관계가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갑-을 관계로 전환된 셈입니다.

 

한편, 사회보장 제도도 노사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회보장 제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사관계 단절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이기도 합니다.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살 길이 제공되니까요.

 

회사를 그만두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다면, 회사의 부당한 처우를 참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대우를 보장해야만 회사에서 일을 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유란 좋은 것이지만 세상 뭐든지 지나치면 곤란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도 지나치면 사회문제를 일으킵니다. 관계 단절의 자유도 그렇습니다.

 

노동자들이 누리는 관계 단절의 자유가 지나치면 기업에서 일하려 하는 사람이 별로 남아나지 않겠지요. 일하는 보람 자체 때문에 일하는 사람 빼고는 누가 힘들게 일하려 하겠습니까. 그러면 사회가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사회보장(복지)을 국가가 어느 정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미국에선 흑인 문제 때문에(흑인에 대한 복지 제공에 백인이 반대) 복지가 취약하고 북유럽은 상대적으로 복지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북유럽에선 노동윤리 역시 잘 갖춰져 있습니다.(제가 만난 스웨덴 학자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그 원인으로 지적했습니다만,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복지제도를 악용해 노동자가 함부로 노사관계를 단절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게다가 북유럽 역시 복지제도를 이리저리 변경시켜 왔습니다. 말하자면 균형 해(解)를 찾아서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지가 아직 너무 미비하기 때문에 복지 과잉으로 인한 노사관계 단절 과잉을 걱정할 단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노동윤리와 복지의 적절한 조합에 대한 고민은 미리부터 해두는 게 좋겠지요.

 

그리고 자본가-노동자 사이의 관계가 유산자-무산자라는 원론적 관계로부터 바뀌어 온 부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을 일으킨 자본가라고 반드시 돈이 많은 게 아닙니다.

 

요새는 남의 돈(은행 돈이나 친척 돈 등)으로 기업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기업가 특히 중소기업가들은 별로 힘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본가-노동자 사이의 관계를 옛날 도식처럼 모두 갑-을 관계로 파악하는 건 무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방송사나 영화제작사와 유명 배우(탤런트) 사이의 관계도, 굳이 따지자면 노동자인 후자가 오히려 ‘갑’의 지위에 서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흥행이 유명탤런트에게 달려 있는 이상, 유명탤런트들이 막대한 개런티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영화제작사는 대박을 터트리지 않는 한 돈에 허덕이고, 일반 영화(드라마) 스탭들은 쥐꼬리 같은 임금에 만족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자본과 노동의 일반적인 갑-을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 셈입니다.

 

이처럼 노사관계에서의 갑-을 관계는 불분명해졌습니다. 이걸 변증법에선 “대립물의 상호침투”라고 합니다. 대신에 거대기업과 중소하청기업 사이엔 갑-을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문제가 된 남양유업 사태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지요. 이것은 본사와 대리점 사이의 관계인데, 모기업과 하청업체 사이에서도 갑-을 관계의 문제가 마찬가지로 심각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자본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갑-을 관계 중에는 경제학에서 흔히 hold-up (인질, 볼모) 문제로 파악하는 게 있습니다. 대리점이나 하청업체(협력업체)가 본사나 모기업에 대해 인질이 잡힌 게 있어서 꼼짝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hold-up 문제는 기업과 노동자 사이에도 발생하고, 이는 장기고용계약이나 연공임금제 등과 관련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갑-을 관계와는 무관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예컨대 대리점이나 하청업체가 본사나 모기업과의 사업을 위해 일정한 투자를 했다고 합시다. 일단 그런 투자를 한 이상 쉽게 계약관계를 단절할 수 없습니다. 그 투자를 다른 데 쓸 수 있다면 사정이 다릅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런 투자는 모기업과의 특정한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specificity of assets, 자산특정성.) 다시 말해 그 투자는 일종의 본사나 모기업에 제공된 인질이 되는 셈입니다. 투자한 게 아까워서 쉽게 거래관계를 단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현대차에서 소나타를 생산하기 위한 부품을 만드는 어떤 하청업체가 있다고 합시다. 그 하청업체는 그 특정 부품을 위한 설비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 설비를 폭스바겐 부품을 위한 설비로 활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장을 때려치우지 않는 한, 현대차의 부당한 단가인하 요구 등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대리점도 일정한 장소에 점포를 얻은 것만 해도 큰 투자이고, 또한 제품에 걸맞은 인테리어 따위도 마찬가지로 hold-up(인질) 성격의 투자입니다.

 

따라서 일단 그런 인질을 잡고 나서, 본사나 모기업은 그걸 악용해 불리한 거래관계를 강요하는 것이지요. 이런 행태를 기회주의(opportunism)라고 합니다.(원칙 없이 강자 편에 붙는 기회주의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이건 그냥 시장에 맡겨둘 수가 없고, 국가가 개입해서 부당한 관계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게 작년 대선에서 화두가 되었던 경제민주화의 중요한 한 부분이지요.

 

한편, 국가의 개입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hold-up과 관련된 갑-을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연대하듯이 대리점들이나 하청업체들이 힘을 합칠 수 있습니다. 남양유업 사태에서 대리점들이 협의회를 결성하자 남양유업이 물러선 게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hold-up에 의한 협상력 약화를 ‘을’들의 연대를 통해 보완한 것이지요.

 

또한 갑-을 관계에서 을이 여러 갑과 거래하게 되면 을의 협상력이 높아집니다. 예컨대 현대차의 하청업체가 부품을 폭스바겐에도 공급할 수 있게 되면, 현대차가 부당한 단가인하를 강요하기 힘듭니다. hold-up 되어 있던 자산이 인질 상태에서 풀리는 것이지요.

 

일본에서는 자동차 모기업과 하청업체 사이의 관계가 한국과 달리 덜 착취적입니다. 거기에는 문화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일본에는 자동차 모기업이 한국보다 훨씬 많아서 갑이 지나치게 부당한 거래를 요구하면 다른 갑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국의 을들이 외국 업체와 거래하려면 그만큼 을의 경쟁력이 높아져야 되겠지요. 을의 경쟁력이 높아지려면 을의 노동자 숙련 향상이 필수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을에서 노동자들이 오래 근무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제가 몇 차례 이야기했지만, 이를 위해선 하청업체와 거대기업노동자 사이의 '생활격차'가 축소되어야 합니다. 거대기업의 임금을 억지로 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선, 조세-복지의 강화를 통해 노동자 사이의 생활격차를 축소해야 합니다.

 

이리해서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향상되면 자연히 거대기업에 대한 협상력도 높아지고, 그리해서 부당한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 을도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거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도 완화됩니다. 이게 복지(2차분배)의 강화가 1차분배 문제를 바로잡는 경로인 셈입니다.

 

한편, 거대기업-하청기업 사이에는 hold-up 이외의 문제도 존재합니다. 꼭 투자를 통해 인질이 잡혀 있는 상태가 아니더라도 불공정한 갑-을 관계를 감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갑-을 관계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오히려 더 열악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소기업 중에는 스스로 세계시장을 개척하는 기업도 있습니다. 하지만 좁은 내수시장에서 과당경쟁 상태에 놓여 있는 독립중소기업도 많습니다. 이런 기업들은 부당한 착취를 당하더라도 차라리 거대기업의 하청을 받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착취를 받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그나마 안정적 판로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이 경우에도 holdd-up 상태에서만큼은 아니더라도 관계단절의 자유가 상당 정도 제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기업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더라도 고용되기를 원하는 경우는 실업자 상태로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거대기업의 횡포하에 놓이더라도 일감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하청계열 속에 편입되는 것이지요.

 

외국에서는 성매매여성이 혼자서 고객을 유인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길가에 서 있다가 자동차 타고가는 남자들을 상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건 고객확보가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포주의 지배 하에서 착취를 받는 걸 택하는 성매매여성도 많습니다. 비유가 좀 뭣합니다만, 중소기업 중에 거대기업과의 갑-을 관계를 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따라서 hold-up 문제와 무관하게 모기업-하청기업 사이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가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발전시켜온 것과 마찬가지로, 모기업-하청기업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제도 개선이 필요한 것이지요.

 

위에서도 언급한 하청기업의 단체협상권이 그 개선책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세자영업과 내수독립중소기업들의 구조조정을 통해 이들의 경영환경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당한 갑-을 관계 속에 있는 중소기업들에게 새로운 살 길을 제공해주고, 아울러 부당한 갑-을 관계 개선을 요구할 협상력을 제고시켜야 합니다.

 

앞에서 노동자간 생활격차의 축소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복지 확대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복지의 확대는 좀비 중소기업의 구조조정을 용이하게 해주고, 노동자뿐만 아니라 하청중소기업에 대해서도 부당한 갑-을 관계에 대한 저항력(계약 단절의 자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꽤 길어졌습니다. 다소 지루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리해서 노사관계와 거대기업-중소기업 사이의 갑-을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 단순하지 않은 변증법적 관계임을 알 수 있었고, 제 나름의 해결책도 제시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을 관계는 앞의 연재물 (1), (2)에서 말씀드렸듯이, 경제 이외의 영역에서도 나타납니다. 한국에서 정치인·관료·법조인·학계·언론계와 기업의 관계는 전형적인 갑-을 관계입니다. 기업은 사업을 계속하는 이상 이들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정치인 등은 일방적인 공격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성 같은 재벌에선 이런 사회유력층을 모시기 위한 특별조직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단순하지 않아, 삼성쯤 되면 사회유력층을 포섭해서(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하고 약점을 잡는다든가 하면서) 자기 말을 듣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삼성이 갑의 지위를 갖게 된 측면도 있는 것이지요.

 

삼성은 중앙일보라는 자신의 언론기관을 갖고 있고, 많은 사회유력층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놓아 일부 유력층의 공격은 다른 유력층을 동원해 막아낼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그들은 멋대로 주무리기도 하지요. 예컨대 2005년에 드러난 X 파일을 보면, 삼성이 재경부장관 임명에 힘을 행사한 이야기까지 나오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한 말은 바로 이를 지칭한 것입니다. 삼성왕국이니 삼성공화국이니 하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변증법’이란 말을 쓴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재벌의 문제는 재벌총수의 문제, 재벌과 중소기업의 문제만이 아니라 삼성 같은 재벌이 나라를 멋대로 주무르는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걸 바로잡으려면 일단 사회의 유력층이 재벌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직업적 긍지를 지켜야 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갑-을 관계가 존재합니다. 재미 있는 사례 한 가지만 소개할까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정치인, 관료들에게는 기자가 갑입니다. 기자가 정치인, 관료에 대해 좋지 않게 신문에 써대면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기사 한 줄에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장관 목이 날아가기도 하지요. 또 정치인-관료에게는 기자와 관계단절할 자유가 없습니다.

 

예전에 어쩌다 꽤 알려진 정치인 몇몇을 비롯해 신문사 간부들과 함께 하는 저녁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신문사 간부가 술이 약간 취해 정치인들에게 좀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정치인들은 꼼짝 못하고 신문사 간부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쩔쩔맸습니다(적어도 저에겐 그렇게 보였습니다).

 

정치인이라면 권력자인데, 그 권력자 위에 또 다른 권력자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 정치인 중에는 진보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인도 있어서 그에 대해 불쌍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구한테도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기자들은 정치인이 비위 맞춰준다고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신문사 간부가 좀 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기자들은 기삿거리를 주는 정치인을 좋아한다"고 추가를 했어야 했습니다. 물론 기삿거리를 줄 정도의 정치인은 상당한 경지입니다. DJ가 이걸 잘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이게 안 되면 나름의 비전, 정책, 전략전술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하겠지요.

 

어쨌든 유명 진보파 정치인이 을의 처지에서 너무 기개가 부족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큰 정치인이라면 을의 처지에서도 기죽지 않고 호탕한 모습을 보여야 할텐데 제가 보기엔 그 진보파정치인은 그런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노무현은 조선일보에 굴하지 않았지요.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갑-을 관계가 존재합니다만,  사회 각 권력들이 상호견제해서 특정한 갑이 나라 전체를 함부로 주무르지 않도록 해야 겠지요. 그런 토대 위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가는 것이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부당한 갑-을 관계를 바로잡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 나름대로 제시한 “갑-을 관계의 변증법” 해설을 마치겠습니다. 혹시 필요가 있으면 나중에 내용을 추가할까 합니다.

 

<참고로 '계약단절의 자유'를 아는 후배가 가르쳐준 8字成語를 응용해 다음과 같이 적어보았습니다. 썰렁?

失於地面  高滿鈍多 (싫어지면 그만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