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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민이 살아가려면 - 병원과의 한판 승부 ?

동숭동지킴이 2013. 5. 5. 14:37

 

 

(며칠 전에 페이스 북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때까지의 제 페북 글 중 최고로 많은 댓글(제 답글까지 포함해서 46개)이 달렸습니다. 그 중에는 제 글에 공감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혹시 제 글이 불러올지 모를 부작용을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의료 현장 사정을 알려주는 분들도 있어서, 우리 의료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원래 글의 우려에 대해선 제가 댓글로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아예 원래 글에서 좀더 친절하게 설명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글을 약간 손봐서 여기 블로그에 올립니다. 페북 친구가 아니라서 페북 글을 보시지 못한 블로그 방문자에게도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의료현장의 실태를 소개해주신 분들 중 이화여대 권복규 교수님의 댓글을 아래에 첨부했습니다.)

 

 

 

<한국의 서민이 살아가려면 - 병원과의 한판 승부 ?>

 

 

오늘(5월 2일) 점심 때 식당 아주머니(60대 정도)로부터 새겨볼 만한 일화를 들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며칠 전에 이어 오늘 두 번째 들린 식당에서 혼자서 순두부를 시켜 먹으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식당에 좀 늦게 가는 편이라, 식당 손님은 안쪽에 몇 명 있다가 곧 나가고 저 혼자가 되었습니다. 밥이 나왔는데 양이 많다고 제가 좀 덜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제 근처에 앉더니 자기 남편도 소식(小食)을 했다고 하면서 남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갔을 뿐인 식당인데 저를 말동무 삼는 게 좀 당황스런 일이긴 했습니다만, 그냥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으면서 일종의 무용담(?), 특히 서민이 살아가는 무용담을 듣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밥 먹고 산보를 하는데, 오늘은 산보 대신에 밥 먹고도 10여분 동안 아주머니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 외로운 처지였고, 또 제가 말을 붙여도 들어줄 만한 사람 같았는지(자뻑?), 아니면 그게 하나의 상술인지 모르지만, 자기 남편이 세상 떠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병원 한번 가지 않던 건강한 체질이었는데, 어느 날 식당에서 손님들에게 서빙을 하다가 갑자기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19를 불러 근처의 한국 최고 병원 응급실로 옮겨 갔다고 합니다.

 

 

119가 왔을 때 119 대원이 목을 짚어보고 눈동자를 열어보더니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했고, 아주머니 자신은 식당 일을 계속해야 하는 형편이라 남편 혼자만 병원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원으로 떠난 지 7분쯤 후에 전화가 와서 병원으로 급히 오라고 해서 달려 갔다고 합니다. 병원에선 심폐소생술도 했지만 소용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주머니가 억척을 발휘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입니다.

 

 

남편은 사고 6년 전쯤에 M보험회사의 보험을 들어 놓은 상태였고 그동안 600여만원을 불입했다고 합니다. 그 보험에는 심근경색일 때 1500만원, 간암일 때 3000만원 하는 식으로 보상을 하게 되어있는 보험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심근경색"일 때 1500만원이라는 자구의 의미였습니다. 아주머니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병원의 진단서를 제출했는데, 그 진단서에는 119 대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심근경색 추정"이라고 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걸 들고 보험회사에 갔더니 보험회사에서는 '심근경색 추정"일 때는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고, "심근경색 확정"이어야만 보험금을 지급한다고 했답니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아주머니가 항의를 했더니, 그동안 불입한 600여만원은 돌려줄 수 있고 (물론 이자없이 원금만), 꼭 보험금을 타려면 병원 진단서를 새로 발급받아오라고 했답니다. 자식들도 모두 학자금 융자로 대학을 다녀야 했을 만큼 빠듯한 살림이라 1500만원은 아줌마에게는 큰돈이었습니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본격적인 활극입니다. 아줌마는 남편이 실려갔던 병원 응급실의 담당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젊은 담당의사(아마도 인턴 혹은 레지던트)는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으면서, 또 한편 손으로는 볼펜을 빙글빙글 돌려가면서 아줌마를 응대했습니다.

 

 

아줌마가 사정을 설명하자 의사는 앉은 채로 위아래를 흘낏흘낏 쳐다보면서 "우리 병원에서는 병원장 가족이 와서 새로 진단서를 발급해 달라고 해도 발급해 주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진단서를 새로 발급하려면 부검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남편을 매장한지 1주일이 지난 터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신에 칼을 대는 건 한국에서 기피하는 판인데, 묻은 시신을 다시 파서 부검을 한다는 건 아줌마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에 따르면 여기서 문제는 그 답이 아니라 답할 때의 태도가 사람을 깔보며 컴퓨터 장난을 치고 볼펜 돌리기를 하고 있는 자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을 잃어 제 정신이 아닌 아줌마는 자기 말로 "뚜껑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갔던 서류를 가지고 그 의사를 후려 갈겼습니다.(서류로 "귀싸대기를 갈겼다"고 표현함.) 그러자 의사는 왠 이런 미친 여자가 있는가 하는 식으로 벌떡 일어나, "아니 여기가 어딘데 무슨 짓을 하느냐"고 소리쳤습니다.

 

 

그 다음의 대응(강조하는 의미에서, 조어능력이 탁월한 일본말까지 소개하자면 やりとり)이 주목할 만합니다. 아줌마는 일갈했다고 합니다. "의사란 게 찢어진 곳 꿰매고 피나는 것 막으면 다인 줄 아느냐. 아픈 사람 마음을 달래 줘야 하는데 넌 뭐하는 의사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주눅 들기 마련인데, 의사가 마음을 달래는 일도 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되치기’를 한다는 건 보통이 아닙니다. 대학도 나오지 않는 (아니 대학 나왔더라도) 아줌마가 어찌 이런 순발력 있는 표현이 나올 수 있는지 놀랄 일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못합니다.

 

 

병원에서 의사나 직원과 고함지르며 싸우는 사람들은 꽤 있겠지만, 의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공격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조금 밑에 추가하는, 좀 높은 의사와의 일화까지 감안할 때, 아주머니는 대단한 싸움꾼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머니에게 “대단한 싸움꾼이다”고 했더니, 사실 부모가 여자라고 자기를 학교에 보내지 않아서 그렇지, 학교 공부만 제대로 했으면 한 가닥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듣는다고 했습니다.

 

 

정치에선 의표를 찌를 줄 알아야,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고 또 대중의 감동을 살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후보나 안철수후보가 이 아주머니 정도의 정치력만 갖고 있었더라도 승리할 수 있었을 듯싶습니다. 너무 지나친 이야기인가요. 하하하.

 

 

어쨌든 그러면서 다툼이 커져 30분 가량이 지나자 마침내 힘깨나 쓰게 보이는 병원 직원 두 명이 와서 아줌마를 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아줌마는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는 상태였는지라 들려 나가면서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행정실이었고 자신의 입에 가제를 놓고 물을 부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줌마에게 행정실 과장은 왜 그러느냐고 다정하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아줌마를 데리고 간 직원들이 상황을 이야기하자, 아줌마는 과장의 따뜻한 말씨가 자극이 되면서, 아까 젊은 의사 때와는 달리 설움에 받쳐서 격하게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행정실 과장은 내일 다시 오면 해결방도를 찾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찾아갔더니 젊은 의사보다 높은 외래담당의사 방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 의사는 역시 거만한 눈빛과 말투(아줌마의 주관적 표현이므로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로 "왜 그러냐"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아줌마는 "자신은 돈 따위 필요 없다. 자기를 응대한 젊은 의사 xxx를 쫓아내라. 그런 의사는 한국 최고의 이 병원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했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도 의표를 찌르는 의외의 대응이지요. 보통은 사정을 하면서 돈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상대측의 약점 즉 젊은 의사의 태도를 ‘최고의 병원’과 결부시켜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런 의외의 대응에 놀랐던지, 의사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돈을 받게만 해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진단서에다 몇자 추가하는 방식으로 수정을 해서 (새로 발급하는 것은 아니고) 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 수정한 서류를 넘겨주는 게 아니라, 행정과장으로 하여금 아예 그 병원에서 보험회사로 바로 팩스를 보내게 했답니다.

 

 

그리해서 아줌마가 그 자리에서 바로 보험회사에 갔더니, 담당직원이 차렷자세로 자신을 응대하면서 보험금 1500만원에다 기존의 불입금 600여만원까지 합친 금액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병원과 보험회사의 관계가 어떻길래 병원에서 직접 팩스를 보냈다고 이렇게 보험회사 태도가 달라질까요. 아니면 이 아주머니를 우습게 봤다간 큰코 다친다고 병원직원이 보험회사에 말을 전해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무용담을 이야기하면서 아줌마는 "똑똑하지 않으면 차라리 무식해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터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위의 설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아줌마는 높은 학력이 없다뿐이지 대단한 순발력을 가진 아주 "똑똑한 싸움꾼 아줌마"였습니다.

 

 

그러니 아줌마의 모토는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돈이 없거나 빽이 없으면 억척성이 있어야 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야 한다."

 

한국에선 돈으로 떼우거나, 빽으로 떼우거나, 그게 없는 서민은 몸으로  떼워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몸도 쓰긴 했지만 남다르게 억척성과 머리까지 쓴 셈입니다. 보통 서민은 고달프게 몸으로 떼워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이왕 이야기하는 김에 이 스토리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사회 문제점을 간단하게 짚어 봅시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보험회사에서 상품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또는 불완전한 상품을) 판매한 부분입니다. 도대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는데, 진단서에 "심근경색 확정"이면 보험금이 나오고 "심근경색 추정"이면 보험금이 안 나오는 계약이란 게 말이 되는 계약이라 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아줌마는 당연히 계약 당시에 그런 차이를 몰랐습니다. 보험사 내부 규정에 그런 걸 만들어 놓고 정작 일이 터지면, 그런 규정을 악용해 보험금을 안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지요.

 

 

아줌마 말로는 자신에게 보험을 들게 한 보험설계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그 보험설계사의 친척이 같은 보험을 들었다가 마찬가지로 심근경색으로 죽었는데 심근경색 추정이라고 진단서에 써진 바람에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보험설계사의 사례는 식당 아줌마 사례의 1년 전에 터진 일이었는데, 아줌마 말을 듣고 재심을 신청했지만 결국 못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요즘 TV 등에서 많이 나오는 보험 광고 중에 비슷한 경우가 꽤 있다는 이야기를 아줌마가 들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아줌마 말이 사실이라면, 일종의 사기성이 농후한 상품을 팔고 있는 셈인데, 우리 금융감독원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다음으로 병원의 문제입니다. 병원 의사도 사람인지라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병원의 응급실 의사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답답한 환자는 고함지르고, 사람은 죽어나가니, 의사 노릇 해 먹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최근 말썽난 "라면 상무"처럼 황당한 환자 가족도 심심찮게 있을 것입니다. 조폭 같이 말썽피우는 환자(가족)도 있을 것입니다. 아줌마를 상대한 젊은 의사도, 좋게 해석하면, 지친 근무 중에 잠깐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며, 뗑깡 부리는 사람들을 가끔씩 접하다 보니 아줌마를 그런 뗑깡 족 중의 한 명으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정신이 없는 상태라, 젊은 의사가 컴퓨터로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게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아줌마의 머리를 볼 때 그런 착각의 가능성은 크지는 않다고 봅니다만.)

 

그러나 응급실 특히 큰 병원응급실을 포함해 병원에 가본 사람 중엔 의사가 좀더 친절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과거에 의사나 병원의 불친절을 몸으로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17년 전의 일입니다.

 

제 인척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갔는데, 젊은 담당의사가 너무나 불친절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병원에 도착한 또 다른 환자인척이 큰 병원의 과장의사였습니다. 그래서 그 과장이 자기 신분을 밝히고 그 젊은 의사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하는 것을 제가 옆에서 목격했습니다. 빽(권력)을 쓴 셈입니다.

 

게다가 의사쪽에서 무슨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니지만, 수술을 담당한 교수의사에게 꽤 큰 액수의 촌지(?)가 가욋돈으로 건네졌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치료 잘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의사 집안에서 의사에게 가욋돈을 건넨 것이지요. 그러니 결국 빽과 돈이 모두 동원된 셈입니다.

 

이런 돈과 빽이 없으면 몸으로 떼워온 게 우리 현실이었습니다. 여기서 "몸으로 떼워 왔다"는 의미는 불친절과 무성의를 몸으로 겪거나, 아니면 아줌마처럼 악을 쓰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새는 시민들의 권리의식이 강해져 옛날보다는 나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고칠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고쳐야 할까요.

 

돈이나 빽 없는 환자가 괄시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여러 의사분들이 제 댓글에서 우려했듯이, 환자나 그 가족이 자기들 뜻대로 안 된다고 함부로 고함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어디 마음 놓고 환자를 진찰할 수 있겠습니까. 버스 기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에 대해 가중처벌하는 법을 만든 것은, 그런 폭력이 다른 승객에게도 위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면 상무’를 엄벌한 것은 그런 행동이 다른 승객의 안전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의사가 폭력에 노출되면 다른 환자 치료에도 영향을 줍니다.

 

아주머니가 서류로 후려갈긴 것도, 작기는 하지만 어쨌든 폭력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걸 도덕적으로 비난할 게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뀌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병원 수가를 포함해 도대체 뭘 어떻게 고쳐야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올바른 의료선진화의 방향이란 의사 - 환자의 관계가 적어도 지금과는 달라지는 모습이겠지요.

 

무릇 갈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의 올바른 소통을 위해선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합니다. 환자는 힘든 의료환경, 특히 응급실 의사들이 정신없이 시달리는 어려운 환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반대로 의사도 환자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의사-환자 사이의 관계에는 경제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의사가 많이 갖고 있고 환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게 의사-환자 관계가 승무원-라면상무 관계와 다른 부분입니다.

 

다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의사-환자 관계와 의사-환자가족 사이의 관계는 좀 다릅니다. 그리고 환자가 살아있을 때와 죽어버렸을 때의 의사-환자가족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아주머니가 고함을 칠 수 있었던 게, 이미 남편(환자)이 죽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요새는 인터넷 덕분에 환자도 많이 똑똑해 졌지만, 그래도 의사-환자 사이에는 분명한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합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경우엔 대등한 거래가 불가능합니다. 환자는 자기 생명이 걸려있는 처지인지라, 대체로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의료보험이 안 되는 고가의 약처방이나 검사라도 의사가 하라고 하면 해야지요.

 

이런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의료와 관련해선 모든 나라에서 수가 등 여러 가지를 규제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많은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많은) 의료 소송을 통해 이런 비대칭성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한국에서는 돈, 빽, 몸이 동원되는 것이지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한국을 포함해 어느 나라에서건 돈이나 빽이나 몸을 동원하지 않아도 의사의 윤리에 따라 환자를 성심성의껏 보는 의사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의사가 압도적 다수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주머니처럼 원래 병원에서 해 줄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는 경우에 돈이나 빽이나 몸이 동원되는 게 많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주머니는 처음에 젊은 의사가 행정과장처럼 대응해주었더라면 자기가 3천만원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말을 100%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의사와의 싸움을 합리화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무의식적으로 주입시킨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줌마는 남편이 죽고나서 삶의 자세가 바뀌어 “내려놓기로 했다. 어려운 사람이 지나가면 그냥 밥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그릇의 인물이라면 그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이 기억납니다. 버스회사에서 교통 사망사고가 났을 때 피해자 가족과의 분쟁을 처리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해결사는 빈소에 도착하기 멀리 전부터 울음을 터트리고, 빈소에 와서는 대성통곡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리하면 피해자 가족이 당황해서 도대체 고인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그 해결사는 대성통곡을 계속하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피해보상 협상에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피해자 가족과의 ‘소통’을 위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의사-환자(가족) 사이의 관계에서도 공감대를 만드는 일이 필요합니다.

 

버스해결사의 사례를 참고해 혹시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보험회사의 보험 상품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기 전까지는, 일단 의사-환자(가족)가 직접 만나지 않고, 분쟁이 일어나면 앞의 행정과장 같은 해결사가 환자(가족)를 만나도록 하는 방식 말입니다. 의사가 태도를 바꾸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환자-의사 관계 개선을 위해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겠지요. 그건 전문가들이 고민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삼아 제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래 개인치과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의사가 치료하면서, 무슨 처치를 할 때마다 연신 “자 조금 아플 것입니다”는 말을 너무나 자주 하는 것이었습니다. 뭐 그렇게 아픈 처치도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황송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의사 개인의 성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치과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공공성이 강한 의료분야에 대해 무조건 경쟁을 심화시키는 게 정답인지도 의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답을 찾아 주십시오.

 

아줌마는 남다른 억척성(싸움꾼 기질)과 머리(순발력과 자유로운 발상)가 있어서 사태를 해결했습니다. 게다가 밑의 권교수가 지적하듯이, 사실은 서류조작(?)이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바람직한 선진국이란 빽, 돈, 몸쓰기(악쓰기)와 무관하게,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되는 사회"일 것입니다. 한국에선 빽과 돈이 있으면 안 될 일도 되었기 때문에, 몸으로라도 안될 일을 될 일로 만드려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평균적인 서민이 바람직하게 살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어렵습니다. 재력과 권력이 없는 서민이 남다른 억척성과 머리가 없이도 억울하게 살지 않는 사회가 바람직한 선진사회일 것입니다.

 

제가 한국사회의 문제점으로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을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셋 중에서도 아주머니의 사례에서처럼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 점심 식당에서의 에피소드였습니다.

 

 

(이화여대 권복규 교수의 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심정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실은 <심근경색 추정>은 이 경우에 부검 없이 의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진단입니다. 이미 사망하셔서 응급실에 오셨거든요.

 

진단서는 법률 문서고, 만약 이 분이 나중에 어떤 이유로 부검을 했는데 사인이 심근경색이 아닌 뇌졸중으로 판명되었다면 의사는 <오진>을 한 것이 되어버리죠. 이 남편분은 급사를 하셨는데 우리나라의 부검율은 5%에도 미치지 못해서 사전에 어떤 병인지 알고 있고 병원에서 임종한 환자가 아닌 한 대부분 <추정>으로 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보험회사가 <심근경색 확진>이어야만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 하면 이런 경우에는 환자를 부검을 하도록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때도 <심근경색>이 사인으로 판정될지는 물론 확신할 수 없고, 이런 경우는 <사자를 두 번 죽이고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의료진은 또다시 원망을 듣습니다.

 

이런 <진단서 고치기 문제>는 제가 의료윤리 교육시간에 사례로도 쓰고 있는데 아무리 선의라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처음 젊은 의사보다는 자의로 진단서를 고쳐 준 두번째 상급 의사가 문제가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인의 상식과는 반대되게도 말입니다.

 

물론 이 아주머니에 대한 젊은 의사의 태도는 변명이 어렵습니다. 그러지 않도록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지만...실제 의료 환경에서 가뜩이나 예민한 모든 분들께 친절하고 자상하기란 쉽지 않지요. 이는 의사들이 자성해야 할 부분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주 똑똑하지 않으면 아주 무식해야 한다>는 이 <삶의 지혜>로 인해 병원에서는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멱살잡이부터 시작됩니다.사실 보험과 관련된 부분은 정말 어려운데 어떤 환자분은 난소암으로 판명되면(이를 위해서는 개복하여 조직검사를 해야 합니다) 보험금 3천만원을 더 받을 수 있다며, 대장암 전이로 보이는 난소의 개복수술을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개복을 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도요. 저도 의대교수지만, 병원에서 불쾌하고 불친절한 경험 많이 겪었습니다. 하드웨어에 비해 아직 의료문화와 상호신뢰와 같은 소프트웨어는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료문화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의사뿐 아니라 환자 쪽에서도 이해와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교수님과 같은 여론주도층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런 노파심에서 좀 길게 댓글 달았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양해하신다면 이 사례는 제가 학생 교육용으로 좀 빌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