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논문, 칼럼 등 소개

강경선 교수의 '상고이유서' 소개

동숭동지킴이 2012. 7. 31. 13:21

 

(곽노현 교육감 사건과 관련된 강경선 교수의 상고이유서를 아래에 소개합니다. 사건 내용에 대해 잘 정리하고 있고, 또 법과 도덕의 관계와 같은 여러 가지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좀 길기는 합니다만 한번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상고이유서

 

피고인 강경선

 

1. 머리말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최고법원인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됨을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강의에서 말로만 언급했던 우리나라의 최고법원인 대법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재판이 개인적 불운이나 집안의 우환으로 비춰질 수 있겠으나, 법정에 서보지 못해서 항상 날지 못하는 새처럼 생각하면서 법학을 가르쳐온 저에게는 일생에 주어지기 힘든 행운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먼저 제가 이미 받았던 두 번의 재판에 대한 소감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애당초 이번 사건에서 ‘돈을 주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바로 저였기 때문에 제가 나머지 두 사람(곽노현교육감, 박명기교수)에게 끼친 불행을 남의 일이라 생각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더구나 고등법원에서의 판결결과가 나머지 2인이 저보다도 훨씬 가혹한 실형을 받고 있으며, 실형이 미치는 효과가 박명기교수의 경우는 사회적 불명예 속에서 교수직을 떠나야 했고, 곽교육감의 경우는 교육감직의 박탈과 거액의 선거비용의 반환이라는 엄청난 부담을 져야하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법원의 판결이 가지는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원래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어렵게 모았던 2억원이라는 돈은 박명기교수의 경제적 채무를 해결하는 데 사용되기는 커녕 오히려 국가의 몫으로 중간에서 증발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일은 처음부터 ‘사건’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일을 진행할 당시에 저나 곽교육감이나 불법인식이 전혀 없었고, 다만 이 일이 노출이 되는 경우에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오해만 난무할 뿐 결과는 잘 밝혀지리라고 확신했던 일상관계상의 ‘궂은 선행’의 일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건이 되면서, 검찰은 우리들의 자백에 가까운 상세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기소유지를 위한 기록으로 가득채워 언론에 보도해서, 우리들의 행위가 선거법을 위반한 범법행위라고 여론으로 기정사실화시켜 놓았습니다. 지방법원의 1심 판결과정은 다행히도 철저한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한 결과 200시간에 걸쳐 우리들의 행적을 샅샅이 밝힐 기회를 준 결과, 그래도 70% 만족할만큼의 사실관계를 정리해주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사실관계를 밝히는 작업에 진력하다보니, 법률적용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미흡하지만 그래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판결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항소심에 가게 되었습니다. 검찰은 길고 긴 공판중심주의 심리과정에서 많은 것들의 진위가 밝혀졌고, 법원조차 배척했던 그런 사실들을 전혀 수정함이 없이 종전과 동일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항소심에 임했습니다. 정말 납득할 수없는 검찰의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소장은 과연 불변이어야 할까요? 철저한 수사를 기초로 기소를 해야 하고, 또 재판도중에라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경우에는 기소를 철회해야 하는 것이 검찰의 마땅한 태도일텐데도 불구하고, 사건의 기록을 전혀 가감 삭제하는 노력없이 요지부동 처벌만을 요구하는 그런 자세가 법과 질서를 제1차적으로 담당하는 검찰이 해야할 태도일까요?

 

고등법원의 재판부는 재판이 3월 6일 시작해서 4월 3일 간에 불과 4차례의 공판만 열었을 뿐 더 이상 사실관계를 밝힐 기회를 주지 않았고, 법률적용에서도 상급심으로서의 특별한 고민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항소심이 한 일이란, 법관으로서 우리나라의 법을 들여다보기보다는 일반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형량을 조정하는 정도의 일만 했을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바르게 정하는 헌법적 책무를 가진 기관이 검찰과 법원인 것입니다. 우리 피고인들은 오해가 난무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해서, 바보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검찰의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법원의 신문에 응했습니다. 피고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 답변하고 설명하는 데까지입니다.

 

그러나 법원과 검찰은 헌법이 부여한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종국적 책임자인 것입니다. 피고인이 진술하고 제공한 자료보다도 더욱 더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법의 해석과 적용을 더 정확히 해나가야 할 책임은 검찰과 법원에 있는 것입니다.

 

혹은 시간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재판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한 사건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완벽한 판결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핑계에 불과하지 검찰과 사법부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정당화논거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검찰과 법원의 판결이 미치는 영향이 판결 당사자에게나 더 나아가서 이 사회에 엄청난 파급 효과가 있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법’이 아닌 뭇사람들의 떠도는 ‘여론’(public opinion이 아닌 doxa억견)에 편승해 재판을 해버린다면 우리나라의 법과 질서는 검찰과 법원 외에 과연 누가 담당해야 할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사건의 진실

 

우선 저는 2010년도 5-6월에 있었던 서울시 교육감선거에 전혀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거에 관련된 인물이나 진행된 사정에 대해서 상식적 판단외에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에 대한 이유를 말씀드리면 저는 똑 같은 시기에 제가 속한 방송대(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총장선거에 출마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저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던 당시입니다.

 

다만, 저나 곽노현교수나 워낙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간혹 전화로 “서로 잘해나가자.”라는 격려전화만을 했을 따름입니다. 검찰이 강조하는 5월 19일 인사동 향정식당에 제가 참석했던 이유는 그날이 본선에 들어가기 전날이기 때문에 곽노현에게는 매우 중요한 날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서, 선거대책본부에 격려차 직접 찾아갔다가 향정식당에 가야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갔다가 거기 있던 여러 사람들과 우연히 합류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은 재판도중에 많은 설명을 통해서 충분히 납득된 사실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지속적으로 저도 주요 선거과정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마치 계획된 식사자리인 것처럼 그림을 그려놓은 것을 보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에 곽노현교수는 교육감에 당선이 되고, 7월 1일자로 서울시교육감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저는 7월 10일 방송대 총장선거에서 당선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곽교육감은 초기에 서울시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많은 학교와 인사들을 만나고 다녔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저와 만나는 것도 가끔 집에 돌아갈 즈음에 약 30분 정도 안국동 정도에서 만나서 휴식을 취하면서 담소를 나눴습니다.

 

그러던 중 2010년 10월 하순에는 약간의 색다른 고민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곽교육감이 스웨덴 출장가기 직전에 안국동 생맥주집에 단 둘이 들어가서 이 일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인물들 모두가 생소해서 앞뒤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후보사퇴를 했던 박명기교수가 찾아와서 괴롭힌다는 말이었습니다.

 

선거과정에서 합의한 내용을 이행하라는 독촉이었다는 것인데, 도무지 모르는 일이었고, 박교수의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두어 번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국정감사자리에서 민주당국회의원이 찾아와 교육감에게 “합의한 것이 있으면 빨리 이행해야 하지 않느냐?”하는 내용까지 들어서 놀랬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시켜 알아보니 “글쎄, 이보훈이가 그런 약속을 했다지 않냐?”하면서 약간의 성냄과 아주 큰 낭패감을 표시했습니다. 그후 이보훈과 곽교육감과 세 명이 두 번 만나기도 했지만(교육청 근방 일식집 ‘단’, 안국동 한식집 ‘다정’), 저는 평소 성격이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제 일이 아닌 경우에는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고 두 사람 사이에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서 대화내용을 깊이 듣지 않고 주로 밖에 나와서 바람쐬다가 들어가곤 했습니다. 다만, 스웨덴 출장 1주일 동안 제 기억속에는 “노현이 머리가 참 아프겠구나.”는 정도만 남아있었습니다.

 

스웨덴 돌아와서 약 1주일 지나 곽교육감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곽교육감은 저에게 박명기교수를 만나 오해를 풀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박명기교수와 첫 대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곽교육감을 가까운데서 도와주던 김윤태교수(우석대)도 함께 했습니다. 박명기교수는 처음 만난 것이고, 김윤태교수는 전에도 인사는 했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곽교육감의 부탁을 받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곽교육감은 선거기간 중에도 후보단일화는 꼭 필요하지만 절대 조건을 단 단일화는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지시를 한 점과 또한 그후 이보훈-양재원 사이의 (합의답지 않은) 합의과정이 있었다고 해도 곽교육감은 그것을 전혀 몰랐고, 10월 중하순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었다는 점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박명기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곽교육감이 불법적인 부탁을 할 리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저도 불법적인 일이라면 할 리가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윤태교수가 주선을 해서 2010년 11월 17일(목)에 서울교대 근처 남촌식당에서 세 사람이 처음 만났습니다.

박명기교수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낯선 제가 나타난 것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을 돌려가며 자신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곽교육감을 비난했습니다. 또한 진보진영도 똑같이 비난했습니다. 특히 곽교육감이 이러이러한 내용을 합의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저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뭔가 잘못알고 있다. 곽교육감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몇 번이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내가 아는 곽교육감은 결코 그런 성품이 아니고, 이번도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옆에 있는 김윤태교수도 마찬가지의 말을 박교수에게 반복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박교수님을 만나러 온 것은 이런 사정을 설명해주고 위로해주고 오해를 풀어 드리려 온 것이지 합의이행을 말할 것 같으면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박교수는 그날 그런 자세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박교수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곽교육감에게 이런 사실을 확인해서 다시 답을 주겠노라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이틀 후인 11월 19일 저녁에 다시 만났습니다. 박교수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바로 이틀 뒤에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시간끄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박교수와의 신뢰쌓기가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 김윤태교수는 곽교육감에게 만남사실을 보고하고, 또 확인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같은 식당에서 둘 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첫날에 이어 박명기 교수는 자기가 지고 있는 큰 빚에 대해서 설명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것을 알아들을 리도 없고, 그저 큰 빚을 진 정도로 새겨들었습니다. 선거기간 중에 지은 빚을 설명할 때는 많은 영수증들을 보여주면서 설명했습니다. 제가 알 필요도 없는 것이라서 그저 열심히 들어주기만 했습니다.

 

문제는 곳곳에서 자신이 지금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을 섞어 넣었던 것입니다. 한 신문기사를 들고 와서 “내가 바로 이 슈퍼마켓주인 심정입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주인은 깡패들의 빚독촉에 자살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박교수는 산에 올라가 뛰어내리고 싶다는 말도 했고(그래서 제 머리 속에는 노무현대통령과 오버랩되는 기억도 남아있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뛰어들고 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박교수는 이외에도 교수인 자신이 돈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창피스럽다고 하면서도 여러 가지로 자신의 어려운 심정을 계속 호소해왔습니다.

또한 저를 힘들게 한 것은 빚중에 일부는 ‘카드돌려막기’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저는 진땀이 났습니다.

 

이런 만남과정에서도 첫째 날과 둘 째날에 박교수와 살아온 과거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박교수가 80년 당시 서울역에서 있었던 서울의 전 대학생들이 모였던 대규모 시위에서 사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되었고, 유시민씨나 양재원씨와 친구이면서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못했던 그 당시에 이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함과 존중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모임까지 가졌습니다. 이때까지 제가 느꼈던 박명기교수의 문제점은 고립무원과 같은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파악했습니다. 박교수는 선거과정에서 친구인 양재원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잃고(배신당하고), 단일화했으면 당연히 곽교육감이 자신을 잘 대우해주려니 생각했는데 곽교육감이 자신을 홀대하고, 따라서 교육청관료들도 이 분위기를 간파하고 자기는 이제 교육청에 가도 전과 달리(전에는 교육위원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따랐을 것임) 사람들이 경시하는 분위기이고, 거기에다가 사실상 교육감을 두 번씩이나 떨어진 결과가 되어 경제적으로 채무가 너무 커져 있다는 것입니다.

 

요약해서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상실감’이 극대화된 상황으로 파악했습니다. 얼굴은 흑빛이었고,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아직까지는 곽교육감의 합의사실에 대해 오해가 남아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 만난 다음 저는 곽교육감을 만나서 저의 소감을 전달했는데, 한 마디로 “그 사람 죽을지도 모르겠더라. 돈이 매우 급한 사람이다.”라는 말도 이때부터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 째 만남은 11월 23일입니다. 이 날은 미리 정한 것은 아니고, 이제 박교수를 어떤 주제로 만나야 하나를 생각한 다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무래도 합의내용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보훈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보훈과 만나 요즘 박명기교수를 만나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합의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때 이보훈이 저에게 해준 말은 “형 그것 신경쓸 것 없어요. 별 것 없었어요. 양재원하고 그냥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었어요.”라는 정도로 들려주었습니다. 저도 그럴 것이라고 믿고, 이보훈에게 양재원, 박명기 이렇게 함께 만나자고 권했습니다. 그 합의사실이 별것도 아니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에 관하여 곽교육감이 10월에나 와서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박명기교수에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제안에 이보훈은 좀 망설이다가 곧 응낙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네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되었습니다. 이런 제안을 제가 박명기교수에게 한 것이고, 박교수는 좋다고 했습니다. 양재원씨는 박명기교수더러 연락을 취해달라고 했고 그러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날은 김준묵씨라고 박교수의 선배가 양재원의 대타로 나왔습니다. 물론 양재원씨도 나왔지만 말한마디 안하고 걷돌았습니다.

 

그 날은 합의이행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김준묵씨가 얼핏 한 마디 한 것이외에는 없었음). 오히려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많이 좋아지고, 박교수는 얼굴에 웃음이 돌았습니다. 많이 친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박교수는 이날부터 합의와 관련한 오해가 풀렸다고 합니다. 그 대신 친구인 양재원씨가 자기를 속인 것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만남을 위해 양재원씨에게 연락을 하고 또 양재원씨가 그 자리에 가기 싫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날 이후에는 박명기교수가 합의이행이란 말을 다시 꺼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박교수는 이보훈과 저와 많이 친해져서 뒷자리까지 가서 생맥주를 하게 되었고(이보훈은 그날 양재원과 자기가 어떻게 동서지간이 되게 되었는지에 대한 80년대 데모당시의 이야기를 말했는데 그때 상황이 마침 박명기교수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시절이라 두 사람은 희한한 인연을 하면서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음에는 곽교육감과 함께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11월 28일은 네 번째 만난 날입니다. 교육청 근처의 참치집에서 만났습니다. 곽교육감과 박교수, 이보훈 그리고 저, 나중에 박상주 비서실장 이렇게 모여서 화기애애한 자리를 가졌고, 인간적인 신뢰를 돈독히 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은 싹 걷히고 박교수는 “이제 좋은 형님들 얻어 참 기분좋습니다.”라고 말하고, 곽교육감이나 이보훈은 “우리도 좋은 동생 두게 되었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 중에 박교수가 김용택시인의 장시 ‘그 여자네 집’을 즉석에서 암송해서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고, 때마침 밖에는 서울에 첫눈이 오는 그런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기분은 고조되었고, 자리를 파한 후에 박교수와 이보훈과 저는 사당역 쯤에서 노래방까지 가서 노래를 부른 뒤 헤어진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박명기교수는 ‘사회적 회복’을 했던 것입니다. 박명기교수는 곽교육감과의 친분을 다시 갖게 됨으로써 사회적 회복을 느꼈고, 그래서 기분이 매우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12월 4일 백운호수 목공예방에서 박명기, 이보훈 그리고 저와 3인이 만나서 이보훈이 요즘 배우고 있는 목공예방을 견학한 뒤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박교수는 이보훈과 술마시면서 백기완선생의 시낭송도 하면서 재미스럽게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압니다. 그동안 저는 바깥바람을 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후에 박교수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하나를 생각해봤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인데,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은 항상 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하다가 박교수가 사모님 생일이라고 일찍 귀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간적인 화해는 되었지만, 돈이 필요한 박교수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생각에 머물렀고, 동시에 한다면 돈을 주는 것은 누가 어떠한 방법으로 해야 하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원래 내가 맡았던 소임은 끝난 상태였습니다. 오해와 원망은 일단 풀렸으니까요. 그런데 더 확실히 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물질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해야할까? 이 일에 지금은 이보훈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보훈이 현재 박명기교수와 친해졌고, 또 곽노현에게 일시적으로 떨어진 신뢰를 만회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보훈에게 박교수에게 돈을 부조하는 길을 해보겠냐고 전화로 제안했었지만, 이 말은 오히려 저와 이보훈사이에 오해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날 만나자고 해서 그동안 나와서 수고했다는 마음으로 식사하고 헤어졌습니다.

 

박교수에 대한 경제적 궁핍을 돕는 방법은 제가 맡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려지면 많은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을 ‘궂은 선행’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친구인 이보훈에게는 부탁할 수 있었지만, 저보다 젊은 교수였던 김윤태교수에게는 이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선 김에 제가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으로 저와 김윤태교수는 그 후 각별한 신뢰를 쌓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곽교육감을 만나서 구체적인 금전지급의 필요성을 말했습니다. 12월 중순쯤입니다. 곽교육감은 최대한 2억원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곽교육감은 이렇게 제 말에 대해서는 순응해주는 편이었습니다. 물론 만약 제 말에 반대했다면 저는 “곽교육감이 이제 사람이 바뀌었나, 자신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경제적 곤란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는구나.”고 생각했을겁니다.

 

그래서 이런 기준을 가지고 박명기교수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12월 22일 연말이 다가오는데 박명기교수를 적적하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만나자고 불렀습니다. 박교수, 김윤태교수와 셋이 제 연구실에서 만난 뒤 식당으로 갔습니다. 제가 먼저 박교수에게 “급한 돈이 얼마나 됩니까? 급한 돈만 말하라.”고 했고, 박교수는 3억이라고 말했고, 저는 1억도 힘든 상황인데, 2억까지 지원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박교수는 도와주시는 김에 3억을 고집했는데, 저는 2억도 힘든 액수니까 이것으로 힘든 경제사정을 잘 메꿔보시라고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김윤태교수를 통해 곽교육감에게는 3억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전달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후배로 생각하고 옆에 같이 가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감동을 주는 방식으로 대해야 하겠기에 힘들더라도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김윤태교수에게 크리스마스날에 가급적 조금이라도 박교수에게 돈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돈에 대한 지원은 없었습니다.

 

다음 해 1월초에 박명기교수는 어느 날 저에게 자신이 미국을 가 몇 개월 있다올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이에 돈을 주실 수 없겠느냐고 사정 이야기를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곽선생에게 전달했고, 그래서 2월 중순부터 6차례에 걸쳐 박명기교수의 동생분에게 전달해주었습니다. 전달방식은 박명기교수가 원하는대로 해주었습니다. 이 일이 불법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지만, 이 일을 노출시킬 수는 없었기에 아마튜어식이지만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하자는 것에는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6차례에 걸친 2억원이 박명기교수한테 전달되었습니다. 지급 방식은 현금이었습니다. 제 연구실에서 곽교육감의 처형께서 돈을 가져오시면 박교수의 동생 박정기씨에게 연락해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중간에 있는 사람으로서 최소한 현금액수에 대한 수령증 정도는 받아두어야 할 것 같아 박정기씨에게 확인증 같은 것 써달라고 했더니, 박정기씨는 의외로 차용증을 부탁했습니다. 그것도 저도 모르는 이중차용증까지 요구해왔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그렇게 써달라고 해서, 알았다 하고 어쨌든 상대방이 편한대로 다 해주겠다고 해서 역차용증이라는 것을 타이핑해서 써주었습니다.

 

2011년 8월 중순 박명기교수가 만나자고 해서 교육문화회관 커피숍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박명기교수는 자신에게 전달된 검찰의 출입국제한통지문을 보내주면서 아무래도 지난 번 돈지급에 관한 내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상의해왔습니다. 저는 약간 뒤숭숭하긴 했지만 “걱정할 것 없다. 잠시 언론이 요란할 뿐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깊이 알게 되면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다음날부터 3박 4일 동안 상해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곽교육감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줄까 하다가 마침 무상급식에 관한 주민투표가 급박한 때라 정신만 산란케 할까봐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11년 8월 26일 박명기교수가 긴급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저와 관련된 뉴스가 SBS에 나왔습니다. 그 날은 마침 친구들이 만나는 날이었는데, 영문도 모르는 친구들이 이 뉴스를 듣고 황망해서 일단 저의 전화기를 뺏는 등 위치추적을 피하게 한 다음 자초지종을 들어보자면서 붙들어두어 2박 3일 동안 집밖에 있다가 검찰에 자진출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이미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태라 법적으로는 체포영장의 집행의 형식이 되었습니다. 2박 3일 48시간 동안 체포상태에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석방된 후 9월 하순부터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3.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

 

(1) 공소시효

저는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면서 박명기교수가 검찰에 소환되는 것이 아니라 체포되었다는 것에 대해 법적인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공소시효는 6개월로 2010년 12월 1일로 끝난 것으로 아는데, 공소시효가 끝나도 체포가 가능한 것인지가 매우 궁금했습니다.

 

사건 당일 변호사하는 친구들을 만나 이에 대해 질문했으나 뚜렷이 대답을 하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공소시효가 일반적으로 6개월인데 공직자선거법에는 별도로 괄호속의 공소시효가 있다는 것을 검찰조사단계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공소시효에 관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제가 일을 하면서 찾아본 것은 아니고, 이보훈으로부터 우연히 들은 것입니다. 제가 선거법을 찾아보지 않은 이유는 제가 박명기교수를 만나서 한 일이 선거법관련 사안이라고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화해작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20여일이 흘러갔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보훈을 만난 어느 자리에서 “보훈아, 박명기교수한테 (합의이행과는 무관한 일인데)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도 괜찮겠냐?”고 물어본적이 있었습니다. 이보훈은 변호사는 아니지만 법률실력이 좋고, 또 선거과정에서 회계책임자로 일을 했기 때문에 법에 관한 종합판단을 물어본 질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보훈이 “그럼요, 도와줘도 좋죠. 그렇지만 공소시효를 지나고 나서 주면 좋겠어요.”라고 해서, 제가 “공소시효가 얼만데?” 물어서 공소시효가 6개월이고, 그것이 그해 12월 1일로 만료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보훈을 별도로 만난 처음이 11월 20일쯤이니까 그때부터 11월 하순 그 어느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공소시효를 10일 채 안남긴 상태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것이죠. 이때는 저만 박명기교수에게 돈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도 않은 그런 상태입니다. 박명기교수와 확실하게 화해를 한 자리가 11월 28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합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고 한다면 공소시효를 염두에 두고 돈지급을 차일피일 미루었다고 추측하는 검찰의 논리는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라 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공소시효를 지나게 된 것은 저의 일 하는데 마음을 편하게 해준 것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불법을 피해나가자는 생각을 한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황당하게 만든 것은 공소시효가 6개월이 아니라 괄호 속에 적혀있는 별도의 공소시효가 있었다는 사실이었죠. 그러니까 이보훈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10년 8월 중순 박명기교수가 “출입국제한통지서를 보여주면서 검찰의 내사가 진행중인 것같다.”라고 말했을 당시에도 제가 “공소시효가 지났는데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언론에서 좀 떠들썩하다가 사그라들 것이다.”라고 말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또한 사건이 터진 날에도 왜 박명기교수가 긴급체포당할 수 있냐는 것에 대한 의문이 생겼는데 주변 변호사친구들도 아무도 대답을 주지 못했던 것도 바로 괄호 속의 공소시효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소시효란 말은 재판 도중에 저를 괴롭혔던 용어였습니다. 왜냐면 검찰의 조사를 마무리하면서 이인걸검사께서 “이제까지 조사 중에서 피의자에게 불리한 진술이 하나 발견된 것이 있습니다.”라면서 꺼낸 것이 ‘공소시효’였기 때문입니다. 공소시효에 대한 언급은 검찰이 저에게 물어서 답한 것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검찰조서 끝에 피의자 추가진술 난에 제가 임의로 적는 중에 “선거판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영원히 관계를 맺지못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과정에서 만난 것도 새로운 인간관계인데, 선거가 지난 후 적당한 기간이 지나면 좋게 보았던 사람과는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 그것이 선거법에서는 6개월이라는 공소시효의 취지가 아닌가 한다.”라고 기술을 했었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선거판에서 만난 박교수라고 하더라도 공소시효가 지난 후에는 그 사람과 여러 가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것이 하등 상관이 없다는 저의 정당화논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검찰에서는 저의 공소시효에 대한 언급은 바로 저의 ‘범의’의 존재로 규정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당황했죠. 그렇지요, 공소시효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범의의 추정에 단서가 될만한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공소시효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그 기간을 넘기려했다든가하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는 떳떳하다고 봅니다.

 

공소시효를 검찰조서에서 언급했다는 것만으로 변호사친구들에게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왜 불필요한 말을 했냐는 것입니다. 저는 나의 행동이 공소시효의 취지로 보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지만 친구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다음에는 검찰에서 알게된 괄호속의 공소시효였습니다. 주변의 법률가들이 아무도 몰랐던 숨은 공소시효였던 것입니다.

 

제268조 ① 이 법에 규정한 죄의 공소시효는 당해 선거일후 6월(선거일 후에 행하여진 범죄는 그 행위가 있는 날부터 6월)을 경과함으로써 완성한다. 다만, 범인이 도피한 때나 범인이 공범 또는 범죄의 증명에 필요한 참고인을 도피시킨 때에는 그 기간은 3년으로 한다.

 

검찰에서는 이 괄호 속의 공소시효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요?라는 가정적 질문을 저에게 했습니다.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라 약간 횡설수설했습니다. 저는 “어쨌든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 법의 적용이 될 수 없다.”라고 하기도 했고, “알았으면 더 생각해볼 수도 있었겠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결론적으로는 “어쨌든 저는 불법적인 일이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압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시 제1심 재판에서도 물어왔습니다. 그때는 저는 “가정적 질문이라 지금도 정확히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그때 그런 규정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쉽게 박명기교수를 도울 수 있었고, 그래서 생명도 구하고 사회적 관계도 회복해서 교육감과 같이 교육청에서 일을 원만히 하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피고인으로서 공소시효규정의 문제를 따지는 것은 볼썽사나운 짓이기 때문에 절대 언급하지도 말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이 있어서, 정말 언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봐도 만약 저희 피고인들이 공소시효 규정의 무효로 인해 석방되었다고 하면, 일반인들은 저 법학교수 놈들은 나쁜 짓을 하고도 법망을 피해 달아났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저도 언급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규정을 안 이상 꼼꼼히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포함해서 주변 지인들과도 논의를 해보았습니다. 상식선에서도 그렇고 법전문가로서의 여러 가지 논리적 해석, 체계적해석 등을 해봐도 문제가 있는 규정입니다.

 

제1항 전체 문장에서 정한 6개월 시효의 예외규정으로서 시효를 무한정적으로 연장시키는 규정을 단순히 괄호처리한다는 것은 우선 국어문장의 어법에서부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예외라기 보다는 다른 규정이라면 당연히 별도의 항을 두어 무한정적으로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했어야 합니다. 그밖에도 공소시효규정 전체의 취지가 일반 형법상의 공소시효에 비해 월등 단기의 시효제도로 일관한 것을 볼 때 선거법의 안정성은 조기에 일단락짓고 새로운 선거국면을 준비하자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가 공소시효규정을 언급하는 것은 부덕한 일로 보이기 때문에 더 많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저와 곽교육감은 공소시효를 피하기 위해 미리부터 준비했던 돈지급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공소시효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정에 빠져있는 박명기교수를 돕고자 없는 돈을 모아서 드렸다는 점을 꼭 살펴봐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2) 사전약속이 없어도 처벌할 수 있다는 법해석

제가 곽교육감의 부탁을 선선히 들어줄 수 있었던 것은 곽교육감이 선거과정에서 후보단일화에 대한 불법적 사전약속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친구들이 자신과 협의없이 행했던 약간의 합의조차도 당시에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5개월이나 지난 이후에야 알았다는 사실 이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정직하고, 공명정대함을 추구하는 곽교육감이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만무하기는 하지만, 저에게 부탁한 일도 어떤 불법적인 일을 해달라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박명기교수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불법이 없는데 겁날게 없었던 것이죠. 그저 깊은 오해만 풀어주면 되었습니다. 풀어주는 것은 인간관계의 회복까지가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쉽게 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발견한 박교수의 어려움을 보고 저는 돈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곽교육감에게 전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합의의 이행과는 상관이 없었기에 크게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돈이 풍부하지도 않은 곽교육감이 돈을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 문제였지 다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곽교육감은 사전에 약속을 했고, 그 돈을 박교수에게 주었다라고 와전된 말이 돌아다닐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의할 수 없이 조용히 진행했을 뿐입니다.

 

사건이 터졌을 때도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오해를 어떻게 해서 푸느냐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는 떳떳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찰의 기소도 처음에는 공선법 제232조 제1항 제1호를 위반한 것으로 규정지어 곽교육감이 강경선교수와 김윤태교수에게 박명기교수를 대신 만나 합의내용과 요구사항을 들어보고 합의이행문제 등의 해결을 부탁한 것으로 언론에 공표했습니다.

 

그래서 곽교육감의 사전합의가 있었느냐 여부에 대해서 떠들썩했습니다. 결국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없을 수밖에 없죠. 검찰도 그에 관해 주장만 했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검찰은 기소는 같은 조문 제1항 제2호로 기소했습니다. 제2호는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후보자를 사퇴한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후보자가 되고자 하였던 자나 후보자이었던 자에게 제230조 제1항 제1호에 규정된 행위를 한 자 또는 그 이익이나 직의 제공을 받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승낙한 자”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와 같은 공선법규정을 읽어보게 된 것은 검찰의 조사를 받고 석방된 후였습니다. 제가 위반했다는 법조문을 처음 들여다 본 것입니다. 제가 헌법교수이기는 하지만 선거법을 집중 연구하지는 않았고, 이 조문은 더구나 처음 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제232조 제1항의 제1호, 제2호를 정독한 처음 결론은 저는 더욱 더 무죄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사퇴한데 대한 대가와는 전혀 무관했던 저의 금전지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져야 할 곽교육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사전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사퇴에 대한 대가가 없었다는 점에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되면서 법정은 제2호에 대한 해석을 “사전합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퇴에 대한 ‘대가의 의미’가 있으면 처벌될 수 있다.”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박명기교수는 대가의 의미가 강하게 존재했다고 보았고, 저와 곽교육감도 순차적으로 박교수의 대가의 의도를 알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 유죄판단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전약속이 없었고, 동기의 순수성도 인정했지만, 대가의 의미는 있었기에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법학자로서 사전합의가 전혀 없었고, 금전지급의 동기의 순수성(선행)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될 수 있다는 논리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본인들은 좋은 일이라 했지만,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 사회통념에 반하는 거액의 돈에 해당하기 때문에 위법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또한 제232조 제1항 제2호의 문제점은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항은 분명 형벌조항을 수반하기 때문에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재판을 받으면서 수많은 법률가들조차도 이 조문의 해석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 “죄와 형은 명확하게 성문법으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명확성의 요청에 부합된다면 가급적 한 눈에 해석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몇 번을 거치면 해석이 모아질 수 있어야 국민들에게 공시해서 이런 범죄는 이렇게 처형한다는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인데, 판사마다, 변호사마다, 법학자마다 해석이 달라진다면 그렇다면 국민들은 어떤 견해를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유권해석권자의 임의의 해석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헌법상의 죄형법정주의에 반하는 것입니다.

 

(3) 2억원은 기부액수로 크다는 사회통념

 

제1심 법원은 동기의 순수성을 인정하면서도 2억원의 액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의례적인 기부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2억원이 작은 돈도 아니지만 또 무작정 큰 돈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십원대의 돈을 기부합니까? 저는 이에 대해서 법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기부를 하는 것은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예컨대, 지하철에서 동냥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동전 몇 개나 혹은 500원, 1000원을 줍니다. 또 노숙자를 만나 그가 돈을 달라고 했을 때 우리는 주더라도 몇 천원을 주고 1만원을 주면 아주 고마워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기부의 금액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선거판의 연장에서 만난 박명기교수가 경제적 궁핍상황에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선거에서 사퇴한 것에 대한 대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선거판에서 있었던 새로 알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매우 심한 곤경에 빠져있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또 그를 살려서 함께 일을 해나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현재 수억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돈 중의 급한 돈을 주어 힘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곽교육감에게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도 구하고, 또 향후에 박교수와 그 친구들까지도 우군으로 삼아 서울 교육청의 일과 향후의 더 큰 정치생활을 할 때도 도움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될 것이기 때문에 돈을 주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억 단위의 돈을 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침 제가 알기로 곽교육감네 재력은 어쨌든 억대의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지원을 제안한 것입니다. (저는 1심 법정 최후진술에서 곽교육감의 금전과 관련한 성품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곽교육감은 워렌 버핏같은 인물이라 10억있으면 수억을 내놓을 수 있고, 백억이 있으면 수십억을, 조가 있으면 수천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곽교육감이 그런 기부를 하니까, 곽교육감이 약점이 있어서 주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곽교육감은 한사코 부정한 돈은 줄 수 없다고 일관되게 조건을 단 단일화를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거가 다 지나고 나서 취임한지도 6개월이 지나서 왜 자신에게 위험할 수도 있는 돈을 주었겠습니까?

 

판결문은 여러 가지 객관적 상황으로 추론을 해서 사퇴에 대가에 대한 미필적고의가 있었다고 그 이유를 달았지만, 저는 (아마도 곽교육감도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사퇴의 대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일의 진행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곽교육감이 돈을 주자는 저의 제안에 응한 것은 오로지 저의 제안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제가 불법을 할 리가 없는 사람이고, 또 박교수의 어려운 처지에 눈감아서는 안된다는 평소의 저의 성품을 아니까 어려워도 기꺼이 따른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다 틀린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습니까? 저는 곽교육감이 사전합의가 없었다는 결백함(innocence)을 기초로 박교수에게 돈을 부조하는 것이 결코 불법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준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4. 화해자로서의 저의 역할

 

저는 1심 법정에서 저의 역할을 박명기교수와 곽교육감 사이에서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설명을 드린 바 있습니다. 비록 법이 정한 화해자는 아니지만 저는 분쟁 당사자 간에서 ADR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법관을 비롯한 화해자의 역할을 중립자적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중립(中立)자의 의미를 단순히 가치중립적(neutral)인 사람이라는 뜻을 너머 ‘가운데 선 사람’(go-between)이라고 동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서 저는 비록 곽교육감의 부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일단 일을 맡은 다음부터는 공정성을 지켜서 두 사람간의 문제를 풀고자 했던 것입니다. 분쟁 중인 양 당사자간에는 반드시 강자와 약자가 있는데, 저의 정의감(sense of justice)으로는 먼저 ‘약자의 편을 들어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자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약자는 현재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그런 일에 위안을 주면서 종국적으로는 ‘무엇이 옳은가?’를 밝혀 사태를 바르게 해결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서 약자는 박명기교수였고, 강자는 곽교육감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은 선거판에서 많은 손실을 본 사람(loser)이고, 다른 사람은 당선이 된 사람(winner)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교수의 말을 더욱 잘 들어주고, 위로를 하면서 일단 동등한 자리를 만들어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곽교육감이 가급적 더 많은 이해력으로 박명기교수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교수에 대한 미운 감정이나 경시감정이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했고, 껴안아야 한다는 쪽으로 유도했습니다.

 

다른 한편, 박명기교수에게는 곽교육감의 평소성격으로 인해 박교수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매우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과, 개혁의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연락을 활발히 해서 박명기교수에게도 잘 대우해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박명기교수가 가진 사전합의에 관한 오해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이보훈도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인간적인 이해와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그 다음 순서로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물질적인 나눔까지 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저는 이것에 대한 비유를 마태복음의 한 말씀(21:19)을 예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실 때에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려하셨지만, 잎(leaf)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어서 무화과나무를 혼내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은 후 저는 입(lip)만 무성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저는 박명기교수와의 물질나눔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뜻을 곽교육감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2:17)도 아울러 항상 저의 행위지침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일정한 금액의 부조까지 이루어져서, 박교수는 그 후 서울교육청에서 곽교육감과 일을 잘 해나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사건이 터지면서 이런 화해국면은 다시 도루묵이 되었습니다. 사건발생후 언론에서 박명기교수가 사전합의를 시인했다는 식으로 보도가 되자 곽교육감 지지자들은 박명기교수 측근이 이 사건을 검찰에 밀고했으며, 박명기교수가 검찰에 회유되어 없는 말을 불고 있다는 식으로 믿었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박교수와 곽교육감측은 완전히 원수지간처럼 대립관계가 되어버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재판정에서 곽교육감과 박교수는 자주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고, 이런 모습은 곽교육감이 주장하듯이 선의로 돈을 지급했다는 것이 신빙성을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선의로 지급했는데 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저모양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법정이 바라보는 시각은 전면적이지 못하고, 법정에 국한된 범위안에서 자주 다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판단한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박명기교수는 검찰에 회유된 것이 아닌데, 학교선배되는 변호사님이 로펌 ‘바른’의 소속원이었다는 이유로 그런 오해를 사게 되었고, 돈도 없는데, 이제 변호사까지 수임해야 하는 판국이 되고, 교수직도 위태로와지고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서게 되자 박교수와 가족들은 박교수를 도와주기는커녕 비난을 가해서 박교수의 명예를 실추시킨 곽교육감측 사람들을 원수 바라보듯하는 형국으로 바뀐 것입니다. 원래 단일화 이후 오해에 기한 불화단계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사실은 법정에서 피고인인 저도 할 수 없는 말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예가 “박교수가 당시 자살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가 경제적 지원을 해야겠다는 최초의 동인이 바로 자살이야기였는데, 정작 이 말을 법정에서나 밖에서나 몇 번 하고 나니 박교수의 가족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럴 리도 없는데 왜 지어낸 소리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살이야기는 정말 듣고 싶지 않다고 마구 항의를 해왔습니다. 남편의 명예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빠지고 나면, 제가 왜 돈을 주었는지가 분명치 않게 됩니다. 제가 그냥 물러터져서 경제적 곤궁을 빙자하여 사퇴자에 대한 대가를 지급한 것처럼 비치게 된 것도 바로 이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자주 발언하기가 힘들었고, 박교수 자신이 자살에 대한 자신의 언급에 대해 회피하는 식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항소심 판결문에서는 아예 금전지급의 이유에서 자살의 동기가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돈지급의 결정적인 동기가 없으니 나머지 이유가 커지고 그러다보니 유죄판정쪽으로 기운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법정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제가 맡았던 일 중에서 화해를 시킬 또 한 대상은 곽교육감과 이보훈이었습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제 오랜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이보훈은 선거과정에서 회계책임자로서 정말 열심히 회계누락 하나 없이 도와주어서 곽교육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한참 들어야 할 공신자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양재원과의 합의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곽교육감에게 말못할 실망관계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본인들은 물론 아주 잘 알겠지만, 이것을 놓고 서로 다툴 수도 없고, 참 어렵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상처는 이보훈쪽이 더 컸습니다. 얼마나 억울할까?는 생각이 저한테 있었습니다. 그런데 곽교육감도 또 말도 못하고 참아야 하는 사정도 딱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기분좋게 해주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이 일 중에서나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습니다.

 

워낙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 인품들이 좋아서 이미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재판이 잘 끝나거나, 아니면 그후라도 곽교육감의 행로가 happy ending이 되는 것을 봐야만 두 사람이 서로 아주 고마워하게 될 것같습니다.

 

 

5. 곽교육감과의 관계

 

 

사건이 터지면서 저는 제가 돈을 건네주어 사건에 연루된 것에 정말 잘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찰에 소환당하고, 조사받는데 제가 옆에 있어 곽노현이 기분이 훈훈하겠구나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동시에 저도 곽노현이 그런 일을 당하는데 혼자서 밖에서 지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미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항소심에서는 형량이 비슷해서 더욱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이제 대법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법률가 지인들이 저는 돈배달만 한 사람이라 단순히 참고인인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되었느냐고 의아해 합니다. 저는 검찰에서부터 내가 단순한 돈배달을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돈을 주자고 한 사람이라고 말을 한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후보자매수사건이라면 돈을 적극적으로 주자고 한 제가 최고형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가장 적은 벌금형을 받은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에 '곽노현교육감사건'이라는 선입견이 곽교육감은 반드시 최고형이어야 한다고 밀고가는 식으로 현실왜곡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어쨌든 저는 곽노현과 함께 대법원까지 여행을 하게 되어 이른바 동고동락을 할 수 있게 되어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란 격언을 통과하는 느낌을 갖습니다.

 

검찰이 기소장에서 곽교육감이 강교수와 '공모하여' 일을 저질렀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곽교육감이 합의금 이행을 선거와 관련없는 친구 강경선을 통해 우회해서 전달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번 사건으로 저와 곽노현교육감과의 우정이 신문에서도 크게 보도해줄 정도로 공인받은 우정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나 검찰이 말하는 '공모하여'라는 뜻은 비뚤어진 관계의 우정을 뜻할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시정해서 국가공문서에서의 기록을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곽선생과 저와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를 말해야 할 것인데, 할 수 없이 저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같습니다.

 

제가 가진 평소의 소신을 밝힙니다.

 

이(利)와 의(義)는 삶에서 불가피하게 다 필요합니다. 저도 이를 추구하고, 또 의를 추구하는 것이지, 오로지 의만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의가 서로 충돌할 때 저는 의를 선택해야 한다는 당위가 강한 사람입니다. 법학을 통해 훈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를 추구하는 것,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혼자서 합니다. 절대 동업하지 않습니다. 이의 동업, 욕망의 동업은 자칫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혼자의 폭력도 문제인데, 둘 이상의 집단폭력까지 만들어낼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폭력을 저 개인에게로 최소화 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이(利)의 집단과 인연을 끊다시피하고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이래 더구나 제가 지방의 명문고등학교를 나왔고, 또 서울대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이런 학교의 졸업생이 이를 위해 뭉치면 남에게 미치는 피해나 혹은 소외감이 매우 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각종의 연고주의를 다 끊었습니다. 저의 DNA에는 정말 연고주의가 없습니다. 심지어 저의 과거 가족과도 그러합니다. 가족은 식구들의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바라나 타인과의 나눔이나 사회정의에는 매우 약한 조직이라서 미흡합니다. 물론 새로운 가족은 다릅니다. 두 사람 이상의 만남을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정직과 진실이라는 고리 안에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in Chirist)로 표현됩니다. 편하고,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그런 가족, 그런 만남과 집단이 제가 원하는 모임입니다.

 

제가 질문받을 때마다, 곽노현과 대학친구라 하지 않고 굳이 대학원친구라고 특별히 밝히는 이유도 제가 대학원을 공부하러 갔다가, 거창하게 말해서 '진리탐구'의 도정에서 우리 곽교수를 만났다는 점을 특별히 기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대학친구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또한 곽노현과 '절친'이라고 해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들은 오해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절친이니까 무슨 짓을 못하겠냐는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정은 좋은 일, 궂은 일, 나쁜 일 다 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친구가 있습니다. 이른 바 깡패의리도 우정(의리)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형제도 그것만 가지고는 미흡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in Christ)(정직, 진실, 사랑, 겸손 등) 만나지 않으면 권력이요, 폭력의 미학에 머물 뿐입니다. '보편적 우정'에 이르지 않는 '파당적 우정'은 미흡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의(義)는 다릅니다. 의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과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사회적으로 유익합니다. 그래서 모임은 의의 모임, 봉사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의의 모임이라고 해서 친목과 화목이 도외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이 의로와야 한다는 것이지, 같이 즐겁게 지내는 것은 너무나 좋은 행복의 조건이니까요.

 

집단의 시작은 2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2인 조직론'을 이야기했습니다(방송대 [법철학] 교재 참조) 모든 조직과 집단의 출발은 2인이기 때문에 그 최초의 2인이 '의'로 뭉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로 뭉쳐도 그것을 잘못 다스리면 금방 부패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또 조만간에 게젤샤프트로 바뀌면서 또 '이'의 집단으로 바뀌어 갑니다.

 

과거에 명분을 강조했던 사회운동단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평범한 이익단체로 바뀌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조직의 한 사람 한 사람의 꾸준하고 진지한 '빛과 소금'의 역할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정직과 진실 등의 덕목이 필요합니다. 집단생활에서의 시민으로서의 미덕(civic virtue)이 절대 필요합니다. 저는 우선 independent(독립성)와 solidarity(연대) 라는 것으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친구들, 집단이라고 해도 각자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필요에 따라 협동하는 그런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주(主)와 종(從)은 없습니다.

 

곽노현과의 만남은 이렇게 의에 기초를 둔 가장 이상적인 두 사람의 만남이 현실화된 형태입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우선 집에서 부부를 그렇게 만났고, 전공분야에서 이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전공분야를 한 사람과도 이런 가능성을 열어나갈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런 확산이 저에게 있어서 사회화과정입니다. (곽교육감과 저는 영어로 alter ego 라고 생각합니다. '분신같은 부부, 친구'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랫동안 인생속에서 저의 진리관 속에서 그 기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아주 훌륭한 친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곽선생의 행위에 대해서 저는 무조건적으로 신뢰합니다. 곽선생도 또한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곽교육감과의 관계를 신앙적으로는 '다윗과 요나단'(사무엘상 20장)으로, 때로는 '두 예언자'(요한계시록 11장)로 생각을 할 때가 있고, 사회적으로는 인도 독립과정에서의 두 인물 '간디와 네루'의 관계로 사회적 분업관계로 설정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온통 권력관계로 연이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친구관계까지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울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이런 권력관계사회는 남성중심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비권력사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사회입니다.

 

저는 이번 사건이 '곽노현 교육감사건'이라서 그렇게 '곽노현 프레임'에 갇혀 사건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사건의 실체를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프레임으로 봐주실 것을 부탁드린 바 있습니다. 이것도 이 사회가 가진 고정된 시각, 권력적 시각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 달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와 곽교육감과의 관계는 나쁜 의미의 '공모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사건이 터진 후에도 우리 주변의 법률가친구들은 저에게 검찰에 가서는 무조건 '모른다'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로 임하라고 코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친구들의 이런 조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친구들한테 잡혀 이런 설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여기 있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새벽에 다른 친구들 잠든 틈을 이용해서 탈출했습니다. 핸드폰도 위치추적당한다고해서 뺏긴 상태였습니다. 집에도 못 들어갔습니다. 친구들 이야기 들으니 혹시나 잠복근무할 수도 있겠다싶어 집사람 새벽기도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다니는 교회로 갔습니다.

 

가니까 우리 집사람은 기도를 마치고 떠난 뒤였습니다. 부목사님께 연락좀 부탁해서 집사람이 교회에 다시 왔습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만나 이야기 하고, 집사람 핸드폰으로 곽노현교육감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때 문자 내용이 'honesty is the best policy'이었습니다. 답신이 왔습니다. 처형집에 와있었던 곽교육감과 해후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곽교육감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오로지 '정직과 진실'로 재판에 임하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곽교육감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사건 초기에 곽교육감에 대한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사유 중의 하나가 피의자 간의 통화량이 너무 많다고 한 것도 지적되었습니다.

 

그때의 통화내용이 무엇이었냐 하면 남이 무엇이라고 하든 우리는 정직과 진실로 임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전화를 한 것 뿐이었습니다. 정직과 진실은 피고인들인 저희가 지켜야할 일이기도 하지만, 직업상으로는 검찰과 법원이 꼭 지켜야 할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헌법은 사법권(검찰과 법원)에 분쟁사건에서의 '정직과 진실'을 기준으로 사건을 해결할 임무를 부여한 것입니다.

 

 

6. 박명기교수에 관하여

 

저는 박명기 교수를 2010년 11월 17일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 박명기교수는 곽교육감을 비난하면서 합의이행을 나몰라라 하는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와 김윤태교수는 곽교육감에 대한 오해를 풀으라고 하면서 곽교육감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곽교육감이 단일화를 위해서 금품약속을 하여 선거법을 위반할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누차 이야기 했습니다.

 

실제로 곽교육감이 실무자간에 있었던 약간의 합의사실에 대해서 안 것도 선거가 있은 후 4개월이나 지나 알게 된 것임을 전달해서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박교수는 두 차례 저와 만나면서 이 사실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그 이후에는 합의이행에 대한 요구를 더 이상하지 않았습니다(선거판과의 단절).

 

처음에 박명기 교수는 합의이행에 대한 주장을 하면서도, 자신이 현재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저와 김윤태교수는 사면초가에 빠진 박교수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박교수 본인이 제 기억으로도 3차례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했고, 저는 그럴 상황에 이르렀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낙선과 다름 없는 후보사퇴를 하고, 선거진영에서 자신을 도왔던 참모들이 다 떠나고, 빚돈은 14억원에 이르고(나중 1심 재판 중에 안 사실임), 자기가 당선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는 곽교육감은 취임이후에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듯하고, 따라서 교육위원 당시엔 알아주던 교육청 직원들조차 이제 자신을 경시하는 듯한 분위기는 사실상 사면초가에 빠진 장수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항우 같은 장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예가 있습니다.) 저는 큰 일이 날 수 있겠구나 판단을 하여 급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곽교육감한테 전달했습니다. 처방은 두 가지 방향이었습니다. 경제적 지원과 사회적 복원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처방은 의외로 쉽사리 효과를 보았습니다. 11월 28일 박명기교수와 곽교육감과 함께 가진 식사자리(참치집 식사)에서 박명기교수는 생기가 돌았고, 시낭송을 할 정도로 마음이 열렸습니다. (시낭송은 아무 자리나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십시오.) 그러면서 확실히 박명기 교수는 살아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과의 악화된 관계가 아주 쉽사리 화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법정에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화해 노력의 성과는 정말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화해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서, 박명기 교수의 입장을 충분히 읽고 경제적 지원을 곽교육감과 상의와 설득을 통해서 진행했던 것입니다. (박명기교수는 그래서 저에게 매우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박명기 교수가 이런 와중에도 합의이행금을 요구하는 마음(고의)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1심 판결은 이것을 확인했다는 듯이 엄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항소심에서도 약간 완화는 되었지만 여전히 인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박교수는 겉으로는 화해를 하는 듯하면서도 내심은 지속적으로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합의이행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는 판단입니다.

 

그런데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박명기 교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와 두 번 만난 그 다음부터는 그런 생각은 지워졌습니다. 단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도 박명기 교수가 끝까지(재판정에서도) 자기는 받을만 한 돈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박교수의 내심의 생각은 합의이행금이 아니고, 자신의 자존심 차원에서 가진 그런 내심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런 자존심까지 뭉개고 굴욕감이나 수치심을 주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박명기 교수의 생각 -- 나는 지금 받을만 한 돈을 받는다 --은 결코 불법적인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합의이행이나 불법적 인식의 차원이 아니고, 곽교육감의 당선에 나도 기여했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인간적인 자존심에 해당했던 것입니다.

 

좀 더 소급해서 말씀드리면 박명기 교수는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학생운동의 지도자였던 청년시대를 지냈고, 그후 서울시 교육위원을 3번씩이나 역임했고, 곽노현 후보만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서울시 교육감 당선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보았던 자신인데, 갑자기 급전직하로 전락한 자신이 사건과 함께 이제 검찰에 긴급체포되었고, 재판에 서게 되었는데, 이런 사건의 와중에도 곽교육감은 지속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는 반면, 자신은 검찰에 회유되었다는 등, 형편 없는 사람으로 보도가 되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상황이 되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의 과정에서 돈을 지급하게 된 경위를 밝히다보니, 박명기교수의 절박한 심경을 밝혀야 하는데, 박교수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소상히 인정하기가 싫을 수밖에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살할 생각이 있었던 자신의 궁박한 처지를 구태여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않았고, 경제적 궁박에 대해서도 가급적 회피하는 발언으로 나왔습니다.

 

특히 이런 발언이 방청석에 공개되는 것은 얼마나 싫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더욱이 방청석에는 정말 귀하고 사랑해온 부인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이 분들에게는 미쳐 자신의 내심의 절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 것이 뻔한데 --- 부인과 가족에게는 자신의 프라이드를 유지하는 선에서만 사회적 일을 전달했을 것입니다.(박교수는 항소심에서 자신은 안동이 고향이라서 집에서 가족에게 소상히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 그것을 법정에서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도 마지막 자기 존재를 지탱하는 자존심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존심의 발로는 법정에서 보여준 박교수와 곽교육감과의 대립에서도 나타납니다. 가급적 있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던 곽교육감의 발언은 수시로 박명기교수의 자존심을 법정에서 또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마다 박교수는 과잉반응을 보였고, 그러니까 재판부에서는 곽교육감과 박교수의 화해에 기초한 선의의 긴급부조라는 말을 충분히 믿어주질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박명기교수의 내심은 충분히 법정에 전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정은 박교수의 내심에 흐르는 자존심을 고의성으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박교수는 정말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교수는 자신이 급한 돈을 받았고(자존심을 지키면서), 그래서 부족하기만 했던 금액이었지만 감사했던 것입니다. 많은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기에 빚 갚는 데만 쓰지 않고 일부 친구에게 투자성 자금으로 사용한 것도 이해를 해주셔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급한 사람들은 이렇게 사용한다는 것을 저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돈 지급과 관련해서 2010년 12월 하순 어느날 제가 “급한 돈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도 박교수는 최소 3억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나, 2억원이 다 지급되고 조용하게 된 이후에도 다시 2011년 8월에 이르러 다시 김윤태교수나 저에게 “돈 좀 더 지급이 안될까요?” 물은 것도 급한 돈에 대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박교수의 마음에 내재하는 자존심의 문제를 고의로 볼 것이냐 아니냐를 밝히는 것은 물론 재판받는 박교수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마는 궁극적으로 진실을 밝혀 올바르게 재판을 해야 할 책임은 법원에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7. 검찰에 대해서

 

2011년 8월 29일에 검찰출두 한 이후 2박 3일간의 검찰수사를 받고, 이어서 9월 말부터 재판을 받은지 벌써 9개월이 지나갔습니다.

 

법학교수로서 저는 사건이 시작된 이후 정신이 맑아지고, 모든 새로운 법조실무 경험으로 인해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형사소송법 한 번 제대로 보지 않았던 저로서는 가택수사, 영장발부, 검찰출두, 체포, 유치장수감 등 수사절차와 기소와 재판을 당하면서 그 현실과 의미를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불과 3일 동안의 체포된 경험이었지만 아주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번에는 장기구속으로 가겠구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마음을 내려놓았더니 홀가분해졌습니다. 교수생활은 끝났고, 이제 내가 가르치고, 말로만 했던 검찰과 법원을 거쳐 마지막으로 대법원까지 다 구경하게 되었구나는 생각으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말만 듣던 공안1부 검사실을 찾아 혼자 걸어들어갈 때는 감개무량했고, 나도 여기에 와보는구나 하면서 영광으로 느끼기도 했습니다. 법학을 30년 가르친 사람으로서 법정에 오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장체험이기도 하였죠. 남에게 가르치기만 하고 저만 빠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미안한 일이 될 수도 있었는데, 구속이나 유치장생활을 한 번 경험해보니 좀 체면이 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법을 가르친 사람으로서의 업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변화시킨 만큼 사법환경이 좋아졌고, 여태까지 변화시키지 못한 만큼 불편한 것을 당해야 하는 것은 가르친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받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검찰도 저에게는 잘 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물론 저도 기분좋게 저의 입장을 당시 상황에서 아는 것을 다 이야기 해드렸습니다. 검찰에 자진출두했지만, 법상으로는 체포영장을 집행당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정말 고문도 없고, 강제수사도 없었습니다. 조사받는 중 고문같은 것--특히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고문--을 한 번쯤 받게 되지 않나 하는 우려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면회온 변호사께서 “걱정하지 마세요. 고문은 정말 없습니다.”하면서 안심을 시켜주신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가혹행위가 없어서 좋았습니다.

 

이미 저는 정직과 진실에 기해서 검찰조사와 재판을 받겠다고 방침이 섰으니 검찰과의 벽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무죄확신, 불법이 없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검찰질문에 주로 설명을 드리는 식으로 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재판 받으면서 안 것이지만, 검찰조서는 일정한 방향으로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찰은 범죄 구성요건에 맞추어 저의 설명을 정리했다는 것이지요. 검찰의 직무상 어느 정도는 이해되지만, 정말 저의 설명의 취지와는 다르게 말이 정리된 것을 보고 적잖이 야속하고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검찰에 대해서도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 가지 자료의 취사선택(gatekeeping)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검찰 뿐만 아니라 피의자도 그렇게 말을 하겠지요. 나름대로의 유리한 선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고, 또한 법의 생리상 다양한 각도의 해석과 자기입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검찰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직무상 목표가 이 사회의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바로 잡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검찰 gatekeeping의 한계는 'law and order'에 있습니다. '법과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을 넘어서는 데까지 자료의 가공은 안되는 것입니다. 공안검사 방에도 '진실되게'라는 액자가 벽에 붙어있었습니다. 저의 입장과 꼭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검찰의 최종목표는 범죄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사단계에서는 검찰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지냈습니다마는 제1심과 항소심에서 기소와 논고와 구형을 내리는 과정을 보고서는 정말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화가 났습니다. 특히 공판중심주의를 거치는 동안 검찰도 많은 것을 함께 듣고 보았을텐데도 자신들의 입장을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 기소장과 논고문은 항상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보면 제가 봐도 참 이상한 것이 많습니다. 사건이 되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이번 사건에 주요장면마다 제가 우연찮게 꼭 끼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의 향정식당 일도 그렇고, 또 이보훈과의 동행으로 박명기교수를 만난 점, 공소시효가 지난 후에 돈을 이야기 한 점 등이 저는 무심코 한 일이지만 나중에 보니 대단히 오해받을 만한 그런 일들을 제가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설명을 했습니다. 사실과 다른 오해를 하지 말라는 해명을 한 것입니다. 얼핏보면 오해할만한 이런 일들이 곳곳에 함정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런 곳곳에 파인 함정들이 마치 의식설문조사지에서 응답자의 성의없는 답변을 가려내기 위해 질문 일부에 숨겨놓은 오류체크문항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성의있고 정확한 수사와 조사를 한다면 이런 함정에 빠지는 법이 없겠지요. 그런데 검찰은 여지없이 이런 함정에 다 빠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마디로 무성의한 사실을 기초로 사건을 만들겠다는 심뽀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의 이런 태도도 효과는 있다는 것을 법원을 보고 알았습니다. 법원은 일단 기소된 사건은 '사건'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이 위법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데만 치중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면에서 법원이 좀 더 각성하지 않으면 검찰의 무지막지한 자세도 힘을 발휘하겠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검찰과 법원의 이런 태도는 정말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정말 많이 바뀌어왔고, 또 앞으로도 많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자유와 민주의 수준은 많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검찰과 사법의 수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압니다. 사법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사회변화속도의 3분의 2수준 정도라도 커버를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분위기를 보면 국민의 변화속도에 비해 사법만이 유독 저 아래 수준에서 ‘법과 질서’의 기준을 잡기 때문에 국민들이 골치아픕니다. 자꾸 발목을 잡고, 휘둘리기 때문이지요.

 

검찰이 무엇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변화하기를 바랍니다. 조사단계에서나, 기소여부결정단계나, 아니면 재판중에라도 혹시라도 처음 생각과 달리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언제든지 철회 내지 중단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항소나 상고도 무조건 항소, 상고가 아니라 사건에 따라 항소, 상고포기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국민들은 검찰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고, 검찰로부터도 풀려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 보다 솔직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걸리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무섭기만 한 검찰이 아니라, 국민에게 친근한, 그래서 국민에게 신뢰받는 검찰이 되어야 하는 것이 국민이 바라는 바입니다.

 

 

8. 바람직한 법정

 

서울중앙지방법원 합의부에서 받았던 1심재판은 저에게 행운이었습니다. 이번 법정은 심의민주주의(혹은 숙의민주주의, 토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정신이 100% 반영된 이성적 토론장으로서의 법정포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법정의 주인이 법관이 아니라, 변호사 검찰 피고인 증인 모두에게 골고루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 그런 법정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헌법학자로서 군부통치의 붕괴이래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질적 심화에서는 매우 미흡한 수준에 있다고 생각해서, 심의민주주의와 같은 정신이 우리 사회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우리사회가 경제적, 문화적 선진국이 되려면 보다 풍요로운 시민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즈음 책을 보다보면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데서는 심의민주주의라는 주제로 많은 학생들에게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법학분야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 주변의 법률가친구들에게 이런 용어를 아냐고 하면 전혀 모릅니다. 학술용어를 몰라도 민주주의만 잘 하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전문가로서 지나친 문외한으로 남으면 그것은 관심부족의 표현이고, 시대의 흐름을 모른다고 볼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법학분야가 가장 민주주의가 뒤떨어졌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헌법을 포함한 법분야가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1심 법정에서는 저는 이런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심의민주주의가 완벽히 반영된 첨단의 법정을 경험하게 되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재판을 받는 도중에 알게 되었지만, 김형두재판장님께서 우리나라에서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할 때 실무책임자였다는 것도 듣게 되었습니다. 공판중심주의라는 말만 들었지 실제 이렇게 현장에서 체험을 하고 나니까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밖에 나가서도 많이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우리나라 재판이 이렇게 좋아졌다고 말입니다. 동시에 과거에 검찰조서에 입각한 재판을 받았던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분들은 참으로 어렵고 억울한 세월을 보내셨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번 사건은 정직과 진실을 밝혀야만 이해가 갈 수 있는 성격의 사안이었기에 재판부에 설명을 할 시간이 많이 주었어야만 했는데 이렇게 충분히 이야기를 표현할 기회를 주셔서 그것도 감사하고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혜택이 일반 서민들에게도 골고루 돌아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항소심은 판이했습니다. 공판정은 좁아서 방청객들이 주로 서있고, 바닥에 앉는 데도 불구하고 그에 관해 미안하다 소리 한 마디 안하는 것이나, 피고인들에게 말할 기회를 거의 막는 분위기를 보고, 역시 권위주의적이구나를 느꼈습니다.

 

심의민주주의의 정신에서 보면 법정 전체가 포럼의 장이기 때문에 피고인들의 생각도 열어주고, 방청객들도 국민의 대표로써 여기에 참석한 청취인들로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법관중심적 사고에 머문 것이 역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건에 대한 재판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선 1심 선고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하도록 하라는 지침에 얽매이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시작자체를 선고일(1. 19) 이후 1개월 20일이나 지난 3월 7일에 개정해서 4월 17일 선고를 한 것입니다. 실제 공판은 4회에 열 대여섯 시간만 투여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이래도 되나 했습니다. 사안의 성격상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또 법률적용도 만만치 않은데도 말입니다.

 

역시나 항소심의 결과는 정말 한 마디로 수준 낮은 법원이라고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양형만 디자인하는데 그친 몰지성적 판결로 끝냈습니다. 고등법원으로서의 높은 품격에 값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역시 법원의 민주적 절차와 판결결과가 비례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감사했던 1심에서도 70%의 만족도를 가졌는데, 고등법원에서는 나머지 사실관계 확정의 보완이나 법률적용에서의 심화과정이 당연히 기대된 자리였지만, 환자와 같은 피고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상급병원에 와서 오히려 병만 악화시킨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9. 저의 행위에 대해서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검찰의 기소내용과 다른 위치에 있었습니다. 곽노현과 '공모하여' 합의금 이행에 가담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저는 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가 아닌 같은 조의 제2항과 관련해서 그 해당여부를 살펴봐주시기를 제1심, 항소심의 법정에 부탁드린 바 있습니다. 즉 저는 "제1항 각 호의 규정된 행위에 관하여 지시, 권유, 요구하거나 알선한 자"에 보다 근접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232조가 정한 '후보자에 대한 매수 및 이해유도죄'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명기교수에게 처음 만나서 지속적으로 그런 것을 절대 생각하지 말라고 일러둔 상태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저는 사인(私人)으로서 곽교육감과 박교수 사이의 화해자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사이의 오해를 풀었고, 오해를 푼 다음 경제적 지원을 하여 박명기교수가 처한 짓누르는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그 부담을 일부 나누어 진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더욱 긴밀한 화해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저는 검찰과 언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곽노현교육감의 선거법위반사건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검찰의 공소장의 주된 사안에 해당하는 금전수수는 선거법 사건이 아닌 일상의 사안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A와 B는 같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두 사람 사이에 심한 오해가 생겼다. 그래서 A는 친구인 저에게 B의 오해를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저는 B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심한 오해에 빠져있는 그에게 설명과 위로, 격려 등으로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래서 A와 B는 다시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는 B를 만나는 과정에서 알았던 B의 극도의 경제적 어려운 사정을 알았기에 친구인 A에게 B에게 금전적 지원을 통한 공고한 화해의 필요성을 제안했고, 그 결과 지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A와 B는 종전과 같은 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르렀고, 같은 사업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일들은 선거법 사안이 아닌, 일상적 사업관계에서 나타나는 오해와 갈등에 관한 해결과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저는 공직자선거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첫째, 이번 사건은 선거법과 무관한 일반적 화해과정에 불과한 사건이라는 점, 둘째, ‘선행’이란 내면적 행위이기 때문에 입증하기는 힘들지만 만약 입증만 된다면 처벌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위를 향후 선거법질서를 어지럽힐 선례가 될 우려가 있다고 처벌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요? 여기에 법의 ‘분별력’(prudence)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검찰의 수사력과 법원의 정확한 판단력을 통해서 법위반 영역과 합법적인 일상의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학(juris-prudence)의 본령인 것입니다. 단순히 범법에 근접해 보인다고 해서 처벌하고, 이를 통해 향후의 선거범죄를 예방하겠다는 것은 법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권력 남용의 포악한 행위에 해당합니다.

 

저는 왜 박명기 교수에게 돈을 건넸을까요?

 

사건이 터지자 걱정해주는 친구 변호사들이 찾아와서“왜 우리와 상의하지 않았느냐?”한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았는데 반문해보면 그 대답은 한결같다. 돈을 왜 주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저 스스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돈을 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알 수 없죠.

 

그러나 제가 박명기 선생님을 한 두 차례 만났을 때 그때 분위기에서 느꼈던 것, 그런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저로서도 제 선에서 막지 못했던 사람으로 어떻게 향후에 헌법을 논할 것이며, 특히 인권에 대해서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헌법은 인권을 이야기 합니다. 인권의 최정상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고, 생명권은 여기에 중핵적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포기한 인권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법조계의 관례에 따라 이런 일을 하면 위험스럽다. 선거법위반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말하자면 사람이 죽든 말든 돈은 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법률가들의 판단과 충고는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깨진 관계를 정상화시켜 놓았더니, 왜 사람을 살렸느냐, 선거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냐는 그런 힐책입니다.

 

성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 마른자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당신은 왜 안식일에 쉬지 않고 일을 하느냐 힐책합니다. 안식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반문합니다.“너희들은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느냐? 사람이 양보다 귀하다.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대비입니다. 율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복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날 헌법은 우리 법체계에 복음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그래서 헌법이나 선거법이나 사람을 살리는데 근본취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주자고 한 사람은 저입니다.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의 사건의 주제는 금전지급에 관한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돈을 지급하자고 한 사람은 저입니다. 급한 분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의 판단에 곽 교육감이 응한 것입니다. 저는 선거와 무관한 사람입니다. 11월에야 이 사건에 투입된 사람입니다.

 

선거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곽노현 교육감이 선거과정에서 사전합의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리고 단일화가 필요는 하되, 조건을 단 단일화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알고 또 믿었습니다. 이를 기초로 박명기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박 교수님은 이런 사정을 몰랐었기에 곽 교육감에게 오해를 가졌고, 격앙된 표현을 했습니다.

 

제가 박 교수님께 돈이 급한 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다도 박 교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각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교수신분에다가 교육감출마하시고, 그런 분이 돈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싫겠습니까? 본인 스스로도 그런 말씀 하실 때마다 부끄럽다고 하셨지만, 보는 저의 마음도 함께 안타까웠습니다. 긍휼이 아닌가 합니다. Mercy.

 

이런 자연스런 마음 위에 여러 가지 생각과 상상, 판단이 뒤따랐습니다. 돌아가시면 어쩌나, 특히 유서 써놓고 돌아가시면 어쩌나, 그 사회적 파장과 수습불가능 그 가운데서 곽노현 교육감은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교육개혁의 와해와 정지-- 이런 상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긍정적으로 보면 박 교수님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사회적 능력을 수용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투자입니다. 이렇게 종합적인 판단으로 돈의 지급에 대한 이유가 결정된 것입니다.

 

돈 주자고 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평소관계로 보아도 곽 교육감은 제 말을 잘 들어주기 때문에 별 말없이 제 의견에 따라 조기지급에 들어갔습니다. 실제로 재판받고 있는 지금까지도 아직까지도 가까운 친구들은 곽노현에게 돈을 주라고 한 저를 지탄하고 있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사건의 진실을 보려면 ‘곽노현 교육감 사건’이라고 불리는‘곽노현 프레임’에만 매어있으면 안됩니다. 또 다른 프레임으로도 바라봐 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항소심의 판결문(48쪽)을 보면, 곽노현교육감과 관련한 불리한 양형사유로써, ①숭고한 교육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감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후보자를 사후적으로 매수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인 점을 꼽고 있습니다.

 

 

숭고한 교육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감이 만약 이번 사건에서 박명기교수의 힘든 사정을 외면해서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면'---이것은 분명 박명기가 3번씩이나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한 사실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14억이나 부채가 있어 카드돌려막기를 할 정도로 궁박한 상황과 교육감 후보 이후 나타난 사회적 상실감은 자살의 가능성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급한 돈을 주게 된 최초의 동인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울교육의 총수로서 법을 잘 지킨 사람이니까 잘했다고 했을까요? 그런 상황에 이르렀으면, 아마도 선거법위반했다고 비난하는 지금보다도 훨씬 강도높게 반도덕적, 반인권적 인물이라고 비난하면서 교육감직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으리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곽교육감은 이번에 사람을 살린 분입니다. 사람을 살린 분을 놓고 왜 선거법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책망하고 처벌한 것이 법원의 입장입니다. 선거법위반이라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하면서 사람 살리자는 길에 들어선 용감한 곽교육감이야말로 정말 우리가 모두 아껴드려야 할 교육자로서의 성품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판결문은 곽교육감이 선거에서 후보자를 '사후적으로 매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곽노현은 후보자를 사후적으로 매수한 적이 없습니다. 법원이 사후매수행위로 규정짓고 있을 뿐입니다. 곽교육감은 선거와 당선이후까지 전과정에서 한번도 매수를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판결문은 서슴지 않고 사후적 매수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후적 매수의 근거법조문을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로 들고 있는데, 이 법은 문언상으로 볼 때, 사전 혹은 사후의 합의(약속) 없이도 단지 '댓가의 의미'를 가진 금품수수가 있으면 해당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법원이 말하는 그런 해석은 법조문 제232조의 제목 즉 '후보자에 대한 매수'와 다르게 '사퇴자에 대한 금원지급죄'로 둔갑시켜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법조문의 문제성에 대한 고민없이 해석한 대목입니다. 불투명한 법조문이기 때문에 이 조문은 향후 입법을 통해서나 헌법재판소의 해석지침을 통해서 바로잡아야 할 법조문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다면 곽교육감이 법원의 해석에 따른 '댓가의 의미'는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미 법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시피, 곽노현은 후보시절부터 당선이후까지 일관되게 일체의 금품약속을 확실하게 거절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불법행위는 곧 교육감직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곽교육감이 자칫 잘못하면 '교육감직의 상실'에 빠질텐데, 이보다 무슨 더 큰 댓가를 바랬기에 돈 2억원을 주었을까요? 2억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2억원을 주었습니다. 교육감직의 상실보다도 교육자로서 더 나아가서 사람으로서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감행한 것입니다.

 

오로지 사람살리자는(신체생명과 사회적 생명) 저의 설명과 제안에 동조한 이유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나 곽교육감이나 마음 속에 ‘대가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스쳐지나갔어도 거기서 일을 중지할 수밖에 없는 성격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곽교육감이나 저나 법학교수입니다.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간에 우리는 열심히 법이 원하는 인간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불법적 성격의 일이라면 곽교육감이 저에게 부탁했을리도 없고, 또 저도 부탁을 들어줄 수도 없는 그런 성격의 우정관계입니다.

 

그런 일이기 때문에 아예 선거법과는 전혀 무관한 곽교육감과 박명기교수 두 사람간의 관계에서 오해를 풀고 화해를 시키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선거법은 사건이 터지고 나서 처음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법학교수로서 선거법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당연히 법전도 찾아보고, 주변의 전문가들과 상의해보았겠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는 이번 사건은 선거법과 무관한 일반적인 오해와 갈등을 해소시키고 화해케 한 그런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제1심과 항소심 모두 오로지 선거질서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면서 사람살린 사실에 대해서는 도덕과 종교의 영역이지 법의 영역이 아니라고 규정짓는 우를 범했습니다. 저는 헌법학자로서 당연히 민주주의를 위한 선거질서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거질서에서의 불법성 특히 금품수수의 관행은 우리사회에서 꼭 청산되어야 할 고질화된 사회적 폐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불법적 금품수수는 절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거질서가 사람답게 사는 사회질서보다 더 위에 놓이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질서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행위가 있을 때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당연히 후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판결을 보면 선거질서 유지를 위한다면서 후자에 대해서는 의도적 외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거판의 전후에서는 일체의 금품수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서 선거질서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행위도 처벌을 함으로써 일체의 금전수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런 입장인 것입니다. 여기에 법원의 시대적 수준에 미달하는 구태의연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법원의 보수적, 관성적 사고가 법조인들 사이에 대단히 널리 퍼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거판에서 금품수수는 곧 선거법위반이라는 고정된 관념이 지배함으로써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담, 인간다운 행위, 서로 협력하고 살고자 하는 자연스런 행위 등을 볼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법적 사고의 장애가 생긴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일상의 자연스런 미덕의 행위들을 도덕적, 종교적 영역으로 법외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선거의 공정성을 예방하기 위해서 위법한 것으로 처벌할 수도 있다는 행태는 수준낮은 권력적 법치국가의 판결형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일은 어차피 일상의 생활이기 때문에 법이 관여를 하지 않는 영역일 뿐입니다. 법위반을 가장한 금품수수행위냐 순수한 금전부조냐 하는 것은 사법부가 밝혀야 할 임무입니다.

 

전자에 해당하는지 후자에 해당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그 입증이 곤란하다고 해서 전자로 간주해서 처벌위주로 가서는 법관의 고유한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공정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사회통념’이라는 막연한 이유를 잣대로 해서 ‘선량한 행위’를 처벌하는 사회는 그 자체로 악한 사회이고, 법으로 말한다면 그것이 불법적 사회요, 위헌적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미숙한 법치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봅니다. 성숙된 사회라면 한쪽으로는 위법적 행위들을 금지하고 처벌도 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 알아서 행하는 미덕들을 더욱 더 권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군부독재라는 억압적 법(repressive law)의 단계를 지나 자율적 법(autonomous law; 형식적 법치주의)의 단계로 들어선지도 얼마 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성숙한 선진형의 응답적 법(responsive law: 실질적 법치주의)의 단계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헌법적,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헌법은 형식적 법치주의와 실질적 법치주의 모두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맺으며; 정직과 진실을 유지하며

 

이번 사건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와 곽교육감은 ‘정직과 진실’을 신조로 지켜왔습니다. 정직하게 진실을 밝히기만 하면 우리는 불법적 판단을 면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직의 가치를 재판 중에서도 누차 강조했습니다.

'정직'이 무엇이냐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법률가들은 정직이 법과 무관한 별도의 도덕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도덕군자나 목회자나 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기 때문에 정직하다고 해도 그것이 위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직이 빠지면 법이 존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직은 법의 이념이기도 하고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법철학에서는 법의 이념으로 정의와 평등과 같은 것들이 거명되었지만, 법의 민족이었던 로마시대의 법률가들은 법의 핵심사항으로서 ‘정직’을 강조했습니다.

 

실정법을 중시했던 로마 법률가들이 정직을 법의 필수적 내용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이 없으면 자신의 행위도 굽을 수밖에 없고, 남의 행위에 대한 판단도 왜곡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행위규범과 재판규범으로서의 법이 무력화됨).

 

울피아누스나 키케로의 정직에 대한 표현이 [학술휘찬])(Digesta)에 나옵니다(D 1.1.10). 마침 퇴임하신 김용담 전 대법관의 저서 <판결 마지막 이야기 : 다시 로마법을 읽으며>(도서출판 누름돌, 2009) 101페이지를 보면 잘 번역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법과 법률의 개념을 정의하기위하여 아직도 많은 학자들이 애쓰고 있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대답은 아직 찾지 못한 것 같다.

 

법을 지키면서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살아라,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라,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어라’(luris praecepta sunt haec: honeste vivere, alterum non laedere, suum cuique tribuere.)라는 것 이상으로 법 규정을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과 진실은 저희 피고인과 같이 국민의 입장에서도 준수해야 하는 지침이지만, 검찰과 법원을 포함하는 사법부는 헌법적으로 더욱 굳건히 준수해야 할 기초적인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헌법이 법관에게 요구하는 '양심'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