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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석학의 말씀?

동숭동지킴이 2012. 6. 30. 11:08

<세계적 석학의 말씀?>

 

어제(6월 29일) 세계적 철학자로 알려진 슬라예보 지젝이 쌍용차 관련 사망자 분향소에 들렀습니다. 그리하여 대기업의 정리해고에 대해 비판하는 발언을 했고, 이것을 진보신문들이 보도했습니다.

 

그의 입장은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쪽에 가까우므로 그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의 이런 관점이 쌍용차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찾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일전에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해 역시 세계적 석학인 노엄 촘스키로부터 김진숙씨 등의 투쟁을 격려하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바 있습니다. 지젝의 발언은 그런 식으로 쌍용차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닐 것입니다.

 

이른바 세계적인 석학이 내한하면 한국의 보수파든 진보파든 구체적인 한국문제에 대한 의견이나 처방전을 요구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일종의 지적 사대주의입니다.

 

그 경우 진짜 석학인가 아닌가를 본인이 판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나는 한국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선 모른다. 다만 기본적인 입장은 이렇다”라는 식으로 답하는가 아닌가입니다.

 

구체적인 사안에는 온갖 변수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세계적인 석학이라 무불통지(無不通之)인 것 같아도 한국을 구체적으로 연구해 오지 않은 이상 함부로 구체적 발언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일찍이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 不知爲不知 是知也) (참고로 여기서 爲란 글자는 ‘말한다’는 뜻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공자 말씀은 원래 당연한 진리인데 그걸 지키는 건 대단히 어렵습니다. 인간이란 게 뭔가 아는 체하고 잘난 체하고 싶어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뭔가 아는 게 많아서 자신이 충만할 때에만 오히려 덜 잘난 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 역시 여기에 해당합니다. '지적 충만'과 '지적 겸손'은 함께 가지 않나 싶습니다.

 

본인은 다른 나라 학계에 정통하지 않습니다만, 나라에 따라 학계 풍토가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독창적인 발상을 중시하는 서구에선 구체적인 fact에 대한 철저한 점검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독창적인 발상에서 서구를 능가할 수 없었던 일본에선 fact에 대한 확인이 훨씬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이전에 말한 대로 일본학자는 대체로 10개를 알면 하나를 말하는 편입니다, 반면에 서구학자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말을 합니다. 한국에 온 적도 있고 장하준 교수가 존경하는 크로티는 “대우차는 해외매각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스티글리츠는 한국이 IMF의 요구에 반대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크로티나 스티글리츠가 아무리 대가라도 한국의 구체적 사정을 얼마큼 제대로 연구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른바 대가로부터는 원리적 사고방식에 대해 받아들일 부분은 있겠으나 한국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을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선 곤란하겠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석학들 중에는 점점 인기에 도취되어 엉성한 저널리즘적 태도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것이지요. 장하준 교수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젝의 발언은 일반론 수준을 크게 넘어선 것 같지는 않으므로 이 점에선 다른 학자들보다 나아보입니다.

 

물론 본인에게도 함부로 발언하는 과오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이 아니므로 위험성이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만, 다른 일반교수들에 비해 언론과 접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기자들이 전화로 본인의 코멘트를 따려할 때에도 내 전공분야가 아니면 모른다고 답하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어쩌다 답해놓고 후회할 때가 없지 않습니다.

 

앞에서 공자 말씀을 인용했습니다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뭘 모르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뭘 모르는지를 아는 것도 상당한 경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이 아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법이지요.

 

어쨌든 세계적 석학을 비싼 돈 주고 불러다가 한국 문제에 대해 답을 캐묻는 사대주의적 행태는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을 불렀을 때에는 그 사람의 전공분야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물음을 던지려면 질문자가 상당한 수준이 되어야 하니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 질문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세계적인 석학을 부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석학을 불러 그의 전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양념삼아 한국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겠습니다. 그가 진짜 석학인가 아닌가를 검증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런 무례한(?) 질문으로 세계적인 석학을 곤혹스럽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