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고유의 글

김근태 선배를 생각하며

동숭동지킴이 2011. 12. 31. 12:46

 

김근태 선배를 생각하며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혹시 다음 생(生)이 있다면 그 때엔 이번 생에서 못 이룬 뜻을 펼칠 수 있기 바랍니다.

 

김근태 고문은 제 대학 선배지만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몇 번은 얼굴을 뵌 기억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에 남는 건 1980년 1월 1일 안병직 교수님 댁에서였습니다. 1979년 박정희가 죽고 세상이 뒤숭숭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표적 진보인사로 알려졌던 안교수님 댁엔 보통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배하러 모여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안교수님과 김 선배 사이에 다소 날카로운 설전이 오간 게 생각납니다. 안교수님은 해방 직후에 사회주의가 휩쓸었지만 결국 철퇴를 맞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 선배는 가열찬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두 분 말씀 다 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 살해로 당장 민주세상이 찾아온 걸로 여겨졌지만 오히려 광주학살이 벌어지고 이전보다 더 무시무시한 군사독재가 펼쳐졌다는 점에선 안교수님의 예견이 맞았던 셈입니다.

 

그러나 그런 군사독재에도 굴하지 않은 김 선배를 비롯한 여러 분들의 민주화 투쟁 덕분에 마침내 1987년의 민주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점에선 김 선배의 자세가 올곧았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양면이 있는 것이지요.

 

다만 그때 설전을 벌였던 두 분의 행로는 그 이후 많이 달라졌습니다. 안교수님은 진보인사 자리에서 180도 전환해 뉴라이트의 대표인사가 되고 그런 과정에서 김문수씨를 전향시키고 한나라당 쪽에서 한 자리(여의도연구소장) 하기까지 했습니다.

 

진보인사였다가 전향하게 된 이유는 그 분 자신이 공개적으로 실토한 바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한국경제가 곧 망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파국론(breakdown)’적 관점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파국론적 관점은 진보파 중에서도 극좌적인 사고에 속합니다.

 

그리고 안교수님이 전향한 또 다른 이유는 북한체제에 대한 환멸이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체제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정반대로 사고를 바꾼 것이지요. 북한체제를 동경했다면 그것 역시 극좌적인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체제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북유럽 같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쪽으로 온건하게 중도 진보로 전환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교수님이나 김문수씨나 모두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달은 셈입니다.

 

반면에 김 선배는 현실정치권에 들어가긴 했지만 수구보수 세력과는 늘 싸우는 편에 서 있었습니다. 1987년엔 김대중 후보쪽을 편드는‘비판적지지론’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 비판적지지론은 그 이후 많은 진보파에서 별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김영삼후보보다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김대중후보가 양보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비판적지지론에 대한 비판’은 오랫동안 야권연대를 거부하는 잘못된 핵심논리로 작용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으면 제가 이전에 쓴 “한국의 랄프 네이더는 필요 없다”를 참고하십시오.(링크는 http://blog.daum.net/kkkwkim/90)

 

그리고 김 선배는 전두환정권 시대 1985년에 고문을 당한 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근안에 의해 끔찍한 고문을 당했고 아마도 이번에 세상을 떠난 주요 원인도 그 고문 후유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문 후유증 때문에 김 선배의 날카로움이 나중에 조금 무뎌졌다고 보는 한의사도 있었습니다.

 

이 고문 문제와 관련해 한반도와 독일을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여러 해 전에 ‘타인의 삶(Das Leben des Anderen)'이라는 독일 영화가 국내에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판치는 한국에선 흥행이 될 리 없었습니다만, 저에겐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좋았습니다.

 

영화는 동독의 슈타지(Stasi, 비밀경찰)가 반정부 인사를 감시하고 취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가 의외로 생각한 것은 슈타지가 반정부인사를 고문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점이었었습니다. 기껏해야 감옥갈 수 있다든가, 인생경력이 파탄날 수 있다든가 하는 게 취조 때의 주된 협박이었습니다.

 

독일은 통일 이후 역사교육과 과거사 청산을 위해 슈타지 본부를 그대로 두고 박물관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의 독일 방문 길에 슈타지 본부에도 들렸습니다. 거기서 영화가 생각나서 안내인에게 고문 문제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슈타지 시대에 고문(physical torture)은 없었다고 분명히 확인해 주었습니다. 영화가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독일 교수에게 또 물어보았더니 동독 초기 1950년대까지는 고문이 있었다고 하기는 합디다만 그 이후엔 심리적 고문이 아닌 육체적 고문은 슈타지의 표준적 수법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공산독재 국가의 비밀경찰이라고 하면 무시무시한 존재인데 동 시대의 한국에서 유행했던 물고문, 전기고문, 칠성판 고문 등등 도대체 고문이라 할 만 한 게 자행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동독의 인권수준이 한국보다 나았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라크나 관타나모 베이의 수감자에 대한 미군의 고문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미국보다도 공산독재국가 동독이 적어도 피의자의 인권 면에선 앞섰던 것이지요.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마도 독일 또는 유럽 전반의 문화수준, 시민의식 수준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독일 영화 이야기입니다만, 서독의 극좌파를 다룬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Der Baader Meinhof Komplex)'를 보면 인명을 살상한 테러범의 인권이 우리가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존중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재판관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전을 벌이기까지 합니다.(미국이나 한국처럼 판사가 높은 데서 피의자를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서독에선 판사와 피의자가 서로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문화수준을 가졌던 서독이나 동독도 통일 이후엔 여러 면에서 후유증을 앓았습니다. 서독의 경제적 부담은 물론이고 서독인과 동독인이 서로를 멸시하거나 배척하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동독인을 Ossie, 서독인을 Wessie라고 폄하하는 단어까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한반도가 만약에 지금 통일된다면 어떨까요. 남한이나 북한이나 도대체 서독이나 동독의 수준과 비교하면 너무나 차이가 나지 않는가요. 동서독 통일의 후유증도 만만찮은데 남북한 통일의 후유증은 쉽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탈북자들이 지금 남한에서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보면 쉽게 추측 가능합니다. 그들은 2등 국민 아니 3등 국민입니다. 억양 때문에 어쩔 수 없을 땐 조선족이라고 신분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 조선족보다 못한 3등 국민인 셈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남한은 김 선배가 고문 받던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혹시 간첩혐의자에 대해선 고문이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일반인 특히 반정부인사에 대한 고문 논란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문제는 많습니다. 촛불 시위에 참가했던 여성을 짓밟는다든가, 여성을 연행하면서 성추행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정부가 싫어하는 말 했다고 미네르바를 함부로 구속하고, 정연주 KBS 사장을 몰아내기 위해 판사의 권고를 따랐다고 기소하는 등의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왔습니다.

 

3대를 세습하는 북한의 수준은 말할 필요조차 없지요. 동독 주민의 불만은 외국여행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하지만 동유럽국가로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사는 데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 따위였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평양으로도 자유롭게 다닐 수 없고 일반인은 자동차는 꿈도 못 꾸지요. 형사범에 대한 처우는 수구언론의 과장만큼은 아니지만 어찌 동독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갑자기 통일이 닥쳐오면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닥쳐오면 닥쳐오는 대로 헤쳐 나가야 하겠지만, 그 전에 남북한의 수준을 높이는 노력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통일의 후유증이 줄어들겠지요.

 

동독의 정치범에게 고문이 없었던 데에는 자체의 사회적 수준 말고도 서독이 동독과 교류하면서 정치적 압력이 작용한 덕분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남북한 교류가 북한의 사회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명박정부에 들어와선 그게 거의 중단된 셈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 선배가 떠나가면서 남긴 과제 중에는 한반도의 인권수준을 개선하는 일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려면 이명박정부 하에서 후퇴한 남한의 민주주의를 다시 발전시키고, 북한에서 생존권으로서의 인권과 정치적 인권이 개선될 수 있도록 다시금 남북한 관계를 복원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금년에 제 블로그를 개설해 선보였습니다만, 어설픈 구석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블로그를 방문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년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노무현 정권 이야기를 끝낼까 합니다. 그럼 다들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