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장하준 논리의 비판적 해부 <창비 주간논평> 2011. 1. 26

동숭동지킴이 2011. 2. 23. 17:45

 

<창비 주간논평> 2011. 1. 26

 

장하준 논리의 비판적 해부

 

김기원(방송통신대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의 책『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재미가 있고 문체도 경쾌하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 중엔 필자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시장만능주의의 폐해에 대한 지적을 들 수 있다. (시장만능주의를 그는 자유 시장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라는 좋은 어감의 단어로 나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언어의 정치적 효과에 둔감한 소치이고, 아울러 시장의 긍정적 기능을 경시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글에선 시장만능주의로 쓰기로 한다.)

 

  또한 불균형적으로 발달한 금융부문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복지의 중요성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세탁기 발명의 의의, 탈산업화 신화의 맹점, 과도한 대학교육열에 대한 비판 같은 것들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처럼 그의 논리는 꽤 괜찮은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여러 가지 큰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우리 사회 진보파의 한계이기도 하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장교수의 다른 글들도 곁들여서 검토해보자.

 

  첫째로, 사실의 왜곡이다. 그는 책(107, 160-162쪽)에서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1960~70년대에는 1.6%로 나쁘지 않았는데 1980년대 이후론 IMF 등의 요구로 자유시장,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1980~2009년엔 0.2%로 나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통계를 찬찬히 뜯어보면, 이 지역은 1973~74년의 석유파동과 그에 따른 세계불황의 여파로 80년대가 아니라 이미 1975년부터 해당 성장률이 크게 떨어졌다. 1975~79년엔 -0.4%였다.

 

  1980~2009년 사이의 모습도 똑같은 게 아니라 1990년대 후반부터 사정이 나아져 1995~2009년의 해당 성장률은 2.3%였다. 이전의 이른바 ‘자유시장 노선’이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도 말이다.

 

  사실 그의 다른 책 『사다리 걷어차기』(241쪽)를 보면 이 지역 저소득국 그룹의 1960년대 해당성장률이 1.7%이고 1970년대는 0.2%로서 이미 1970년대부터 성장률이 나빠졌다. 중소득국 그룹의 경우도 70년대 들어 나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인용했던 통계와도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왜 이리 허술할까. 그건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고 논리를 현실에 덮어씌우기 때문인 듯싶다. 시장만능주의를 만병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모든 환자에게 다 적용하는 꼴이다.

 

  장교수의 자의적 수치해석은 사하라 이남의 경우에서만이 아니다. 그는 미국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1960~70년대엔 2.6%였는데 주주자본주의가 득세한 1990~2009년엔 1.6%로 하락했다고 한다(책 41쪽).

 

  하지만 주주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본의 해당 성장률도 1950~73년에 8.1%였으나 1973~1998엔 2.3%로 급락했다. 그 이후엔 1%도 될까 말까 했다. 서유럽도 마찬가지로 4.1%에서 1.8%로 급락했다.

 

  그러니까 주주자본주의와 미국경제의 성장률 하락을 곧바로 연결 짓는 건 무리인 셈이다. 장교수식 논법이라면 일본과 서유럽이 주주자본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장률 급감을 겪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GM 파산을 주주자본주의 탓으로 설명하는 방식도(책 45, 258쪽) 설득력이 약하다. 장교수는 주주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잭 웰치가 이끌었던 GE의 건재는 어떻게 설명할까. 모든 문제를 좌파 탓으로 돌리는 한국의 한심한 보수파처럼 인과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해서야 되겠는가.

 

  둘째로, 장교수는 한국 현실 특히 재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그는 프레시안 인터뷰에서(2011.1.4) 삼성문제와 관련해 “경영권세습을 인정할테니 노동조합을 인정하라. 이사회의 40% 정도를 정부,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에 할당해 사회의 감시를 받아라”라고 했다.

 

  이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이미 특검기소에 대한 2009년 법원판결로 삼성총수의 경영권세습 문제는 끝났다. 그저 총수자녀 사이의 영역 다툼이 남아 있을 뿐이다. 노조 인정 등등 다 좋은 말씀이지만 장교수는 우선 상황파악부터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수록, 138쪽) 그는 2008년 4월 이건희 회장의 ‘대국민 사과 및 경영퇴진 성명’에 대해 “삼성 가문 측에서는 드디어 기업집단을 해체하겠다는 거잖아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 성명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물론 삼성 가문이 그럴 의도도 없었으며, 나중엔 성명서의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

 

  장교수의 재벌관은 그의 주주자본주의관과 관련이 있다. 그는 주주자본주의에서 중시되는 주주 특히 소액주주는 배당의 극대화 등 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구만 한다고 한다(책 33-46쪽). 그래서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라는 표제까지 달았다(책 32쪽).

 

  그렇다면 장교수가 원하는 기업체제에선 소유주들이 기업을 소유할 이유가 없게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해서 주주 특히 소액주주는 모두 기업을 떠나야 마땅하다. 장교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주식시장엔 사망선고가 내려진다. 이게 그가 추구하는 바인가.

 

  필자는 주주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극단적 주주자본주의론보다 모든 기업관련자를 균형적으로 배려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론을 선호한다. 하지만 장교수의 주주 배척론은 마찬가지로 잘못된 극단이다.

 

  그리고 소액주주 특히 한국의 소액주주는 장교수의 생각만큼 그렇게 힘이 세지 않다. 기껏 시민단체가 소액주주의 지분을 모아 소송을 걸 수 있을 뿐이다. 장부 조작하고 회사 돈 빼돌리는 총수를 고발하는 시민단체 활동이 뭐가 잘못됐다는 말일까.

 

  기업경영에 대해 그나마 발언권을 행사하는 건 기관투자가들 정도인데, 한국에선 이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기관투자가들이 자신과도 거래하는 재벌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근래 금호나 현대가 무리하게 건설사를 인수하려 했을 때 기관투자가들이 도대체 손쓸 수 있었는가.

 

  장교수는 소액주주들이 배당금을 높이도록 요구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소액주주가 그럴 힘도 없고 배당금보다 주가차익에 훨씬 관심이 많다. 주가가 빠질 것 같으면 그냥 팔아치운다. 그리고 배당성향(배당금/당기순이익)도 오늘날보다 1970년대에 더 높았다.

 

  주주자본주의에선 주주를 위해 기업이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한다고 장교수는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주주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시사IN』2011.1.8) 요즘 한국에서 오직 일반주주들 압력 때문에 노동자를 대량 해고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박정희나 전두환 때 더 함부로 노동자 목을 쳤다.

 

  한국은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총수자본주의다. 회사재산이 총수(지배주주)의 호주머니 장난감 비슷하게 취급되며, 일반주주나 종업원은 총수의 이익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고려대상이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총수비리를 보라.

 

  장교수는 참여연대 공격에서 재벌들과 보조를 맞췄다. 아마도 참여연대가 외국자본과 한통속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작용한 듯싶다(『쾌도난마 한국경제』82-94쪽). 그러나 이는 장교수가 삼성문제를 헛짚었듯이 참여연대 활동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은 결과다.

 

  총수 비리를 따지는 소액주주권을 행사하고자 참여연대가 지분을 모은다든가 할 때 외국자본이 참가한 경우는 있다. 이게 비난거리일까. 또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게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게 바로 참여연대에서 분가한 경제개혁연대다.

 

  물론 장교수 말마따나 정체가 불분명한 외국투자자가 우리 기간산업을 함부로 주무르는 건 좋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외국자본을 마녀사냥할 필요도 없다. 외국자본은 우리가 주체적 선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더욱이 민족주의 감정을 악용해 부패하거나 무능한 ‘재벌총수’ 문제를 덮어선 안 된다. 그것은 ‘재벌기업’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또 총수 문제를 덮으면 오히려 재벌의 부도확률을 높여 외국자본에 기간산업을 잘못 넘겨줄 가능성도 커진다.

 

  셋째로, 장교수는 한국사회가 진보의 과제만이 아니라 개혁의 과제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무시한다.

 

  한국의 이념과 정책을 평가할 땐 ‘진보와 보수’라는 기준과는 별개로 ‘개혁과 수구’라는 구분이 필요하다. 전자를 가로축에 놓는다면 후자는 세로축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장과 국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진보파와 보수파의 구별은 시장과 국가의 크기(量)에 관련된다. 진보파는 국가의 영역을 확대하려 하고, 보수파는 반대로 시장을 확대하려 한다.

 

  한편, 개혁파는 시장과 국가의 질(質)을 높이려는 세력이고 수구파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시장의 질 제고란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의 질 제고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장교수는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점에서 진보파다. 그러나 재벌개혁운동을 왜곡 비난해온 점에선 수구파에 가깝다. 수구·진보파인 셈이다. 그는 국가와 재벌이 짝짜꿍이 되었던 박정희시대가 정치적 독재 빼고는 너무나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중상주의적 박정희시대의 국가역할을 인정하더라도 바람직한 선진국을 지향하는 오늘날엔 진보뿐만 아니라 개혁의 중요성도 간과해선 안 된다.

 

  장교수는 재벌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재벌이 정계, 관계, 언론계, 학계, 법조계를 오염시키고 그리하여 기업 사이에 불공정경쟁이 지속되는 현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선진국이라고 이런 문제가 전혀 없진 않지만, 장교수도 지지하는 북유럽을 보라. 어디 한국만큼 국가가 부패하고 시장이 불공정한 경우가 있는가. 장교수와 필자가 바라는 복지사회를 위해서도 진보만이 아니라 개혁이 필요하다.

 

  증세를 통한 복지확대가 국민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국가가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이어선 안 된다. 그리고 대기업정규직과 비정규직(및 중소기업근로자) 사이의 부당한 격차라는 노동시장의 불공정경쟁 문제는 복지확대를 통한 실질임금 격차해소가 현실적 처방이다. 진보와 개혁의 이러한 상호보완관계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면사정상 이쯤에서 글을 정리해보자. 장교수의 주장엔 옳은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념에 사로잡혀 자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이번 책에서처럼 중대한 오류가 있으면 다른 좋은 주장마저 신뢰성을 잃는다.

 

  그리고 시장과 주주를 우상숭배해선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우습게보거나 죄인취급해서도 곤란하다. 시장만능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다루는 단순한 환원론으로부턴 올바른 해법이 나올 수 없다. 특히 한국처럼 개혁과 진보가 동시에 필요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