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장하준 교수 재비판 <오마이뉴스> 2011. 2. 18

동숭동지킴이 2011. 2. 23. 17:50

 

<오마이뉴스> 2011. 2. 18

 

장하준 교수 재비판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필자는 한 달쯤 전 장하준 교수에게 논쟁을 제기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장교수 본인이 아니라 장교수 책을 출판한 박윤우 사장이 나서더니, 장교수는 나중에 제대로 된 글이 아니고 말로써 자신의 입장을 단편적으로 밝혔다. ‘서울신문’, ‘중앙선데이’, ‘시사IN’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박사장이 비판한 사안 중엔 필자가 사하라 이남 지역을 저소득국 그룹과 중소득국 그룹으로 정확히 구분해서 서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는 오해를 야기할 소지가 있는 부분인지라 ‘창비주간논평’의 원래 필자 글에다 문장을 보충한 바 있다.

 

  이렇게 자신은 허술하면서 남의 허술함을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는 질책도 가능하다. 다만 서로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가운데 모두가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박사장이 언급한 그 외의 사안은 필자 글을 곡해한 것이므로 여기서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장교수 인터뷰에선 필자의 비판에 대해 아예 답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답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답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것들을 정리하면서 지난 번 글에서 필자가 지면사정상 논쟁의 취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내용을 보완함으로써 논의를 진전시켜보고자 한다.

 

  우선 장교수가 답하지 않은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총수자본주의로 봐야 하는데 장교수가 주주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있는 점. 삼성을 비롯한 재벌에 대한 상황파악이 잘못 되어 있는 점. 소액주주 폐해론에 입각해 사실상 주식시장을 부정한 점.

 

  이런 사안들을 답할 가치가 없는 시시한 문제로 본 것인지, 인터뷰라는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기 싫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장교수가 이런 쟁점들을 피하지 말고 답해준다면 논쟁이 보다 생산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다음으로 장교수가 답한 것 같은데 사실은 제대로 답했다고 보기 힘든 부분들을 조목조목 따져보면서 박사장의 곡해도 풀어보기로 하자.

 

  첫째로, 장교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경제가 시장만능주의를 채택한 1980년 이전에는 잘 나갔는데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진 엉망이 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나빠졌고, 1980년 이후도 똑같은 게 아니라 1995년 이후엔 그전과는 달리 좋아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랬더니 박사장과 장교수는 1995년 이후엔 석유와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으며, 또 1980년 이후 오늘날까지 전체를 보면 성장률이 낮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한마디로 동문서답이다. 필자가 95년 이후 성장의 원인을 물은 것도 아니고 80년 이후 전체 평균수치가 나쁘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1995년 이후에 석유가 상승 등의 요인으로 경제가 좋아졌다는 사실은 바로 장교수의 책처럼 시장만능주의를 결정적 변수로 삼는 데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1970년대 후반의 석유파동에 따른 사하라 이남 지역의 경제악화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박사장은 1980년에서 90년대 전반까지 시기에 시장만능주의에 따른 폐해가 없었다는 주장을 필자가 하는 것이냐고 따진다. 필자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지난 글 서두에서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를 인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1980년부터 진행된 시장만능주의에 따른 환율인상이나 민영화 등의 구조조정정책이 사하라 이남지역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그 지역 경제의 성적표엔 이것 말고 다른 요인들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석유파동, 원자재가격, 외채탕감정책, 내부사회구조 등 여러 가지가 해당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장교수는 책에서 1980년 이후 한동안 시장만능주의가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 1980년 이전과 이후의 경제성적표를 단순하게 시장만능주의라는 잣대만으로 처리했다.

 

  이게 무슨 커다란 사실의 왜곡이냐고 반론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후반 이후처럼 시장만능주의로 설명할 수 없는 시기까지를 시장만능주의로 덮어씌우는 식으로 사안을 잘못 설명하면 처방전도 제대로 나올 수 없다.

 

  제국주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예전 종속이론의 오류가 바로 이런 데 있었다. 장교수를 종속이론가라고 부르기는 뭣하지만 논리의 단순성은 비슷하다.

 

  한국의 진보파들이 ‘신자유주의 반대’ 타령에 몰두했던 것도 장교수와 마찬가지 오류였다. 경제든 교육이든 아무데서나 신자유주의 운운했다. 그런데 교육계의 부패나 체벌이 신자유주의 문제인가.

 

  둘째로, 장교수는 GM의 파산이 주주자본주의 탓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 노조의 문제를 지적하자 그는 노조 문제도 있지만 주주자본주의가 가장 크게 작용한 요인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런데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걸 도대체 뭘로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장교수보다는 필자가 자동차산업에 대해 더 많이 조사했겠지만 필자는 GM 파산의 결정적 원인이 무엇인지 단정적인 결론을 내릴 자신이 없다.

 

  그리고 주주자본주의가 다른 요인을 압도하는 결정적인 변수라면 주주자본주의의 모델인 GE의 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장교수는 GE 회장이었던 잭웰치가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했다는 걸로 여기에 답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답이 아니다. 잭 웰치의 발언은 퇴임 이후이고 재직 중에 경영방침을 크게 바꿨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또 그는 주주자본주의를 무조건 부정한 게 아니라 단기적 수익지표에 과도하게(heavily)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주주 특히 소액주주가 기업발전에 장애를 초래한다는 장교수의 극단적 주장에 접하면 잭 웰치는 쇼크를 받지 않을까 싶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거듭 강조하지만 필자는 주주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주주자본주의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주자본주의냐 아니냐가 기업과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변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장교수의 논리로는 일본과 유럽의 성장률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반론에서 국제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지만, 바로 그 국제통계를 볼 때 일본과 유럽의 변화를 장교수 식으론 설명할 수 없음은 이미 지난 글에서 지적했다.

 

  요컨대 주식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나라경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성립 가능하지만, 장교수처럼 주주의 의의를 부정하고 주주자본주의 여부로 기업과 나라의 운명을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라는 것이다.

 

  셋째로, 장교수는 “재벌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면 삼성 응원단이냐”고 반론했다. 그런데 소수의 극좌파를 제외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벌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지 않는 재벌개혁론자는 없다.

 

  이는 장교수가 재벌개혁론자들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증거다. 읽고서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더 큰 문제다. 재벌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공유한 야누스의 얼굴 같은 존재다.

 

  재벌개혁론자들은 재벌의 긍정적인 면은 살리되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고자 한다. 즉 성장의 주체라는 면은 살리고 재벌총수의 부패나 무능이라는 부분과 재벌이 사회를 오염시킴으로써 시장의 공정성을 해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자고 한다.

 

  이러한 시민단체 활동에 대해 장교수가 재벌과 보조를 맞춰가며 공격했기 때문에 그를 수구적 진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는 지난 글에서도 밝힌 내용인데 반론은 역시 동문서답인 셈이다.

 

  또 장교수는 재벌개혁운동이 주주자본주의를 부추기는 효과를 초래했다고도 반론했다. 총수에 의해 깡그리 무시당한 일반주주에게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는 게 주주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주자본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에게 짓밟힌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주자고 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자는 거냐고 몰아치던 수구적 보수파와 마찬가지 논법이다.

 

  이쯤 해서 논의를 종합해보자. 장교수와 같은 오류는 다른 학자들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장교수가 책(308면)에서 칭송한 미국의 크로티 교수는 대우차는 해외매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 바 있다. 도대체 그가 대우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이런 경우에 그가 해야 할 말은 “나는 모른다”였을 것이다.

 

  필자를 비롯해 한국의 진보파가 좋아하는 스티글리츠 교수는 노벨상까지 탄 세계적인 교수이지만 그의 책에서(“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p. 118) 한국은 IMF 요구에 반대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IMF에 복종함으로써 한국경제가 엉망이 되었다는 일부 진보파의 주장도 지나치지만 스티글리츠 식의 정반대 주장도 한국 현실과 괴리된 점은 마찬가지다. 아무리 대가라도 다른 나라의 구체적인 사안에 정통할 수는 없다.

 

  장교수의 오류도 이와 같은 차원이다. 물론 필자의 글에도 찾아보면 오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한다. 특히 장교수처럼 영향력이 클수록 조심의 필요성은 더 크다.

 

  그리고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면서 좌파-우파, 수구-개혁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 장교수는 반론에서 좌파는 급진적 변화를, 우파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다고 한다.

 

  서구의 사민당 같은 좌파가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가. 방향감각이 어째 이상하다. 급진좌파-온건좌파, 급진우파-온건우파로 구분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리고 압축적으로 발전한 한국에선 수구-개혁의 구분도 필요하다.

 

  일부 언론은 장교수에 대한 좌우협공 운운하는 선정적인 이야기를 퍼트렸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의 수구·보수파와 합작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장교수와 힘을 모아 수구·보수 세력과 대항하고 싶다. 다만 그러려면 장교수가 갖고 있는 수구적 부분이 지양되어야 한다.

 

  재벌개혁이 재벌의 긍정적 측면을 살리고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것이듯이, 장교수 비판도 장교수가 자신의 긍정적 측면을 살리고 부정적 측면을 극복해 주기를 바라는 것임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