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추억의 글: 민주노동당에 바란다(2004년 4월 23일자)

동숭동지킴이 2019. 5. 24. 00:41

민주노동당에 바란다


정치판이 바뀌었다. 기존정당과 질적으로 다른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했다. 민노당의 이런 쾌거는 피맺힌 오랜 민중운동의 성과다. 하지만 다른 정당들의 악수에 따른 반사적 이익의 측면도 없지 않다. 거품이 아닌 진짜 실력은 앞으로 두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일본공산당처럼 만년 소수야당에 머무는 게 아니라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처럼 집권여당으로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계사와 한국 상황이 가르치는 바는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첫째로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민노당은 이른바 '빨갱이'는 아닌가, 북한체제에 대한 민노당의 태도는 무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국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실제 이번 선거에서 민노당이 이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일은 없다. 민노당을 괜히 건드려 키워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정당이나 수구신문들도 크게 따지진 않았다. 그러나 앞으론 다를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 질곡을 극복하고'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발전시킨다'는 당 강령을 물고 늘어질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주의의 작동원리를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과거 운동의 관성에서 이런 문구가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국가사회주의의 오류를 극복한다'는 언급이나 강령에 제시된 몇 가지 명제 정도로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자본활동을 인정하되 그 폐해를 시정하려는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발전시킨다'고 하는 편이 훨씬 이해하기도 쉽고 빨갱이사냥도 맥 못추게 만들지 않을까. 현실의 사회민주주의가 우경화했다고 꼭 그 원칙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민노당이 주장하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은 바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현실이다. 한편 북한체제에 대한 평가도 '경직적'이라는 모호한 비판만으로 충분한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둘째로 정부 및 다른 정당과의 관계를 현명하게 설정해야 한다. 여당이 과반수인 이상 의결과정에서는 민노당이 물리적 투표저지 말고 힘쓸 곳은 없다. 일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정치공방과 의제설정에서다. 그런데 선진국형 보수와 진보 구도를 만들려면 한나라당은 퇴장시켜야 할 대상이고 우리당은 경쟁하면서 공존할 대상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안별로 협력한다면서 함부로 한나라당과 짝짜꿍했다간 민주당 꼴나기 쉽다. 민노당의 정부비판 때 한나라당의 정략적 가세를 반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한나라당의 변신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당이 한나라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한, 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싸울 땐 한나라당을 공격하고 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짝짜꿍해서 보수노선을 달릴 땐 그들을 몽땅 공격하면 된다. 탄핵문제에선 한나라당을, 파병문제에선 두 당을 모두 비판한 방식이 바로 그 모범이다. 다만 공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제관철을 위해 다른 정당들을 조금씩이라도 자기 쪽으로 당겨오는 일이다.


셋째로 지지기반을 넓히고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고 전문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민주노총이 당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한국노총 노동자와 노조가 없는 더 소외된 노동자도 끌어안아야 한다. 기본생계비와 활동비를 제외한 나머지 세비를 당에 반납하는 식의 금욕적 자세는 발전시킬수록 좋다. 아울러 회개하지 않는 조선일보에 대해선 반론보도 이외에 기고나 인터뷰를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조선일보에 짓밟혔던 민중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실현 가능한 대안제시를 위한 피나는 공부도 불가결하다. 의원활동을 해마다 당 내외에서 평가해보면 어떨까.


요컨대 이념, 다른 정당과의 관계, 지지기반에서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고 도덕과 실력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수권정당으로 가는 길이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민노당의 존재는 신선함과 유쾌함 그 자체였다. 꿈을 주는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의정활동에서 그 꿈을 하나씩 실현시켜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