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추억의 글: 시사저널 2001년 3월 15일자 [한국에도 존경받는 부자를]

동숭동지킴이 2018. 1. 15. 09:21


한국에도 존경받는 부자를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부시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보수색깔 드러낸답시고 상속 증여세 폐지안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방안에 대찬성할 것 같은 갑부 100여명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범죄와 마약과 빈부격차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가 버티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노브리스 오브리제(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리라.


또 미국의 대기업총수들은 자식에게 기업경영을 승계하지도 않는다. 철강왕 카네기도 그랬고 빌 게이츠도 100만 달러를 자식에게 물려주기로 했을 뿐이다. 이들은 스스로 부자란 '사회적 재산의 관리인'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사회의장인 포드 4세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독자성을 갖는 최고 경영자가 별도로 존재한다. 가족의 기업지배가 꽤 남아있는 유럽에서도 소유 지배와 경영은 분리되어 있다.


구미의 기업체제가 이렇게 된 것은 오랜 자본주의 발전에서의 깨달음 때문이었다. 기업 특히 대기업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재산이며 또 기업은 유능한 인물이 경영을 맡아야 발전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일본에서는 2차대전 직후의 재벌해체를 통해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그리고 그 이후 성장한 혼다와 같은 기업에선 창업자가족이 아예 간부직에 앉을 수 없게 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엔 어떠한가. IMF사태로 혼쭐났는데도 재벌의 세습경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삼성의 3세 총수는 갖가지 불법적이고 변칙적인 수단으로 수조원의 재산과 기업지배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란지 이제 기업경영 일선에 나설 모양이다. 현대에선 거창한 3부자 동반퇴진 선언이 어설픈 쇼로 끝나고 말았으며, SK의 2세 총수일가는 순환출자와 부당내부거래라는 땅 짚고 헤엄치기로 그룹지배권을 구축한 다음 경영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사실 재벌체제의 핵심문제는 쉽게 이야기하자면 '생물학적' 문제이다. 즉 어떤 인간의 능력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수는 없으며 경영능력의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재벌의 왕조적 독재체제와 상충되고 있는 것이다. 포드 1세가 말년의 판단력약화로 기업을 휘청거리게 만든 역사와 우리 재벌총수 몇몇의 모습을 보면 창립자라도 기업경영을 죽을 飁까지 지휘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게다가 2,3세 총수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기업경영에는 이리저리 부딪치는 경험과 창조적 발상을 끌어내는 피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2,3세 총수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경영을 떠맡으니 그 기업이 잘될 리 없다. 또 이들은 2세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부모 잘 만나서 사장된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강박관념이 이들을 지배하고, 그래서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큰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IMF사태 당시 망했거나 어려워진 재벌 중에 이런 예가 적지 않다. 2,3세는 경영자가 아닌 대주주지위에 만족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다.


물론 식당이나 중소기업이라면 주인이 챙기고 앉아 있는 게 중요하리라. 그렇지만 중소기업에서도 2세 경영은 태반이 실패한다. 그런데 복잡다단한 대기업경영을 2,3세가 맡으니 위태롭지 않겠는가. 또 대기업은 중소기업과는 달리 총수의 지분이 얼마 되지 않는 엄연한 국민재산이다. 사장자리에서의 업적을 통해 경영능력을 검증받겠다고도 하지만, 망해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경영능력 검증은 일반사원과 동일한 조건하에 경쟁시키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


암담하고 완고한 재벌체제에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다행히 미래산업의 정문술씨처럼 총수 스스로 각성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재벌의 소유 지배구조를 개혁하여 유능한 전문경영자가 기업의 여러 이해관계자에게 책임지고 경영하는 '책임전문경영체제'를 하루빨리 실현해보자. 그렇게 해서 우리 나라에서도 선진국처럼 존경받는 부자가 생겨나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