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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교수가 블로그를 한 이유: 후배 주진형박사님의 페북글 "나는 왜 쓰는가" 퍼옴

동숭동지킴이 2016. 9. 5. 14:25

<나는 왜 쓰는가>


오늘 어느 출판사 대표가 나에게 책을 쓰라는 제안을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사양했다. 그것 때문에 항상 머리 뒤켠에 있는 생각 하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번에 어느 선배가 물었다. 요새 내가 페이스북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엇하러 그런 짓을 하냐고. 그런 것은 시간 낭비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걸 왜 하는가? 사실 나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 질문을 여러번 던져봤다.

그의 말씀 대로 분명 페이스북은 시간을 많이 허비하게 한다. 흥미로운 관점에 접하거나 재미있는 세상 얘기를 읽게도 해주지만 들이는 시간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이다. 


처음에는 자주 보지 못하는 친구들과 소식을 나누는 맛에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회사 얘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했다. 그러다가 삼성물산 합병 논란에 눈치보면서 함구하는 금융업계 모습에 분개해서 리서치로 하여금 의견을 내게 하면서 지배주주 그룹과 부딪쳤다. 그 때문인지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하는 사람이 늘었다. 그러나 그때도 페이스북 친구는 몇명 되지 않았다. 작년 연말만 해도 나는 회사를 그만둔 후 페이스북을 그만 할 생각이었다. 뭘 더 알릴 것이 없어질테니까.

그러다가 정치권에 발을 걸치게 되었다. 그 소문이 돌면서 갑자기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친구 신청을 했고 잠시 고민한 후 아내 권고를 따라 모두 받아들였다. 선거공약 정책을 준비해서 알려야 했기 때문에 페이스북을 계속 이용했다. 그러면서 페친 수가 급격히 늘었다. 그래도 누구인지도 모르는 수천명의 사람들을 페친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다. 그래서 근래 들어서는 친구 신청을 거의 안 받고 있다.

회사를 그만두었고, 선거도 끝난 마당에 페이스북을 계속한 이유는 주위 사람들이 기자들 중에 내 페이스북을 읽는 사람이 많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고 Ky Won Kim 선생과 언론 접촉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여러번 있다. 내가 그의 사무실에 찾아가 얘기하는 중에 기자들이 전화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그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거의 모두 받아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 대답해주곤 했다. 거의 감탄할 지경이었다.


한번은 전화를 마친 그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주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가 글을 써봤자 읽는 사람도 많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회의할 때가 많다. 이에 비해 기자들을 잘 가르쳐놓으면 두고두고 사회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그들이 전화할 때마다 친절하게 응대해준다. 물론 그들 중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엉뚱하게 써대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계속 얘기하다보면 건지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잘 가르친 기자의 사회적 가치는 매우 높다. 그답게 애기였다. 항상 성실하고 이타적인 사람.

김기원 선생은 방송통신대에서 가르쳤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후에는 다른 곳에 가려고 넘보지도 않고 자기 공부만 했다. 아마 학자로 기를 제자가 없었던 것이 그로 하여금 기자들에게 더 많은 정성을 들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에게 블로그를 써보라고도 했다. 같이 블로그를 만들어보자고도 했다. 나중에 그는 자기 혼자만의 블로그를 만들어 신문 지면의 제약을 벗어난 글을 썼고, 그가 갑자기 죽은 후 그 글들은 작년 말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출간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페이스북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흔히들 말하는 소통은 아니다. 그런 것에 서툴기도 하거니와 그리 관심도 없다. 그러나 내 안에는 타고난 선생 기질이 아직 조금 남아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보면 가르쳐주고 싶다. 대신 참을성이 없어서 김기원 선생처럼 조곤조곤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왜 페이스북을 하느냐는 그 선배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혹시 기자들이 보면 쓸모가 있을까봐 쓴다고 했다. 아직 지적으로 훈련도 안 된 사람들이 어렵기 짝이 없는 경제 기사를 쓰다보면 엉뚱한 글을 쓸 때가 많다. 그것은 사회적 낭비와 혼란을 낳는다.

하지만 이 대답은 비록 거짓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있게 들리는 답이 아니다.

그는 이 말에 냉소를 지었다. 기자들, 아무리 가르쳐봤자 쓸모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헌재 부총리 얘기를 예로 들었다. 이헌재 부총리는 언론과 사이가 좋은 사람이었다. 존경도 받았다. 그러나 경제 운영 방침을 갖고 노무현 대통령의 운동권 출신 보좌진들에 대한 쓴소리를 했더니 그들이 이에 대한 복수로 장인 땅을 갖고 부동산 투기 의혹을 흘렸다. 그러자 언론이 모두들 거기에 부화뇌동했다. 뒷배경은 무시하고 온통 거기에만 관심을 보였다. 결국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언론은 자기 앞에 고기를 던져주면 우선 물고 보는 짐승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기자들에게 옳은 방향을 귀뜸해준다는 생각은 허튼 얘기이고 쓸모 없는 짓이라는 것이었다. 전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일리는 있는 얘기다.


과연 나는 왜 페이스북을 하는가? 쓸데 없는 고민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을 갖고 사설을 늘어놓는 것도 좀 없어보인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행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마치 소화가 안되어 위장이 거북한 느낌과 비슷하다.

내가 유독 이런 쓸데 없어보이는 질문에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성인 된 후 나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살기를 원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한국 사회와의 불화를 예감했다. 그래서 최대한 사회와 접촉이 없을 직업을 찾았고, 젊은 시절에는 대학에 가서 선생으로 묻혀 살기를 원했다. 그것이 어렵게 되어 사회 생활을 하게 된 후에도 가까운 친구 외에는 외부 사회와의 접촉을 최대한 멀리하고 살았다. 젊은 시절은 물론이고 사회에 나온 이후에도 회사 일을 빼놓고는 글을 써본 적도 없다. 신문에서 정기 컬럼 의뢰을 한 적도 있지만 모두 거절했었다.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양심적인 것처럼 글을 쓰기가 싫었다.


그렇게 폐쇄적이던 내가 50대 후반에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이 읽을 글을 페이스북에 쓰고 있다.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이 읽을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일인데도 이상하게 나에게는 이것이 어딘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 불편이 무엇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모르겠기에 더욱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쓰고 있기에 또 불편하다. 이런 것을 요새 말로 프로불편러라고 하나?


많은 작가들이 자기가 왜 글을 쓰는가를 묻는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복수라고 한 사람도 있다. 그냥 나에게도 그런 복수심, 자기 현시욕, 또는 인정욕구가 있다고 하면 되는 것을 갖고 쓸데 없이 속으로 지지고 볶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런 사람 치고는 너무도 오래 참은 셈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 무엇인가 서로 부딪치는 욕구가 있고 그것이 이런 불편함, 또는 모순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이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혼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다.

이 나이에 이런 무의미한 넑두리를 늘어 놓은 나 자신이 내가 보기에도 한심하다. 남이 그랬으면 내가 먼저 "x싸고 뭉개고 있네" 라고 핀잔을 했을 것이다.

왜 나는 글을 쓰는가? 아직도 모르겠다. 써야 하나? 그것도 모르겠다. 아이고, 이 한심한 작자야! 그러니 네 인생이 이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