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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안선희의 밑줄 긋기]에서 퍼온 글

동숭동지킴이 2016. 7. 16. 22:15


한겨레 칼럼: [안선희의 밑줄 긋기] 개혁과 진보의 이중과제


지난달 하순 비슷한 시기 국회에서는 두 가지 풍경이 벌어졌다. 21일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딸을 의원실 인턴으로 채용한 사실이 보도됐다. 남동생을 5급 비서관(운전기사), 오빠를 후원회 회계책임자로 고용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논란이 더 커졌다. 이런 행태는 비단 서 의원뿐만이 아니었기에, 친인척 보좌진을 두고 있던 의원들은 부랴부랴 이들을 면직시키느라 바빠졌다. 지난 1일까지만 면직된 사람이 44명에 이른다.

또 한 풍경은 20일부터 이어진 20대 국회 첫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핵심의제가 ‘격차 해소’로 모아진 것이다. 정 원내대표는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분배의 문제를 고심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저성장 경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정한 분배구조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안 전 대표는 “‘격차 해소를 위한 20대 국회의 로드맵’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두 풍경은 “한국 사회는 ‘개혁’과 ‘진보’의 이중과제를 떠안고 있다”는 고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김 교수의 틀을 빌려오면 개혁(합리, 상식)은 수구(비합리, 몰상식)와 맞선다. 개혁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해치고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가로막는 시스템과 행태를 뜯어고치는 것이다. 부패나 특권구조가 대표적이다. 시쳇말로 하면 ‘갑질’, 고상한 말로는 ‘지대 추구 행위’ 같은 것들이다.


친인척 보좌진 파동은 정치권에 여전히 만연한 수구적 행태의 일각이 드러난 것이다. 정치권뿐만이 아니다. 최근 드러난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 문제는 우리 사회 수구의 종합판이라 할 만하다. 정권 실세와 관료들이 산은으로, 거기에 산은 출신까지 더해 대우조선해양으로, 낙하산으로 내려가고, 분식회계를 통해 고액연봉과 성과급을 챙기고(퇴직 후에는 자문료도 받았다), 결국 대규모 부실을 국민 부담으로 떠넘겼다. 홍기택 전 산은 회장의 “(산은 계열사 낙하산은) 청와대 몫이 3분의 1, 금융당국 몫이 3분의 1, 그리고 산은 몫이 3분의 1”이라는 발언은 수구의 속살을 보여주는 ‘명언’으로 남을 것이다. 시장의 후진성도 못지않아서, 재벌과 대기업이 중소기업 위에 갑으로 군림하고, 총수 일가가 다른 주주들의 권리를 침해하며 사익을 편취한다.


진보·보수는 또다른 축이다. 진보는 공생, 경제적 평등, 분배,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중시하고, 보수는 경쟁, 성장, 효율, 사회적 강자의 자유를 강조한다. 진보는 국가가 개입해 시장의 탐욕을 제어하고, 기업으로부터 노동자 몫을 더 확보하고 복지를 확대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적극적이고 보수는 그 반대다. 우리 사회가 개혁이라는 숙제도 아직 못 풀고 있는데, 진보의 과제 역시 더 미룰 수 없는 시점에 왔음을 여야 대표 연설은 보여준다.


보수가 모두 수구는 아니듯이, 진보라고 모두 개혁적인 것은 아니다. 서영교 의원은 386 운동권 출신이었고, 짐작건대 진보로 자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혁적이지 않은 진보’는 어불성설이다. 스스로의 탐욕도 제어하지 못하는 국가의 개입을 받아들일 시장과 기업은 없다. 도덕적이고 유능하지 않은 정치와 정부는 로비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김 교수는 생전에 “우리 사회가 하루빨리 수구를 물리치고 개혁으로 나아가고, 진보와 보수 사이에는 적절한 균형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보인다. 갈 길이 바쁘다.

s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