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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통신 (21) : '북남관계'라는 표현을 우리가 써보면

동숭동지킴이 2014. 2. 16. 21:58

 

 

베를린 통신 (21) : ‘북남관계’라는 표현을 우리가 써보면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이번 주에 금강산에서 개최됩니다. 남북한 정권이 각각 무슨 꿍꿍이속으로 합의에 이르렀던 간에 어쨌든 좋은 소식입니다. 분단으로 찢어졌던 혈육을 세상 떠나기 전에 얼굴 맞대게 해주는 일은 정상적인 나라라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의무에 해당하겠지요.

 

 

이를 계기로 남북한이 MB 정권 이후 끊어졌던 대화와 협력의 물꼬를 틀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물론 1974년 7.4 공동성명 이후 남북한 정권 모두가 그걸 악용해 독재체제를 강화해 나갔던 전철(남한-유신체제, 북한-주석체제)을 밟지 않게끔 우리 모두 조심은 해야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남북한 관계를 기술할 때면 항상 목에 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남한은 항상 “남북 OO”라고 쓰고, 북한은 항상 “북남 OO”라고 쓰는 부분입니다. 먼저 나오는 단어에 더 무게가 실린다고 생각해서 각각이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독일에서는 남북한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Nord- und Südkorea(북한과 남한)라고 표현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통일된 독일은 당연히 남한과 훨씬 더 가까운데도 그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독은 독일어로 어떻게 썼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예컨대 ‘동서독 관계’라는 독일어는 Ost-Westverhältnis입니다. West-Ostverhältnis라는 단어는 구글 검색에서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동서독은 Ost- und Westdeutschland라는 단어도 있고, West- und Ostdeutschland라는 단어도 있기는 합니다.

 

 

어쩌면 독일어는 한국어와 달리 뒷부분을 강조하는 미괄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독일어 전공자의 조언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이런 독일어 표현을 알게 되면서,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남한은 ‘북남관계’나 ‘북남정상회담’이라고 쓰고, 북한은 ‘남북관계’나 ‘남북정상회담’이라고 쓰기로 합의하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풍습에 손님은 상석(上席)으로 모십니다. 양쪽이 서로 손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남한은 ‘북’을 먼저 쓰고, 북한은 ‘남’을 먼저 쓰기로 하면 어떨까요. “말 한마디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분단 70년 가까운 원쑤(북한식 표현) 사이를 다소 부드럽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2000년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괴라는 표현 대신 북한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런 표현전환을 누가 제안해야 할까요. 이런 부분에선 강자가 아량을 보여야 하는 법입니다. 겨우 자존심 하나 남은 약자가 이런 제안을 할 수 없지요. 따라서 앞으로 언젠가 정상회담이 열릴 때 남한 대통령이 이런 것을 곁들여 제안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저라도 먼저 가벼운 글에서는 ‘북남한’이라는 표현을 써볼까 합니다.

 

 

이런 북남한 문제와 관련해 새해 들어 GH는 이른바 ‘통일대박론’이란 것을 내놓았습니다. 이 표현 자체는 예전에 신창민 교수 등이 사용했던 것이긴 합니다만, 대통령이 던진 화두인 만큼 무게는 훨씬 크게 실린 셈입니다.

 

 

그리고 닉슨이 중국과의 화해를 이끌었던 것처럼, 보수파인 GH정권이 북남한 관계를 개선시킨다면 사회적 저항을 덜 받고도 일을 해나갈 수 있어 좋을 것입니다. 진보-남북화해파 쪽에서 볼 때는 이게 일종의 “손 안 대고 코 풀기”이지요.

 

 

물론 GH의 ‘통일대박론’은 통일로의 ‘과정’에 대한 고민이나 전략이 결핍된 정략적 통일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버지 박정희가 통일 화두를 유신체제 수립에 악용했듯이, GH는 지방선거나 보수정권 안정화에 통일론을 써먹고는 나중엔 나몰라 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진보-개혁-평화 세력은 GH의 통일대박론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만의 하나 한반도가 독일처럼 급작스럽게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정말로 그 통일은 대박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다만 적어도 일부 계층 예컨대 부동산 투기꾼이나 건설업자에게는 분명히 대박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에 급작스런 통일로 쪽박을 차거나 상대적으로 적은 이익밖에 누리지 못할 계층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독일의 여성문제가 통일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가볍게 언급해볼까 합니다.

 

 

며칠 전에 동독에서 연구원으로 지내다 통일을 맞이했던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동독 부인은 통일에 대해 그리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김누리 교수 등의 인터뷰 모음『독일통일 이야기 3』에도 이런 여성들의 사례가 여럿 나옵니다. 때문에 “독일 통일의 패자(敗者)는 여성이다”(Frauen sind die Verliererinnen der Einheit)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동독여성들(15~65세)의 90%는 통일 이전엔 일자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건 사회주의의 남녀동등 이념 때문이기도 했고, 노동력부족을 타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높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에는 여성이 적었고 저임금 일자리에 여성이 많았지만, 어쨌든 같은 일자리에선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직장과 가족(즉 모성 Mutterschaft)이 양립할 수 있도록 보육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동독 공장들은 규모가 컸고 거기엔 보육시설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이게 가능했습니다. 부모가 원하면 하루 종일 애를 봐주는 시설까지 거의 완비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비록 가부장주의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남편들이 가사활동을 많이 도와주었고 이혼 시에는 부부가 재산 등에 관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조사에 따르면 동독 여성들의 생활 만족도가 서독여성보다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여기엔 성적 만족도도 포함됩니다.(남자들이 서독처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하지 않으니 아내에게 성적으로 서비스할 에너지도 더 많이 남아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하하)

 

 

이리저리 찾아보니 서독의 여성 지위는 동독에 비해 낮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서독 민법에 따르면, 1958년까지 결혼생활의 최종결정권은 남편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까지는 아내가 직장을 가질 경우엔 남편의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심지어 남편이 사전 예고 없이 아내의 직장활동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권리도 1958년까지는 존재했습니다. 가장 보수적인 바이에른 주에선 1950년대까지 여자교사는 결혼하면 사퇴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성은 이혼하고 싶어도 이혼하는 게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서독의 이런 제도는 Einverdienersmodell(1인 취업자 모델)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돈을 벌고, 아내는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모델입니다. 이게 1970년대 중반까지 통용되었다는 게 놀라운 일이지요. 서독이 이 점에선 한국보다도 후진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서독 여성의 사회적 가정적 지위는 동독 여성보다 낮았습니다.

 

 

사실 선진국이라고 해서 모든 점에서 다 선진적이지는 않습니다. 스위스에선 1971년이 되어서 비로소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습니다. 해방되자마자 참정권을 누렸던 한국의 여성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런데 동독여성의 지위는 통일로 급전직하했습니다. 우선 일자리를 많이 상실했습니다. 동독 남성들도 많이 실업상태에 처해졌지만, 동독 여성이 더 심각했습니다. 동독 여성들이 많이 일했던 섬유공업 등 경공업공장들이 더 많이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보육시설을 공장 내에 갖추고 있던 동독시스템이 해체되면서 동독 여성들은 과거보다 더 많이 보육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동독에서는 여성들이 자유롭게 낙태를 할 수 있었는데 통일 이후엔 그것에도 제한이 가해졌습니다. 육아 휴가도 줄어들었습니다.

 

 

이리해서 많은 동독여성들은 실업자로 전락하고,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게 되고, 직장 내의 남녀 불평등도 심하게 겪게 되었습니다. 새로 갖게 된 직업도 예전보다 열등해지고, 사회적 안전감도 축소되었습니다. 혹시 독일 통일은 지나치게 당당한(?) 아내로부터 해방되려는 동독 남편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요. 하하하.

 

 

물론 메르켈 총리처럼 통일 이후 높은 지위를 누리고 성공한 사례도 많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물질적 풍요 수준은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아졌습니다. 따라서 동독 여성들이 모든 점에서 쪽박을 찼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통일의 비용(cost)과 이익(benefit)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우리 통일과 관련해서도 기억해두면 좋을 것입니다.

 

 

한편, 앞서 소개한 동독부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자신들은 각각1,000마르크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당시 일반 노동자들의 월급 500마르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요즘 독일 연구자들의 상대적 지위보다 높은 셈입니다.)

 

 

그런데 식량 등 생필품은 아주 쌌다고 합니다. 다만 컬러 TV는 4,000마르크, 자동차는 10,000마르크로 상당히 비싼 사치품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생필품 비용이 적게 들어 자동차에 대한 수요는 넘쳐났습니다.

 

 

자동차를 구입하려면 10년 정도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독인들이 통일을 바란 동기는 “자유롭게 서방세계를 여행하고”(동유럽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음), “자동차를 빨리 사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동독의 대표적인 자동차 Travant임)

 

 

 

 

그 동독 부부에게 자동차를 몰았는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래 기다렸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다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궁하면 통한다(窮則通)는 식이지요.

 

 

자기들은 결혼하자마자 당장 구매할 금전적 여력이 없으면서도 미리 구매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돈이 모일 때쯤 차례가 돌아오는 것이지요. 심지어 자동차를 몰 생각이 없는 할머니까지 자식들을 위해 자동차 구매신청을 해 두었다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을 거친 오늘날 북한 사회의 인민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바로 이런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구입순서(Warteliste)가 제대로 지켜졌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일부 연고가 작용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지켜졌고, 동독 공무원들이 그와 관련해 뇌물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했습니다.

 

 

동독 부부는 이런 청렴현상은 옛 프러시아 관료의 전통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반면에 체제 전환 이전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에선 부패가 심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게 문화적 차이인지도 모르겠고, 이런 문화적 차이가 경제-정치 발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할 것입니다.

 

 

다만 옛날 북한에서도 부패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생존이 힘들어지고 시장이 비합법적으로 발전하면서 부패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장성택을 처형한 이유 중의 하나가 부패 문제이지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관리가 부패한 게 오늘 북한의 현실입니다.

 

 

북한을 다녀온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수행한 안내원이 자기 아들이 좋은 고등중학교에 입학하려면 월급만 가지고 살기 힘든 교원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니, 혹시 달러 가진 것 있으면 몇 푼 주고 갈 수 있겠느냐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런 직접경험 말고 부패에 관한 탈북자들의 증언은 수두룩합니다.

 

 

 이에 비추어보면 관료의 청렴이라는 역사적 전통 말고도, 동독인들이 기본적 생활에선 애로를 겪지 않았고, 시장도 별로 발달하지 않았던 게 부패가 별로 없었던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동독은 Stasi(정보기관)에서도 육체적 고문은 가하지 않았던 나라였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전 한국보다도 상당 부분에서 앞선 나라이지요. 그런 동독과 오늘날 북한의 차이를 고려하면서 통일과정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은 경제면에서 과거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시장경제가 인민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독재의 문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장성택 처형이 그 한 사례인데, 몇 년 전 평양에서 여러 달 연구를 했던 유럽인을 최근에 만나서 들은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김일성대학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김일성대학 교수와 만나서 이야기를 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습니다. 만나고 싶다고 하면 대학 당국은 왜 만나려는지 하면서 자꾸만 미적거렸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교수를 한번 만날 수 있었는데, 그 교수는 도대체 대화할 생각을 하지 않더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발언이 나중에 문제가 될까 걱정해서겠지요. 평양을 방문한 외국인 연구자의 분야는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 고대-중세 한국문학인데도 이 모양이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김일성대학 도서관을 이용하려 했을 때였습니다. 연구자이니 북한의 소장자료를 보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데, 열람증 발급 자체를 차일피일 미루더라고 합니다. 처음엔 아예 안 된다고 하더니 따지니까 겨우 발급을 해주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람증으로 도서관에 들어가려 하니 아예 출입을 막고선 보고 싶은 자료 목록을 제출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7권의 도서를 요청하니 이미 그 책들은 대출이 되어버려서 이용할 수 없다고 답하더랍니다. 그리해 또다시 항의를 했더니 겨우 1권만 갖다 주더라고 하네요.

 

 

또 자신이 머무른 건물에서 다른 층으로는 가볼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층마다 군인들이 지키면서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건물의 층마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는 게 상상이 잘 안 갑니다.

 

 

저도 김일성대학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안내원을 따라 다녔으니 총을 둔 군인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심하게 통제를 할 것 같으면 아예 사정상 받아줄 수 없다고 하면 될 터입니다.

 

 

그런데 북한당국은 왜 이리 어리석게 행동하는지 답답하지요. 아마도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중국도 공산당독재 하에서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으니, 북한도 정치적으로는 과거체제를 거의 그대로 고수하면서도 경제적으론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는 합니다.

 

 

한편, 1980년대 말에 북한에 머물렀던 외국인에게서 당시 사정을 들은 게 있어서 곁들여서 소개합니다. 1988년에 남한에서 88올림픽이 개최되자 북한은 경쟁의식에서 1989년에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합니다. 임수경씨가 입북해 북남한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로 그 행사입니다.

 

 

 

 

 

그런데 그 행사 비용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46억 달러라는 추정금액이 남한 문헌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무리한 지출이 1990년대 북한이 애로를 겪는 하나의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46억 달러라는 추정이 이루어졌는지 모르고, 그래서 그 추정치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외국인으로부터 북한이 당시 평양축전을 위해 동독으로부터 선박 5척의 물량을 수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박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많은 물품을 수송하는 것이라 5척의 선박이라는 데서 북한이 축전 행사에 얼마나 많은 자원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6억 불이라는 수치의 정확성과 별개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지요.

 

 

남한도 4대강 사업 따위의 헛돈을 많이 씁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북한이 헛돈을 쓰는 걸 보면 체제의 문제점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북한 체제의 기본적인 문제점은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하지 못하고, 경제주체의 동기부여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평양축전이 바로 그런 사례이지요.

 

 

과거 최은희-신상옥씨가 200만 달러를 갖고 북한을 떠나온 일이나, 90년대 초반 북한이 어려워지고 있을 때 김낙중씨에게 공작금 200만 달러를 전한 일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김낙중씨는 북한의 지령대로 움직인 간첩은 아닙니다만, 남파간첩으로부터 그 돈을 수령해 민중당 사람들에게 일부 나누어주었습니다.) 최근 김정은이 스키장이나 물놀이장 만든 것은 어떨까요.

 

 

아참 최은희-신상옥씨 사건은 제가 독일에서 청강하는 수업(북한의 예술을 다루는 과목)에서도 제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썰(說)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이 두 사람이 북한에 의해 납치당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판단할 소지가 있습니다.

 

 

일본인들도 여럿 납치했고, 제가 조선족에게 들은 바로는 베이징대학의 유명한 러시아어과 조선족 교수를 거의 납치하다시피해서 북한에 데려와 김일성대학 교수를 시키다가 나중에 숙청해 아파트 수위로 만든 사례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쁜 일을 하는 놈이 모든 나쁜 일에 다 책임이 있거나 항상 나쁜 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최은희-신상옥씨 납치와 관련해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그냥 ‘썰’ 차원에서 참고하십시오.

 

 

최은희씨는 1970년대에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0.26 사건에서도 드러난 박정희의 어지러운 엽색행각에는 그 학교 학생(또는 졸업생)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최은희씨는 골치를 썩이고 있었고, 학교 경영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홍콩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김정일이 이런 최은희에게 사람을 보내 유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홍콩 해변을 통해 최은희는 북한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최은희가 평양에 도착할 때는 김정일이 직접 마중 나왔다고 최은희 자신이 밝히고 있습니다. 강제 납치를 했다면 있기 어려운 일이지요. 납치 후 일정 시간이 지나 최씨가 안정을 찾은 이후에 만나는 게 정상이니까요.

 

 

이어서 신상옥씨가 북한으로 들어갑니다. 최씨를 찾아서 홍콩으로 갔다가 마찬가지로 납치되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도 이상합니다. 한국의 정보당국은 놀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신씨는 최씨와 함께 북한에서 김정일을 여러 차례 만납니다. 그런데 만날 때 녹음기를 가져가 그 육성 테이프를 풀어 나중에 책을 두 권이나 펴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그 녹음기를 마련했을까요.

 

 

 

 

 

‘썰’에 따르면, 신씨의 입북에는 미국 CIA가 개입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급 녹음기를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책에도 신씨나 최씨가 입북 과정이나 입북 이후에 몸수색을 당했다는 서술이 없습니다. 납치자에 대해선 생각하기 어려운 대우이지요.

 

 

그리고 두 사람을 납치했다면 둘이 한꺼번에 2백만 달러라는 거액을 들고 외국으로 나가도록 허용한다는 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또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갔고 미국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CIA의 보호 하에 있었습니다. 한국으로는 그동안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한참 후 한국정부에게 자진 월북이 양해가 된 연후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물적 증거가 없는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북한이 연평도 포격을 했으니 그 이전의 천안함 침몰도 북한소행이라는 남한정부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도 마찬가지 차원입니다.

 

 

한국주재 CIA 책임자 및 주미대사를 역임한 그레그조차 북한 어뢰공격설을 부인하는 글을 뉴욕 타임스에 게재했으니까요. 농협의 전산망 혼란도 북한소행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렇게 몰아버리니 그 전산망 구축에 책임이 있는 삼성이나 다른 관계자는 얼렁뚱땅 넘어갔지요.

 

 

북한에 관해선 이처럼 균형을 잡고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힘이 듭니다. 어찌하면 주사파같은 느낌을 주고 또 어찌 하면 가스통할배 같은 느김을 줍니다. 북한과 관련해 올바른 입장을 갖는 것은 마치 서커스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앞으로의 분단체제극복 또는 통일과정에서도 그런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이전에 <김씨왕조의 북한과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上)>를 블로그에 올린 바 있습니다. 이에 이어지는 글은 북남관계의 변화양상을 보면서 천천히 시간을 갖고 블로그에 올릴까 합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