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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동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동숭동지킴이 2011. 4. 23. 14:25

 

현대차 노동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김 기 원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현대자동차 노조가 또 한 건 했습니다. 정규직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토록 하는 단체교섭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제 식구를 참으로 알뜰히 챙기는 노조입니다.

 

예전의 노동자들은 자식들이 자기 같은 일을 이어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제 의사나 판검사처럼 자식도 자기 일을 물려받기를 바라는 노동자가 생겨날 만큼 한국이 좋은 사회가 된 것일까요.

 

그런 면도 있기는 하겠습니다. 현대차 정규직의 평균연봉이 7천 만 원 정도 된다고 하니, 이만하면 한국은 노동자도 제법 살 만한 괜찮은 사회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힘든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돈 좀 많이 받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이들이 현대차노조를 비난할까요. 다른 노동자들의 처지가 현대차 정규직에 비해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현대차공장 내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비정규직은 받는 게 6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소공장에 가면 그보다 더 처지가 나쁜 노동자도 많습니다. 능력이 확실하게 차이 나서 대우가 다르다면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운이나 빽이나 뇌물에 의해 대기업정규직 자리가 얻어진 거라면 그런 차이가 용납되기 힘듭니다.

 

때문에 현대차 비정규직들이 들고 일어났고, 이게 지금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정규직 노조가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가진 자가 더하다’는 말은 노동자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차에선 2005년에 노조의 전·현직 간부가 종업원채용과 관련해 뇌물을 받아 물의를 일으켰고, 작년엔 정규직 노조원들이 비정규직 파업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더니, 이젠 정규직이라는 특권의 세습을 도모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현대차 노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SK에너지나 현대중공업에서도 비슷한 단체협약이 체결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 노조는 사내하청 노동자의 분신자살을 방관함으로써 민주노총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요컨대 대기업 정규직노조원은 일반 노동자와 다르게 된 것입니다. 일찍이 엥겔스는 이를 노동귀족(labor aristocracy)이라고 불렀습니다. 영국의 노동자계급 중 노조를 결성하고 안정된 직장을 확보해 부르주아화·보수화된 계층을 지칭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동귀족은 여기다가 ‘세습’이라는 전근대적 요소까지 추가하려 합니다. 3대 세습으로 이어지는 북한정권, 역시 3대 세습을 강행하는 재벌총수라는 한반도의 봉건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요.

 

한국은 압축적 불균등발전을 겪어왔고, 그런 와중에 산업생산 면에서는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으나, 기업경영 면에선 전근대적 요소를 온존시키고 있습니다. 노조도 이를 모방한 셈입니다. 특별히 노조만 탓할 일은 아니지요.

 

재벌총수가 왕조적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니, 왕 밑의 귀족이라는 신분계층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경영과 노동귀족', 어째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다만 노동귀족은 좀 특수한 귀족이라 중세귀족과 달리 잔업이나 특근과 같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기는 합니다. 그래도 노동자 사이에선 귀족적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언론들은 노조의 이기주의를 규탄하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경우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점에선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이나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회사가 노조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라든가, 노동자 연대의 정신을 살리라든가 하는 정도입니다. 비정규직의 단결을 호소하는 게 그나마 의미 있는 주장인데, 어떻게 비정규직의 단결을 획기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지는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회사는 정규직 노조와 한편으론 대립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미 일정한 유착구조를 형성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세습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규직의 상대적 특권엔 손을 댈 형편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을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리시켜 놓으면 이른바 갈라치기(divide and rule)도 용이하지요.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의 자성을 요구하는 건 ‘소귀에 경 읽기’ 같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고, 사실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는 성인군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셈입니다. 비정규직이 자신들 고용의 안전판이고, 그들이 낮은 대우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이 특권을 누리는 측면이 없지 않는 상황입니다. 제 코가 석자인데 어찌 남의 사정까지 고려하는 성인군자가 되겠습니까.

 

인간에겐 이기심 말고 이타심(神性?)이 있다고 하지만, 오늘날 한국 같이 탁한 사회에서 어찌 노동자에게만 이타심을 촉구할 수 있겠습니까. 세습요구가 들어간 교섭안에 대해 노조대의원 355명 중 150명이나 반대했다는 것만 해도 장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선 의인 10명도 찾기 힘들었는데, 현대차에선 '부끄러움'을 아는 대의원이 절반 가까이 되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율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 가능성이 큽니다. ‘창피는 순간이고 이익은 영원하다’는 생각에 점점 물들 테니까요.

 

또 이번 현대차 노조의 세습요구에 대해 상급조직인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현대중공업과 KT 노조도 떨어져 나간 판에 덩치 큰 현대차노조까지 나가버리면 우선 재정부터 고달파질 테니까요.

 

그러니까 문제해결을 개인의 덕성이나 상급조직에 의지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노동귀족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사회구조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 그 사회구조는 언제 생겨났을까요.

 

바로 1987년 민주화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신정아씨 책에 관한 마지막 글에서 민주화를 계기로 독재적 정치권력 대신에 등장한 새로운 권력인 재벌, 관료, 검찰, 언론의 문제를 언급했는데, 사실 대기업 정규직노조도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대기업 정규직은 중소기업 노동자 및 비정규직과의 격차를 점점 확대해 가는 노동귀족으로 변모해 갑니다. 독점대기업이 획득한 잉여의 일부를 분점해가는 셈이지요.

 

1990년대 중반에 본인이 공장조사하러 돌아다닐 때 울산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중소기업 월급 1년치 모아 자동차 대기업에 뇌물로 바쳐 이직하고, 자동차대기업 월급 1년치 모아 석유 대기업에 뇌물로 바쳐 이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실제 그런 현상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는 모르지만, 근로자 사이의 격차가 이미 그때 자리 잡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뇌물을 노조간부가 받기도 한 것이지요. 다만 현대차와 석유공장의 격차는 그 이후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노조가 힘을 갖고 자본의 부당한 압박에 저항하는 것은 민주시민사회의 당연한 모습이지만,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점차 그 권력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확대하는 방향으로 사용해왔던 셈입니다.

 

즉 대기업 정규직노조는 노동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는 수구세력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복지확대를 요구하는 진보파인 장하준교수가 재벌체제를 옹호하는 수구파인 것처럼, 대기업노조는 노동을 대변하는 진보파인 것 같으면서 동시에 부당한 특권을 유지하려는 수구파로 변질해 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대기업 노조는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 특권을 상실할 때는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1998년 현대차, 2000년 대우차, 2009년 쌍용차에서 대량해고를 둘러싼 처절한 분규를 떠올려보십시오.

 

중소기업에서도 경영상황에 따라 해고가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로 인한 대립은 별로 치열하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힘이 미약하기도 하지만, 노동자는 다른 회사로 취직하면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잃을 게 크지 않지요.

 

그런데 대기업 노동자는 해고당하면 특권을 상실합니다. 다른 대기업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이고, 중소기업에 취직하면 예전과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요. 그래서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경영상 고용조정이 불가피할 때도 막무가내입니다.

 

우리의 진보파는 이런 고용조정에 대해 신자유주의 운운하면서 비판합니다.(신자유주의 타령의 문제점에 대해선 이 블로그에 있는 '신자유주의 타령을 넘어서'를 참고하십시오.) 하지만 경영상황이 악화되었는데도 고용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건 사회주의기업처럼 이윤이나 손실 따위를 무시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경영상황 악화를 구실로 함부로 해고를 하는 자본측에도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적정 고용을 둘러싼 대화를 자본 측이 제대로 안 하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노동자의 격렬한 저항의 밑바닥에는 그들이 누리는 특권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뻔해지지요. 대기업 정규직의 특권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그 특권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그들의 특별한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이야기의 핵심에 다가왔습니다. 그 특권을 어떻게 축소시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박정희나 전두환 때처럼 노조를 박살내는 방법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산업별노조(약칭:산별노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산별노조가 성립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맞지만, 애당초 대기업정규직의 특권이 존재하는 속에선 제대로 된 산별노조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근로조건 격차가 큰 데선 산업 전체적으로 근로조건을 협상하는 산별노조가 자리잡기 어렵습니다. 병원별로 간호사 대우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도 않은 보건의료노조에서조차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은 서울대병원 노조가 탈퇴한 걸 보십시오.

 

그러면 대기업의 사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토록 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파견제나 사내하도급 사용에 대해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리하면 예컨대 오른쪽 타이어를 끼우는 정규직에 비해 왼쪽 타이어를 끼우는 비정규직은 월급이 반쯤밖에 안 되는 현실은 어느 정도 개선이 가능할 것입니다.

 

안 보는 데서가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는 부당함에는 인간이 특히 참기 힘들기 때문에 이런 해결방안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건설업현장 같은 데서 일하는 사람은 중소 하도급업체 직원이 대부분인데 이들 모두를 대기업 직원으로 만들 순 없겠지요.

 

따라서 자본의 저항을 돌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이 방안은 겨우 30여만 정도의 사내하청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고 , 그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천만 명 가량의 중소기업 노동자와 대기업정규직 사이의 격차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될까요.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복지를 확대해 이런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을 올려줘서 대기업정규직과의 격차를 줄이는 게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 가계의 지출 중 교육비, 의료비, 주거비 지출을 줄여주고 노후안정을 도모하는 게 복지확대입니다. 무상급식이나 아동수당이나 무상의료나 반값등록금이 바로 그런 제도들입니다. 이는 유럽 선진국들이 실행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재벌기업이나 부자들뿐만 아니라 대기업정규직에게서도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이를 통해 사회복지를 확대하면 노동자 사이의 실질격차가 줄어듭니다. 이래도 격차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부당한 특권이라 할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정당한 격차는 필요하기도 합니다.

 

이리 되면 경영상황에 따른 고용조정에 대기업노동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일도 드물어질 것입니다. 이게 바로 노동유연성의 증진이고 이는 자본측에도 좋은 일입니다. 장기적으로 노동과 자본의 윈윈(win-win)이 가능하지요.

 

자본은 싼 인건비와 고용조정의 필요성 때문에 비정규직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정규직의 유연성이 증진되면 비정규직의 사용 필요성이 줄어듭니다. 비정규직의 인건비 싼 것과 충성도 저하 효과는 상쇄됩니다. 따라서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분도 희미해지지요.

 

요컨대 ‘복지 확대 → 노동자 사이의 실질격차 축소 → 노동 유연성 향상 → 비정규직 사용축소’라는 선순환이 가능해집니다. 이게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꿈만은 아닙니다. 덴마크의 유연안정성(노동의 유연성 + 소득의 안정성)이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게다가 요즘 한국에선 복지가 화두인 만큼 이를 잘 발전시키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유연안정성 모델의 구체적인 실현방안은 우리 사정에 맞춰야 하겠지만, 시장의 효율성과 삶의 안정성을 결합하려는 그 정신은 배울 바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우리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도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우리 사회에선 한편으론 복지확대라는 진보의 과제만을 강조하는 그룹이 있고, 다른 한편으론 시장의 공정경쟁이라는 개혁의 과제만을 강조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보았듯이 양자가 상호보완적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복지를 확대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게 아닙니다. 복지 확대를 위해선 시장과 국가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진보와 개혁의 상호보완성에 대해선 언제 다른 기회에 좀더 상세히 다뤄볼까 합니다.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