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소통] 출총제 폐지 등 재벌정책 ‘수술’ 논란
정부의 대기업집단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재계는 자산 6조원 이상의 대기업 집단에 대해 자산의 25% 이상을 계열사에 출자하지 못하도록 한 출자총액제한제도가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며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도 시장개혁 선진화 태스크포스(TF)를 구성, 출총제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정부는 출총제의 대안으로 대기업 집단의 순환출자를 막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출총제의 폐지뿐 아니라 대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는 “재벌개혁 정책의 후퇴”라며 반발하고 있다. 국내 학계의 대표적 재벌 개혁론자인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와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조사본부장이 7일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만나 출총제를 비롯한 재벌개혁 정책과 대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이하 김기원)=“최근 김근태 의장이 이른바 ‘뉴딜’을 표명하면서 출총제를 폐지하고, 대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해주는 정책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친재벌·친기업 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는 반재벌, 반기업 정책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정책은 재벌 총수들에게 아부해 결국에는 재벌 기업을 망치는 ‘사이비 친재벌 정책’이며, 진정한 의미에서는 ‘반재벌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조사본부장(이하 이승철)=“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이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집중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결코 높지 않습니다. 가족경영 체제가 다른 나라에서도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지배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기업 집단이 특수한 지배구조를 갖고, 특이한 행동을 하는 집단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을 갖고 (정부가) 재벌정책을 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김근태 의장의 최근 행보는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정책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기원=“여당 지도부는 ‘재벌 총수의 경영권을 보호해줄 테니 투자해달라”며 이를 ‘사회적 합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정책 불륜’입니다. 경영권을 함부로 보장해주면 무능한 경영자가 무책임하게 기업을 이끌어 결국 기업과 나라를 망친다는 것을 외환위기 사태에서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여당 지도부는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건망증이 심합니다. 또 기업투자라는 것은 수익성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한 뒤 이뤄져야지, 여당이 나서서 ‘뭘 보장할 테니까 투자하라’고 하는 것은 안됩니다. 정부는 기업이 투자할 때 수익성을 토대로 합리적으로 판단해 결정하도록 도와주는 데 그쳐야 합니다.”
이승철=“물론 경영권 보장은 무사안일과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외국 투기자본의 한국 기업에 대한 공격은 무능한 경영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우량기업을 저가에 매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의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효과가 더 큽니다.”
김기원=“‘메기경영론’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미꾸라지는 메기가 있어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칩니다. 미꾸라지는 역설적으로 메기가 있어야 건강하게 생존하는 것이지요. 물론 허술한 한국경제를 공략해 부동산 투기꾼처럼 폭리를 챙기는 외국자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영권을 ‘신성 불가침’으로 여겨 과도하게 보호해서는 안됩니다. 부당한 외국자본 방어하려면 총수의 황제경영을 도와주는 황금주 도입, 출총제 폐지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기관투자가, 우리사주, 개인 투자자 등의 지분을 늘려야 합니다. 이들이 외국자본의 공격을 저지하되 무능하고 부패한 재벌 총수는 교체해야 합니다.”
이승철=“최소한의 보호막은 필요합니다. 아무런 보호막 없이 메기를 풀어놓으면 미꾸라지를 다 잡아먹습니다. 재계가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보호막을 쳐달라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평균 수준의 보호를 해달라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차등의결권, 독약조항입니다. 외환위기 당시 30대그룹 중 16개 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등 부실기업 처리는 시장원리대로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재계가 우려하는 것은 우량기업에 대한 외국 투기자본의 공격과 이에 따른 국부상실입니다.”
김기원=“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계열사 출자를 통한 지배력 증폭이라는 경영권 보호장치까지 있습니다. 재계가 또다른 경영권 보호장치를 마련해달라고 하는 것은 외환위기 이전에 보였던 황제적 경영권을 유지하겠다는 겁니다.”
이승철=“우리나라 대기업보다 소유지배 괴리도, 의결권승수가 높은 나라는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규제하지는 않습니다. 출총제는 투자를 제한합니다. 특히 새로운 업종에 진출하려는 기업, 회사내 투자보다는 새로운 법인을 통해 투자하는 기업 등은 심각한 장애를 느낍니다. 또 출총제는 국내 투자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국내투자는 억제하고 해외투자를 촉진하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수많은 예외규정 적용으로 누더기가 된 출총제는 없애야 합니다.”
김기원=“출총제가 누더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걸치고 있는 누더기옷을 벗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옷으로 갈아입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여당 지도부는 그나마 걸치고 있는 누더기옷을 아예 발가벗기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겨울에는 얼어죽고, 공중도덕도 침해합니다. 출총제가 폐지되면 투자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가공의 투자, 이를테면 순환출자가 크게 늘어날 위험이 있지요. 재계에서는 출총제 때문에 투자가 제한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통계를 보면 투자가 부진한 쪽은 비(非) 정보기술(IT) 대기업, 중소기업, 서비스업 등입니다. 이는 출총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대기업들이 총수의 황제경영을 강화하려다보니 투자를 못하는 것이지, 규제 때문이 아닙니다.”
이승철=“지금 출총제 때문에 가로막힌 투자의 대표적 사례가 비IT 대기업의 서비스업 진출입니다. 비IT 대기업은 중국과의 경쟁으로 신규사업에 진출해야 하는데 전통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으로 투자하려고 합니다. 식품회사가 문화산업에, 석유화학회사가 바이오산업에, 중공업 회사가 물류 관광레저산업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산업으로의 진출은 출총제 때문에 원천봉쇄돼 있습니다. 계열사가 아니라 회사 내부의 사업부를 통해 새로운 산업에 진출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김기원=“재계의 엄살에 불과합니다. 투자에 장애가 되는 것은 정부가 모두 수용해주고 있습니다. 또 사업부를 통한 투자는 반드시 망한다 하셨는데 삼성물산을 보십시오. 무역기업이지만 건설부문 진출에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출총제는 재벌이라는 특이한 지배구조에 대한 특이한 규제일 뿐입니다. 특이하기 때문에 영구화할 것은 아니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순환출자를 금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순환출자는 상호출자와 마찬가지로 총수의 지배력만 ‘뻥튀기’하는 것이며 황제경영을 심화시켜 외환위기 같은 사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차단해 재벌 소유의 보험과 증권사를 계열분리해야 합니다. 셋째, 일본이나 미국처럼 단독주주권(1주만으로 대표 소송할 수 있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또 이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해 다단계출자에 대한 비리를 처벌해야 합니다.”
이승철=“우리나라의 오너경영 방식은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일반적 구조입니다. 선진국에서도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30%가량은 가족경영을 하고 있으며, 규제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국내시장에선 대기업일지 몰라도 국제시장에서는 중소기업에 불과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새 규제를 계속 도입하면 기업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경영의지를 꺾게 됩니다.”
김기원=“선진국 대기업들은 우리나라처럼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영능력에 대한 검증없이 2세, 3세에게 기업을 물려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재벌기업은 ‘소인국의 걸리버’ 같은 존재입니다. 걸리버가 술에 취하거나 나쁜 마음을 먹으면 큰일 납니다. 소인국은 걸리버를 추방했지만 우리는 재벌기업을 추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대기업이 도덕성과 투명성, 전문성을 갖추도록 도와주자고 하는 것이죠.”
이승철=“축구에서 수비 시스템을 스리백으로 할지 포백으로 할지, 공격진을 원톱으로 할지 투톱으로 할지는 그 팀의 환경에 달린 것이죠. 정답이 없는 것입니다. 지배구조도 그렇습니다. 일본 도요타에는 사외이사가 없습니다. 포드자동차는 100년 넘게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워런 버핏은 아들에게 경영권 물려주고, 황금주를 갖고 있어도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지 않습니까.”
김기원=“‘지배구조에 정답이 없다’는 얘기는 ‘민주주의에 정답이 없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론 맞지만 다른 한편으론 틀립니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은 ‘민주주의에 정답이 없다’며 독재체제를 정당화했지요. 현재 재벌 총수들은 ‘지배구조에 정답이 없다’며 재벌체제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도요타에는 사외이사가 없지만 총수가 자식에게 경영능력에 대한 검증없이 경영권을 물려주지는 않습니다. 워런 버핏은 거의 모든 재산을 기증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재벌 총수는 상속·증여를 위해 회삿돈을 빼돌리고, 불법비리를 저지르니 존경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승철=“유독 우리나라에만 규제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기업을 규제하는 제도를 굳이 도입해 우리나라 기업을 외국기업과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규제로 인해 투자와 일자리가 줄어들면 그 피해는 취업하려는 청년,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국민, 양극화에 시달리는 소외계층 등에게 돌아갈 뿐입니다.”
김기원=“선진국으로 가려면 재벌체제가 거듭나야 됩니다. 최근 재벌 총수에게 기업가정신의 쇠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개혁의 필요성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정리|박성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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