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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의 성장과정에 관한 연구-현대그룹을 중심으로-

동숭동지킴이 2017. 3. 26. 17:01

한국 재벌의 성장과정에 관한 연구*

- 현대그룹을 중심으로 -

김 기 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I. 문제의 제기


IMF사태를 전후하여 한국재벌은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다. 1997년 IMF사태가 발발하기 전에 이미 한보, 삼미를 비롯한 10개 가까운 그룹이 도산하여 이것이 IMF 사태를 초래한 내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IMF사태 이후 1998년 1월 13일 재벌총수와 대통령당선자 사이에 5대 합의를 맺으면서 재벌체제는 전례 없이 심각한 변화의 압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정권교체기에는 정권과 재벌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과 과잉투자의 조정을 위해 재벌 길들이기 차원의 재벌개혁이 없지는 않았다. 박정희 쿠데타 직후의 부정부패 처리, 전두환 정권 초기의 중화학 투자조정, 노태우 정권 및 김영삼 정권 시의 재벌규제가 다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IMF사태를 전후한 재벌구조조정은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어지고 30대 재벌의 절반 가까이가 부도에 내몰려 워크아웃, 화의, 법정관리를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또 초대마로 여겨지던 대우그룹도 해체되었고 마침내 국내최대 재벌인 현대마저 유동성위기를 겪고 그룹이 나누어져 가는 양상을 띠었다.

뿐만 아니라 재벌총수와 대통령당선자 사이의 합의한 재벌개혁의 내용이 ①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②상호지급보증 해소 ③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④핵심부문의 설정 및 중소기업과의 협력관계 강화 ⑤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 강화라고 하는 광범위한 영역에 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종래 한편으로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견인차로 간주되던 재벌체제는 중대한 변화의 기록에 서게 되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한국 재벌도 선진국처럼 책임전문경영체제로 지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런 환골탈태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으며, 선진국 대기업도 책임전문경영체제라는 공통성 속에 여러 차별성도 갖고 있으므로 미래의 한국 대기업이 어떤 모습을 띨지도 미지수이다.

이런 한국 재벌기업의 미래상을 예상하는 데에는 재벌기업이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모순이 잉태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무릇 사물이 생성 발전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면 재벌체제도 그 예외가 아니다. 다만 소멸 이후 새롭게 탄생하는 모습에는 이른바 경로의존성(path-dependency)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종래 한국재벌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특히 근년에 이르러서는 특정 재벌에 대한 심화된 연구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현대그룹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재벌의 변화발전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현대그룹에 관해서도 일부 연구서가 발표되었지만 여기서는 필자 나름의 시각과 자료를 통해 접근해 보기로 한다.

현대그룹의 변화과정은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주요 사업부문별로 나누어 볼 수도 있고, 자금조달 노사관계 경영조직 등으로 구분하여 변화과정을 추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접근방법들을 종합하여 시기별로 현대그룹의 변모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공식적으로는 1947년에 창립한 현대가 반세기 동안에 이룩한 역사는 한국경제의 아축적 성장을 가장 잘 대표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오늘날 우리 재벌체제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도 현대에서 전형적이고 집중적으로 표출된 바 있다. 즉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일컬어진 왕조적 독재체제의 문제나 현대건설과 현대투신의 부실문제로 그룹이 휘청거린 상황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발전 모순 구조는 우리 재벌체제 나아가서 우리 경제 전체의 발전 모순 구조인 셈이다.


II. 현대그룹의 본원적 축적


1) 일제하의 사업활동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은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농업을 계승하지 않고 도시로 나가 부두노동자, 건설잡부, 제과공장 견습공, 쌀도매상 배달원의 경험을 거쳤다. 즉 건설업노동자, 공장노동자, 운수상업노동자의 경험을 골고루 거친 셈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미곡상을 직접 운영하기에 이른다. 노동자에서 상인으로 도약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시행함에 따라 미곡상은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고 정주영은 자동차수리업을 시작하였다. 산업자본가로의 맹아적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태평양전쟁에 따른 기업정비령으로 다른 기업에 흡수 합병되고 말았다. 일제 말 한국인자본의 운동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쉽게 짐작케 해주는 사례이다. 이후 얼마동안 정주영은 광석 수송업에 종사하다 해방을 맞았다. 일제하의 제약 속에서 이농한 무산계층이 노동자를 거쳐 소부르조아까지 성장했던 셈이다.


2) 해방 이후


해방이 되자 정주영은 한때 적산회사에 취직하였다가 곧 그만두고 적산대지를 불하받아 자동차수리공장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한국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에서 적산불하 특히 적산공장의 불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현대그룹의 경우 역시 적산불하는 공장 불하가 아니므로 그렇게 결정적인 의미를 갖지는 않지만 일정한 구실은 한 셈이다.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종업원은 설립 당시 30명 남짓이었으나 1년이 지나자 배로 늘어나는 활기찬 모습을 전개하였다. 일제 독점자본이 무기력해진 공간 속에서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그 공백을 메우면서 자본을 축적해 갔던 것이다. 정주영은 여기서 나아가 1947년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토건사(이후 현대건설로 개명함)를 설립하였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다각화가 이루어진 셈인데, 얼마 후 미군철수로 인한 자동차수리업의 쇠퇴로 사업구조는 건설업으로 일원화되었다. 이처럼 다각화의 확대와 축소는 사업규모가 작을 때에는 비교적 유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이후 거대 그룹으로 성장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유연성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계열사간의 지분관계, 지급보증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버렸기 때문이다.


3) 건설업 중심기(1950-1964)


6.25가 발발한 후 현대건설은 미군공사와 관공서 발주공사를 중심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리하여 1957년경 현대건설은 군소업체의 지위에서 벗어나 건설업계 상위그룹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이 과정에는 여러 고비도 존재하였으니 고령교 건설 적자에 따른 위기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때는 정씨 일가의 가산을 일부 정리해야 할 정도였으니, 그만큼 현대건설의 재정과 사업구조는 취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건설의 기술축적에서는 미군공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미군측의 엄격한 품질감독과 교도를 통해 현대의 시공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던 것이다. 우리 경제가 '학습을 통한 산업화' 과정을 밟아 온 것이 현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전쟁기간에 현대는 창고보관업과 연안해운업도 일시적으로 영위한 적이 있으나 고령교 공사 적자를 메우는 과정에서 연안해운업을 정리했다. 반면에 창고보관업은 거기서 확보되는 현금수입을 통해 현대건설의 재기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이런 것이 위험을 분산 회피하기 위한 재벌의 다각화추진 동기인 셈이다. 또 경영이 어느 정도 정상화된 다음엔 금강 스레이트공업을 설립함으로써 건설업에서 관련다각화를 전개하는 맹아적 양상을 드러내었다.

한편 4.19와 5.16이 발발하자 부정축재자 처리와 관련하여 벌금 납부 등으로 최상위 건설회사는 위축되었으나 현대건설은 오히려 재도약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우리 재벌의 발전과정은 정권의 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4.19와 5.16은 필연적으로 재계의 재편을 초래하였다.

4.19 이후 현대건설도 부정축재자 처벌대상에 포함되었으나, 5.16이 발발한 후엔 아예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에는 현대건설이 자유당 시대에 상위그룹에 끼긴 했지만 최상위 건설사들만큼 정권과의 밀착정도가 크지 않았던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아울러 5.16 정권이 새로운 정부-재계 관계를 구축함에 있어서의 파트너로서 현대건설이 정부 특히 박정희의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결과 정부와 현대건설은 밀월관계 즉 유착관계를 맺게 되고 현대건설은 다음 장에서 서술하듯이 1960년대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여 건설업계의 새로운 왕자로 군림하게 된다. 이러한 정경유착은 후진국에서 정부주도의 공업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부산물로 간주할 수도 있겟지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골칫거리로 작용하였다.


III. 현대의 고도성장과 재벌체제 확립(1964-1979년)


1) 제조업 진출과 본격적인 다각화 개시


1964년 현대건설은 해외차관 자금으로 단양시멘트공장을 준공하였다. 이전에 스레이트공장을 건립하기는 했으나 이는 규모가 미미한 것이었고 단양시멘트공장이 최초의 본격적인 제조업진출이었다. 당시 현대 내부에서는 이를 '현대건설의 3.1운동'이라 부를 정도로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산업자본의 성장에는 여러 경로가 있었다. 일제의 귀속공장을 물려받아 산업자본으로 성장한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으나 그와 더불어 중요한 또 하나의 경로가 외자에 의해 제조공장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경우는 귀속공장 불하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후자의 경로를 밟을 수밖에 없었던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각화를 추진하는 경우에 삼성처럼 주로 비관련다각화부터 시작하는 예가 있는 반면에 현대처럼 주로 건설업의 관련분야부터 다각화를 전개시켜 나간 경우로 대별된다. 전자에선 위험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클 것이며, 후자에선 기존의 기술 등 보유자원 활용이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다. 우리 거대재벌들이 나중에 가선 관련 및 비관련 다각화사업 모두를 보유하게 되지만, 출발점에선 삼성과 현대라는 양극단의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한편 현대는 시멘트제조업에 그치지 않고 1967년 자동차산업에도 진출하였다. 과거 자동차수리업을 영위했던 경험을 살려 본격적인 자동차제조업에 뛰어든 것이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자동차산업은 대장간 수준이었는데 1960년대 들어 조립생산이 시작되고 현대도 거기에 한 몫 하였다.

<표 1>에서 보듯이 현대자동차는 출발 초기에는 신진 등 선발업체에 크게 뒤졌다. 그러나 곧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 신진을 추격해갔고 마침내 1970년대에 가서는 포니의 개발과 더불어 한국자동차업계를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급성장에는 모기업인 현대건설의 지원이 결정적이었고, 특히 1969년에서 1972년까지의 위기에는 현대건설의 인적 물적 지원이 없었더라면 현대자동차는 파산했을 상황이었다.


<표 1> 국내 각사 자동차 생산 (단위 : 대수)


총계

현대

기아

아세아

신진

GMK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6604

17656

30994

28819

23002

18660

26334

614

7832

4360

3546

4142

7009

1294

2688

4376

6121

5912

5672

8373




1737

3037

1888

1407

5310

14354

18786

16601

10507

4918

140






2040

9405

자료 : {현대자동차 25년사}, 1111-1114 쪽


그리고 현대자동차가 설립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맺은 외자와의 관계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우선 단양시멘트에서와는 달리 차관자금에 의존하지 않고 제조업을 설립했다는 점은 한국경제와 현대건설이 그만큼 내적으로 성숙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또 포드와 기술제휴를 맺기는 했지만 경영권을 넘기지는 않았으며, 이것이 장차 한국자동차산업이 세계에서 후진국 자동차산업 중 드물게 수출산업으로까지 성장하게 된 배경이었다.

1974년 고유모델 포니를 개발하는 데서 미쓰비시와 합작한 것도 현대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빅3나 도요타 와 같은 업체와는 달리 미쓰비시와 합작했기 때문에 현대자동차의 운신의 폭은 상대적으로 넓었고, 이것이 자체적인 기술축적이나 시장개척을 용이하게 만든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이다.

또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부는 자동차공업을 일원화하려는 정책을 갖고 있어서 자칫하면 신진자동차의 독점이 지속될 뻔했다는 점이다. 정부는 시장수요의 한계를 내세워 경쟁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이후 1980년의 불황기에도 재등장한 바 있다. 산업정책적 차원에서 시장의 독점 또는 과점을 유지하려는 정부일각과 새롭게 진입하려는 업계의 갈등은 우리 산업발달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던 것이다.

과당경쟁의 저지인가 경쟁을 통한 시장활성화인가의 문제가 정부정책의 딜레마였던 셈이다. 그런데 어쨌든 1960년대 현대자동차의 참여는 시장의 활력을 불어넣고 나아가 1970년대의 자동차 국산화와 1980년대의 해외수출을 주도함으로써 한국자동차공업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2) 해외건설 진출


우리 나라 건설업의 해외진출은 주로 월남파병에 수반되어 시작되었다. 1950년대 미군공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이렇게 한국자본의 축적과정에서는 미군과의 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현대건설 역시 월남공사에 참가했지만, 현대는 그 이전에 태국의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였다. 또 괌을 비롯하여 알래스카 등지에도 진출하였다.

이처럼 현대는 일찍부터 해외진출에 앞장서 왔고 이 점에서 다른 재벌과 차별성을 갖는다. 이런 해외공사 경험은 국내의 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대규모 공사에 활용되고 이는 다시 중동진출로 발전한다. 즉 국내공사와 해외공사가 상호누적적으로 기술축적 효과를 가지면서 성장한 것이다.

또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초기의 해외공사들에서는 그다지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내의 독점적 소비재시장을 토대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현대는 이처럼 적자공사도 다반사인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성장했다. 현대의 노사관계가 폭력적 대립적 양상을 띠게 된 데에는 이러한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현대의 해외건설은 중동진출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석유파동에 의해 재정상태가 개선된 중동 산유국들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수주가 폭증했고, 한국사업체들은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을 무기로 선진국이 선점했던 시장을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건설의 경우 산업항 공사와 같은 초대형공사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이를 통해 단번에 국내 정상 재벌로 비약하게 되었다.

다만 중동건설이 초과이윤을 확보케 해주자 우리 건설업체들의 과당경쟁이 시작되었다. 거기다가 이후 중동경기도 퇴조하게 되자 건설업계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 우리 재벌체제하에서 자리잡고 있는 '나도 주의'(me-tooism)가 초래한 결과인 것이다. 선발업체의 기술력 우위가 크지 않은 상태에서 진입장벽이 작동하지 않고 있고 재벌의 선단경영이 존재함으로 인해 누구나 아무 산업에나 뛰어드는 폐해가 발생한 셈이다.


3) 건설업의 관련다각화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와 더불어 현대는 재벌체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우선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나중에 현대중공업으로 상호변경)을 설립하였다. 현대조선중공업의 발전은 건설과 二人三脚의 방식으로 성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수주 생산기술 고용 등의 면에서 건설업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현대는 건설업에서 쌓은 기술을 토대로 여기에 진출한 것이다. 게다가 중동건설업에서 필요한 철구조물 등의 자재를 현대조선중공업에서 조달함으로써 현대건설이 공상에서 막대한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현대의 조선업진출에는 정부와의 밀접한 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다. 사업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정부와 상의가 이루어졌으며 정부의 조선공업진흥법 기계공업진흥업에 따라 금융 세제면의 지원도 제공되었다. 또 현대가 바클레이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경우에도 정부의 지급보증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현대는 조선업의 설계 船殼 艤裝 공정 중 노동집약적인 선각공정에 주력하여 발전해갔다. 또 한편에서는 도크를 건설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초대형 탱커의 건조를 병행하는 독창적인 발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기술면에서는 현대중공업은 주로 유럽에 의존하였는데, 이는 이미 조선업에서 일본에 추월당한 유럽이 선박건조 그 자체보다 관련기술의 판매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바클레이은행등으로부터의 차관공여도 유럽 선박컨설터트회사의 소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 조선업은 조선업계의 세계적 재편과정을 적절히 이용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공업은 주문생산이었기 때문에 수요변동에 따른 시설의 유휴문제에 직면할 위험성이 컸다. 따라서 현대중공업도 기존 부지나 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다각화를 일찍부터 추진하였다. 수리조선을 전문으로 하는 현대미포조선을 별도로 설립하고 철구사업부 및 플랜트사업부를 설치하였다. 나아가 발전설비사업과 선박엔진공장을 설립하고 변압기등 선박용 기자재를 중심으로 각종 중전기제품을 생산하는 현대중전기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현대건설과 관련된 다각화인 조선업에 진출하면서, 그 조선업이 다시 가지를 치는 방식으로 각종 사업을 전개했던 것이다. 아울러 현대건설은 주택사업부를 독립시켜 한국도시개발을 설립하였으며, 가구사업부를 독립시켜 금강목재공업을 설립하였다. 이밖에 도로포장 전문업체로서 한국포장건설을, 블록류와 토목자재류를 생산하는 동서산업도 설립하였다. 사업부를 독립시키는(spin-off) 방식으로 새로운 계열사를 설립하거나, 외부로부터 조달하던 것을 자체 조달키 위해 새로운 계열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4) 비관련다각화와 재벌체제의 완성


관련다각화냐 비관련다각화냐의 구분은 미묘한 것이어서 쉽지 않다. 그런데 현대는 1970년대에 관련다각화를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기존 업종관의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다각화도 진전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가족경영 + 다각화된 독점'으로서의 재벌체제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우선 현대조선중공업의 폐자재관리로부터 출발한 경일공업은 1977년 강관사업에 진출하였으며, 1978년에는 인천제철을 인수하였다. 1978년에는 대한알루미늄도 인수하였는데, 현대에서 새롭게 기업을 창립하지 않고 부실기업을 인수한 얼마 안되는 예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그 후 그다지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부실기업이 부실화된 근본 요인을 치유하지 못한 채 새 경영주가 들어서 본들 별다른 성과가 없음은, 다른 그룹 특히 부실계열사 인수가 주된 기업확장 수단이었던 대우의 예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바이다.

현대조선중공업이 초창기에 건조한 유조선들 가운데 선주가 인수를 거부한 것들로써 직접 해운업에 뛰어들어 아세아상선(이후 현대상선으로 상호변경)을 창립하였다. 그런데 이선박들의 수송물량 확보가 회사의 존립에 관련되는 것이었는데 대한석유공사의 해상수송권 50%를 정부의 지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 달리 표현하면 정경유착은 현대의 성장에 필수적인 셈이었다.

그리고 정부의 종합상사 육성방침에 부응하여 현대도 1976년 현대종합상사를 설립하여 무역업에 진출하였다. 현대는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과 같은 각 계열사가 일찍부터 해외영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별도의 무역업진출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어서 다른 재벌에 비해 종합상사 설립은 늦게 이루어졌다.

이처럼 1970년대에 현대그룹은 건설업과 중화학공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해운업 무역업을 비롯해 유통업 금융업에도 진출하였다. 유통업으로서 금강개발 현대자동차서비스를 설립하였으며 금융업에선 국제종합금융을 창립하였으며 국일증권을 인수했다. 이리하여 현대그룹은 경공업 이외의 거의 모든 주요 산업에서 맹활약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렇게 현대그룹이 관련 및 비관련부문으로 다각화를 급진전시키자 경영조직의 변화도 불가피하였다. 즉 창업자가 각 계열기업의 일상적인 경영까지 일일이 챙기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60년대 말에 현대는 그룹 개념을 도입하여 창업주는 그룹의 경영 전반을 총괄하는 회장에 취임하고 그 밑에 사장이 계열사 경영을 책임지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조직이 바뀌었어도 창업주는 계열사의 주요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조직으로서 1979년 종합기획실이 발족하였다. 이는 재벌체제의 완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기존의 현대건설 기획실이 대폭 확대개편된 종합기획실은 인사 홍보 재무 신규사업개발 조사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종합기획실이나 비서실은 재벌체제하 황제경영의 보좌조직으로서 총수의 분신과는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이었으나 재벌별로 차이가 있어서 현대의 경우엔 계열사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총수가 개인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했기 때문에 종합기획실의 비중이 삼성과 같은 재벌에 비해 낮았다고 할 수 있다.


IV. 현대그룹의 성숙과 구조조정(1980-1997)


1)중화학 투자조정과 현대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는 단기간에 우리 경제를 비약시키기는 했지만 그 압축성으로 인한 부작용이 중복 과잉투자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1970년대 말에 중화학부문의 가동률이 급격하게 저하하였고, 이에 따라 3차에 걸쳐서 중화학 투자조정이 이루어졌다. 그 대상은 발전설비를 포함하여 산업용기계 자동차 중전기 전자교환시스템 디젤엔진 동제련 등 정부의 중점육성사업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는 발전설비 분야로부터의 철수를 강요당했다. 차후에 현대는 다시 발전설비 분야에 뛰어들지만 IMF사태 이후 또다시 발전설비는 빅딜의 대상이 되어 한국중공업에 넘겨주는 기묘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엔진도 6.000 마력 이상의 선박용엔진과 산업용 디젤엔진에 전문화하도록 조정당하였다.

한편 현대는 이 투자조정 과정에서 자동차산업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냄으로써 이후 우리 자동차산업 발전을 이끌어 가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부는 과잉중복투자조정을 위해 독점화를 추진하고 업계는 경쟁을 선호하는 갈등 속에서 자동차산업은 적어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적정경쟁을 유지해온 셈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의 중화학투자조정이 일단 마무리되자 현대는 새로운 다각화를 추진하였다. 즉 重厚長大型 산업 위주로 성장하여 온 현대가 輕薄短小型 산업인 전자산업에 진출하는 것이다. 1983년에 현대전자를 설립하여 반도체에 대한 대규모 붐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의 반도체 불경기와 낮은 수율로 인해 미국 현지법인을 폐쇄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노정하였다.

우리 재벌체제는 기술력이 취약한 가운데 정부의 지원하에 일정한 자금력만 확보하면 외국의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어느 업종이나 쉽게 진출하여 왔다. 이것이 소위 문어발경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 각업종에 먼저 진출한 기업에 기술과 노우하우가 쌓이고 후발주자가 이를 따라 잡기는 과거보다는 훨씬 어려워졌다.

현대가 반도체사업을 일시 중단한 후 다시 반도체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이 때는 선발업체인 삼성과의 기술적 격차가 고착된 이후였고 이것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경쟁력 차이를 지속시키고 있는 결정적 요인인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기업문화가 상이한 업종에의 진출이 그렇게 쉽사리 성공을 거둘 수 없음도 또한 주목할 만한 부문이다.

현대가 1980년대 이후 새롭게 진출한 분야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음은 1988년에 진출한 석유화학이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확장시킨 증권 투신업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동차산업에 진출한 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셈인데, 결국 1980년대 이후 각 사업에는 진입장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바로 선단문어발경영이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만든 원인이 아닐까싶다.


2)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현대의 변모


1987년의 6.10 항쟁, 6.29 선언과 그에 이은 7,8월의 대규모 노동자파업은 한국 노사관계의 지형을 변화시킨 대지진과 같은 사건이었다. 그것은 사용자와 종업원의 관계, 국가와 근로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고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양상을 크게 변모시켰다. 따라서 한국기업의 이때까지와 같은 성장체제도 심대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1987년 이후의 노동쟁의는 비단 현대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 그룹은 국내 어느 기업보다도 격심한 진통을 치렀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장기간의 파업이 지속되어 국가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빚었던 것이다. 과거 태국의 고속도로 현장이나 현대조선중공업, 그리고 사우디현장에서도 대규모 쟁의가 발발한 적이 있었으나 1987년 이후의 격돌은 특히 심각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 폭발이라는 정세가 작용하였으나 이런 일반적인 조건 이외에 현대 나름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즉 우선 현대그룹 주요 회사의 업종이 작업강도가 높은 중공업부문으로서 강성노동조합이 뿌리내리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로는 사업장들이 대규모일 뿐 아니라 주로 울산이라는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파업의 결속력과 파급력이 강력하였다.

셋째로는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은 국내최대의 기업들로서 여기서의 단체협상은 국내의 다른 기업들에게 일종의 기준설정자(pattern-setter)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전국의 노동자와 자본가를 각각 대표 또는 대리하여 현대계열사의 노와 사가 힘 겨루기를 하는 셈이었으므로, 양측은 모두 커다란 부담을 짊어졌고 운신의 폭도 극히 좁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측은 당근과 채찍 양면 전술을 사용하였다. 임금을 인상해주고 생산직과 사무기술직 사이의 인격적 차별을 축소하고 각종 복지혜택을 강화하였다. 현대중공업 등 일부계열사에선 생산직 중간관리층인 직장 반장에게 권한을 일부 위양하여 그들의 역할을 강화시켜 주었다. 반면에 구속과 해고와 같은 강경전술도 자주 구사되었고, 나중에는 노동자와 노조를 분리시키는 전술이 중요한 방침으로 채택되었다.

한국의 노사관계 전체가 1990년대 중반 이후엔 쟁의도 급격하게 줄어든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그룹 계열사의 쟁의도 1990년대 중반 이후엔 대형분규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연례행사와도 같았던 현대중공업의 분규도 1995년 이후엔 사라진 것이다. IMF사태를 맞이하여 현대자동차에선 정리해고를 둘러싼 격렬한 갈등이 있었으나 이는 다소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이처럼 분규가 급감한 것은 과거의 전근대적인 노동탄압이 많이 줄어들고 임금이 상승함에 따라 노동자의 불만도 상당 정도 해소된 결과였다. 이제 노동자들의 의식도 개인주의화된 부분이 많고 중소기업 노동자에 비해 일종의 특권적 지위를 누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의 기득권 상실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저항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현상추인적인 자세가 대세로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현대그룹을 비롯한 한국의 노사관계가 참여와 협력에 기초한 바람직한 관계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가 기업의 주체로 발전하지 못하고 회사에 의해 파편화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런 노사관계는 기업에도 부담으로 작용하여 경쟁력을 훼손하고 장기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인데 기업은 임시변통적인 노조대응에 치중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3) 정주영의 대선 출마와 현대의 시련


창업주 정주영은 199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고 그룹의 인력과 자금을 동원하여 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영이 정경유착과정에서 느낀 불만, 특히 원만했던 박정희 시대와는 달리 전두환 노태우시대에 축적되었던 불만과 개인적 야심이 이런 정치적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정주영의 대선 출마가 단순한 일개인의 정치활동이 아니라 그룹의 활동이 되어버린 점이었다. 말하자면 기업 경영의 연장선상에서 정치활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평상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것과 같은 차원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엄연히 많은 주주가 있고 채권단이 있는 대기업이 총수의 사유물로 인식되고 그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이루어지지 않던 한국 사회풍토가 만들어낸 희극이었던 셈이다. 이 선거과정과 선거 이후에 현대그룹은 총수 자식들을 비롯하여 경영진들이 구속되고 자금동원 등에서 많은 탄압을 받았다. 총수의 잘못되고 독단적인 결정으로 기업이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현대의 경영이 상대적으로 부진하고 나아가 오늘에 이르러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총수의 황제식 의사결정과 그에 대한 정치권의 보복에 의한 바가 적지 않다고 보여진다. 1980년대 이후 창업주의 의사결정이 별로 들어맞지 않았고 이런 상황이 대선출마로까지 이어짐으로써 현대그룹은 지위의 추락 심지어는 해체의 위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V. IMF사태 이후 현대의 구조조정


IMF사태 이후 다른 재벌과 마찬가지로 현대그룹도 강력한 구조조정의 압력을 받았다, 핵심업종 비관련사의 정리, 계열사의 정리, 부채비율과 부채총액의 축소, 외자유치, 총수의 계열기업 출자 등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IMF사태 직전과 대비할 때 1999년까지 계열사를 52개 정리하고 2000년에도 16개사를 정리하여 2000년 말에는 21개사만 남기기로 하였다. 1999년 말과 비교하면 부채비율은 449%에서 181%로 낮춰졌으며 부채규모도 61.5조에서 52.6조로 줄었다. 자기자본은 13.7조에서 자산재평가분도 포함하면 34.6조로 증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적인 수치개선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구조조정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부채비율의 축소가 계열사 출자증대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많으며, 계열사 숫자의 축소도 형제간의 재산분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사업 자체가 정리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재벌과는 달리 현대는 기아와 LG반도체를 인수함으로써 그룹의 실질적 부담이 가중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투신과 현대건설의 부실문제가 불거지자 현대그룹은 유동성의 위기에 직면하여 마침내 총수일가 퇴진이라는 극약처방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이런 정도로 현대그룹의 위기가 해소될 수 있을지는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어쨌든 이제는 현대그룹이 형제간의 재산분배로 나누어지든지 아니면 그룹의 부도위기로 해체되든지 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되었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해 온 현대가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우리 재벌 전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야흐로 재벌체제는 이제 발전적 해체의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물론 앞으로 이런 해체과정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고 또 재벌체제 대신 어떤 기업체제가 들어설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재벌체제의 역사적 사명이 종언을 고했다는 점만은 분명해지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