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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진보개혁파 지식인들이 잊고 있는 한 가지

동숭동지킴이 2017. 11. 11. 09:30

[교수신문]

 

진보개혁파 지식인들이 잊고 있는 한 가지

 

텍스트로 읽는 신간_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경제학자 김기원 유고집김기원추모사업회 엮음창비37618,000

 

박근혜 정부의 증세안이 발표되자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은 처음에 세금폭탄이라는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새누리당이 세금폭탄이라면서 공격한 것을 역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자 진보개혁파 쪽에선 민주당의 이런 반응을 비판했습니다. 과거 새누리당의 잘못된 정치를 답습하는 정략적 반응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복지 확대를 위해선 증세가 필요한데 세금폭탄이라는 저차원적 대응을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해 민주당은 더 이상 세금폭탄이라는 식의 공격은 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의 공격과는 무관하게 민심은 많이 이반했습니다. 국정원 댓글사태에서는 별로 동요하지 않던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몇푼 안 되는 월 1만원 남짓의 증세에 기우뚱거린 것이지요. 사실 민주당의 세금폭탄공세는 바로 이런 민심 이반을 어느정도 느끼면서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지만, 권력투쟁의 장에서는 다소 이해해 가는 정략적 대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진보개혁파 지식인들은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증세의 당위성을 설파했습니다. 복지 확대를 위해서 증세하지 않고 무슨 다른 방안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OECD에 비해 낮은 복지수준을 고려할 때, 한국의 증세는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진보개혁파 지식인들이 고려하지 않는 것이 세금의 정치학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증세를 좀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증세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타협해도 자기 재산을 빼앗아가려는 쪽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영화 대부(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1972)에는 어떤 마피아 세력이 다른 마피아 거두(말런 브랜도 분)를 죽이고 그 아들과 협상하려는 전략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전략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저 경구가 얼마간 진실을 반영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조세저항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한국의 진보개혁파는 당위론에 몰두하는 탓에 현실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봅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직접적 계기는 국왕이 증세를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 일이었습니다. 박정희정부의 몰락에는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이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아버지 부시(George H.W. Bush)가 재선에 실패한 데에도 공약을 어기면서 증세한 것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처럼 증세는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의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에서 증세 대신에 (직접적 부담을 덜 느끼는) 국채를 발행해 재원을 조달해왔습니다.

 

일본의 부채비율이 GDP2배를 넘어서고, 미국과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자꾸만 국가채무가 늘어가는 것은 바로 이런 정치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뜻이 있습니다만, 증세와 관련해서는 혁명정권이 조세저항을 개혁정권보다는 쉽게 돌파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혁명정권이 아닌 오늘날의 대부분 정권들은 증세 문제에 과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진보파들이 북유럽의 고부담-고복지를 주창합니다. 그런데 제가 견문이 짧아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고부담-고복지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한국의 연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 대한 증세의 정치학연구를 기대하겠습니다. 그것 없는 복지확대론은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경제학자 김기원 유고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김기원추모사업회가 고 김기원 교수의 여러 글편을 모아 엮어냈다. 고 김기원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83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고, 201412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갑작스런 암 판전 이후 타계 직전까지 자신의 블로그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에 글을 올릴 정도로 정열적으로 연구와 집필, 학자로서의 실천활동에 전념했다. 진보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진보주의가 갖기 쉬운 경직성이나 도그마를 경계하며 개혁과 혁신을 강조했다. ‘현실에 기반한 진단과 대안제시를 큰 원칙으로 삼았던 그는 재벌개혁은 끝났는가, 현대자본주의론, 한국산업의 이해,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등의 책을 썼다.

(2015. 12. 15.)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