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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 속 김기원(11): 정권의 길, 재벌의 길(2019. 1.29일자 경향신문)

동숭동지킴이 2019. 12. 1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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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철의 경제 단상]정권의 길, 재벌의 길

[오관철의 경제 단상]정권의 길, 재벌의 길

오관철 산업부장

대통령부터 총리, 주무부처 장관까지 문재인 정부 인사들이 잇따라 재벌과 만나는 걸 ‘재벌 기대기’로 딴지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현실적으로 재벌은 한국경제의 주요 축이기 때문이다.

[오관철의 경제 단상]정권의 길, 재벌의 길

그러나 정부의 노력에도 ‘기승전-재벌 때리기’ 인식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대로 가면 정부는 무력화되고 ‘자본 파업’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말란 법도 없다. 정부와 재벌의 정서상 간극차를 좁히기 위해선 각자의 역할과 소명을 다시 한번 짚어볼 시점이다.

정부는 재벌을 ‘하위 파트너’로 여겨선 안된다. 재벌 인사들과 밥 한 끼 먹었다고, 공장을 방문했다고 ‘시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재벌이 움직이겠지’ 생각하는 공무원, 정치인들이 있다면 오산이다.


재벌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 ‘경제권력’으로 불린다. 그만큼 막강한 구조적 힘을 갖고 있고 기본적으로 이윤을 좇는 게 기업의 속성이다. 무엇보다도 대규모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자금 여력을 갖고 있는 재벌이 비경제적 논리로 의사결정을 내린다면 그 자체로 국가경제에 엄청난 비효율이 아닐 수 없다. ‘이쯤 했으니 재벌이 보답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하루빨리 환상을 깨는 게 낫다. 

“판에 박힌 규제완화 타령 말고, 뭔가 굵직한 가시적 조치를 취해주었으면 좋겠다”는 한 기업인의 말처럼 정부의 구애공세에도 재계의 분위기는 냉골이다. 

정부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창의와 혁신이 가능한 경제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컨대 ㄱ기업은 설비투자를 하려 해도 수도권 규제에 부딪혀 있다. 지방에 공장을 지으려 해도 우수한 인재들은 경기도 밑으로는 내려가 살지 않겠다고 한다. 이럴 때 정부, 나아가 대통령과 여당의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재벌 민원 수용이란 비판을 듣기 십상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노무현 정부는 특혜 시비를 감수하면서 경기 파주에 LG디스플레이 공장 건설을 허가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변양균씨는 자신의 책 <경제철학의 전환>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기업가들이 노동·토지·자본이라는 생산요소를 자유로이 결합해 창조적 파괴를 할 수 있어야 미래 성장을 약속할 수 있다”고 적었다. 

갈수록 권력화하는 노조문제도 마찬가지다. 정규직이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중소기업 노동자, 비정규직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게 현실이다. 


진보경제학자였던 고(故) 김기원 교수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재벌독재와 노조독재를 거론했다. 노조의 협력이 없는 한 정부의 재벌 기살리기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합류가 불발됐지만 노사정 대타협을 위해 정부가 대화를 포기해선 안되는 이유다.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외에 공급 측면의 혁신을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야 하고, 그것도 실제 가시적 성과를 이끌어내야 재벌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재벌은 정부·여당의 재벌 개혁정책들이 재벌 때리기, 옥죄기가 아니라 한국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란 인식을 가져야 한다. 독재자에게 민주주의는 귀찮은 제도이나 거부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기업인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취지를 담은 제도라 하더라도 전에 없던 규제를 받을 때 일시적 혼돈과 마비증상을 겪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기업의 불법 행위를 눈감아 주는 게 친기업정책이 될 수는 없다. 미국 에너지기업 엔론이 분식회계로 파산한 사례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재벌이 행여 경제민주화 속도를 늦추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노력해 보겠노라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다면 무책임하다. 특히 정권의 임기 중후반으로 가면 힘이 빠져 재벌개혁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판단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민들은 정치·경제권력 간에 부당한 이익을 주고받은 정경유착의 과거를 잊지 않고 있다. 


공정의 시대정신은 유효하고, 경제민주화와 투자는 교환의 대상이 아니다. 총수일가의 전횡과 사익 추구, 경영권 세습 등 전근대적 지배구 조의 병폐를 안고 재벌이 지속적으로 갈 수는 없다. 재벌 스스로 결단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지속적인 정치·사회적 압력이 불가피하다. 재벌 죽이는 정부라고 외부만 탓할 게 아니라 시대정신을 수용하면서 야성적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재벌이 산다. 


한 시인은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다’고 읊었다. 밉게 보면 정부는 재벌을 적대시하고 옥죌 뿐이며, 밉게 보면 재벌은 중소기업을 쥐어짜는 한국경제 만악의 근원일 뿐이다. 


합창단원들이 지휘자를 보지 않고 각자의 노래만 해서는 아름다운 합창이 나올 수 없다. 정부와 재벌은 민생고에 허덕이는 시민들을 더 이상 외면해선 안되며 결탁이나 유착이 아닌 조화로운 ‘하모니’를 뿜어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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