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귀족의 비정상과 한국식 대처주의의 위험성>
오늘자 조선일보에 “현대차 간부들 ‘우리도 생산직만큼 대접해달라’”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조선일보는 가끔씩 왜곡보도를 저지르는 언론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 기사는 그런 종류의 기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저기서 들은 바와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기사의 링크는 맨 아래에 첨부했습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지난달 말 과장․부장급 간부사원을 중심으로 새로 생긴 현대자동차 간부직 노조가 “우리도 생산직 수준의 처우를 해달라”는 내용의 임금․단체협약안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생산직과 동일한 수준의 고용안정과 수입확보를 보장해 달라”는 6개항의 요구입니다.
보통 사무직(white collar)은 생산직(blue collar)보다 한 등급 위의 계층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일단 학력수준이 더 높으니까요. 그리해서 단적으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엔, 사무직은 깨끗한 플라스틱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반해, 생산직은 너덜너덜한 천으로 된 명찰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그런 인격적 차별이 사라지고 사무직-생산직 사이의 부당한 임금차별도 해소되어 갔습니다. 그건 좋은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그런 흐름이 이제는 사무직-생산직 사이의 ‘역차별’이 문제가 되는 상황으로까지 전개된 셈입니다.
보수 수준을 비교하면, 현대-기아차의 경우 ‘이사대우까지의 사무직’과 생산직의 평균임금면에서 생산직이 우위에 서 있습니다. 생산직의 연봉은 평균 1억원정도입니다. 한국의 최고정상급이지요.
고용면에서의 안정성은 압도적으로 생산직 정규직이 우위에 있습니다. 경기가 나빠지면 우선적으로 사무직과 비정규직이 해고(명예퇴직 포함)됩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할 상황이 되어야 생산직 정규직이 해고됩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에서 보듯이, 정규직 생산직에 대해선 해고시킨 후에도 회사는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이런 형편이라 최근 현대차그룹에서 200명 정도의 사무직이 생산직으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엥겔스는 노동귀족(labor aristocracy)이란 단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차그룹의 생산직은 한국의 다른 노동자와 비교하면 엥겔스의 이런 단어가 잘 들어맞는다는 느낌입니다.
현대차그룹의 생산직 정규직은 자녀채용 특혜까지 관철해 세습귀족의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산성은 일본도요타 자동차나 미국앨라배마의 기아차에 비해 40% 정도라고 합니다. (시간당 생산대수가 앨라배마의 경우 32대인데 반해, 국내 현대차그룹에선 18대라고 합니다.)
이런 세습귀족의 모습이나 간부급 사무직이 노조를 결성해 생산직과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모습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회사의 ‘동맥경화증’(경직성)이 간부급에까지 파급되는 양상인 것이지요.
이런 비정상은 아마도 반동(反動)을 부를 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그건 최근에 사망한 영국의 대처(M. Thacher)수상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제가 쓴 책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130쪽)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영국에서 새처(M. Thacher) 수상이 등장하기 전에 광산노동자들은 비효율적 광산의 폐쇄와 그에 따른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을 격렬하게 전개해 정권을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노동자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발로 새처같은 강력한 보수주의자가 나타나 노조를 굴복시킴과 동시에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밀고 나가게 된 것이다. 합리성을 결여한 무리한 요구는 언젠가는 꺾인다. 한국에서도 거대기업 노조의 저항이 경제적 합리성을 상실하면 결국 영국에서처럼 반동이 밀려오기 마련이다.”
과거 한국의 어떤 자동차기업 경영자가 아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을 만났을 때, 독재정권과 싸워왔던 메넴조차 노조의 문제점을 어찌하지 못해 한탄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대처와 같은 반격이 그리 쉽게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조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라틴아메리카나 이탈리아처럼 산업이 쇠락해져 가거나, 아니면 대처의 반동 같은 것을 맛보게 됩니다. 박통은 원래 대처를 숭배했던 인물임을 명심하십시오.
우리 진보파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만, 정작 대처와 같은 시장만능주의는 아직 맛을 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박통이 대처식을 밀고나갈 때 과연 우리 진보파가 그걸 감당한 능력이 있을까요.
현대차 그룹에서와 같은 비정상적 노동귀족도 큰 문제이고, 그 반동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한국식 대처주의도 큰 걱정입니다. 이 둘 다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개혁적(합리적) 진보가 과연 한국에서 힘을 쓸 수 있을까요. 답답합니다.
(조선일보 기사의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biz.chosun.com/…/html_…/2013/04/21/20130421015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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