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잡지 기고

개혁적 진보는 살아있다 (한겨레 칼럼 5월 17일)

동숭동지킴이 2012. 5. 17. 00:15

 

 

<개혁적 진보는 살아있다>   (한겨레 2012. 5. 17)

 

                                   김기원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이정희가 망가졌고 통합진보당의 내상이 심각하다. 진보개혁세력 전체도 피멍이 들었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이 부실과 부정으로 얼룩졌고, 그 뒷수습 과정이 이른바 당권파의 억지와 폭력으로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를 내건 인물들이 어쩌면 이렇게 엉망인지 참담한 심경이다.

 

하지만 진보라고 다 똑같지 않다. 진보의 아이콘에서 진보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이정희의 집단이 있는가 하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한 심상정·조준호·유시민도 있다. 옥석을 가리지 않으면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를 보면, 다행히 돌덩어리는 딴딴하게 뭉쳐 있기는 하지만 한줌에 지나지 않는다.

 

수구적 보수언론은 통합진보당 내 일부 수구적 진보파의 문제를 통합진보당 전체의 문제로, 나아가 진보세력 전체의 문제로 싸잡아 비난하고자 한다. 진중권처럼 수구적 진보파의 맨얼굴 폭로에 큰 역할을 하면서도 “대한민국 진보는 죽었다”고 외침으로써 부주의하게 여기에 휘말려선 곤란하다.

 

진보는 수구적 진보와 개혁적 진보로 나뉜다. 이게 무슨 복잡한 구분방식인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모순을 이해하고 올바른 해법을 찾으려면 ‘진보↔보수’, ‘개혁↔수구’를 정확히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통합진보당 사태의 과학적 분석도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진보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며, 보수는 사회적 강자를 대변한다. 근대사회에선 경제활동을 조정하는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양' 면에서, 진보파는 시장보다 국가를 선호하며 보수파는 그 반대다. 그리고 개혁파는 효율성·민주성을 해치는 사회시스템을 뜯어고치려는 세력이다. 따라서 시장과 국가의 '질' 향상, 즉 공정한 시장경쟁과 민주적 효율적 국가를 추구한다. 수구파는 여기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진보↔보수를 X축에 놓는다면 개혁↔수구는 Y축에 놓을 수 있다.

 

진보와 보수는 선과 악의 관계가 아니고 양자가 조화로운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혁과 수구 사이에선 수구를 물리치고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사회는 보수 중에선 수구적 보수파가 득세하고 진보 중에선 수구적 진보파가 물을 흐리기 때문에 골치다. 통합진보당의 당권파에선 북한 체제의 시대착오성을 깨닫지 못하고 민주주의 원리도 체득하지 못한 수구적 진보파가 영향력을 행사한다.

 

물론 한국의 수구적 보수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반면에, 수구적 진보가 집착하는 이득은 쥐꼬리만할 뿐이다. 또 수구적 진보는 군사독재라는 괴물과 싸우다 닮아버린 불행한 시대의 유산이다. 북한이 변하고 나서도 바뀌지 않을 집단이 수구적 진보파라는 말도 있지만, 이제 골방에서 나와 햇볕을 쬐고 있으니 눈을 바로 뜰 날이 온다.

 

이를 촉진하려면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과 관계를 끊어선 안 된다. 수구적 진보파만 당에 남아 국고지원금을 독식하고 자폐증을 심화시키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수구적 진보파에 대한 지지는 철회하되, 개혁적 진보파에 대한 지지는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참에 진보신당이나 녹색당 세력도 대거 통합진보당에 입당해 수구적 진보파를 바로잡으면 좋겠다.

 

수구적 진보파는 통합진보당 안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재벌체제 개혁에 딴죽을 거는 장하준이나, 채용비리를 저지르고 노동시장 개혁을 외면하는 거대기업노조 역시 수구적 진보파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진보의 대대적 자체정화가 전개되면 좋겠다. 지금은 엄청난 진통을 겪고 있지만 그걸 잘만 치러내면 진보는 거듭날 수 있다. 그럴 때 죽는 건 수구적 진보요, 사는 건 개혁적 진보다.